새벽 발굴
아직 해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만 이곳으로 올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삼초 간격으로 달라지는 하늘빛을 보세요 마치 적군의 진격을 목전에 둔 마을 여인들의 공포 같은 빛의 움직임
해가 정격 포즈로 하늘을 완전 점령하고 나면 이 발굴지를 덥석 집어 제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사탕수수도 목화도 자라지 않는 이 폐허 해는 이곳에 아찔한 정적을 경작하고 햇빛은 자유 데모보다 더 강렬하게 폐허의 심장을 움켜쥐지요
사방으로 줄자를 두르고 칼로 잘라낸 듯 땅을 나누고 (기록을 위해 만들어진 이 기술은 귀여워요, 감쪽같이당신이 이 지구에 있었던 마지막 자리를 남북경위도 숫자로 딱 매겨내지요, 그리고 제가 지금 기록하고 있는 격 - P-1
자 안에 든 작은 발굴지 지도를 좀 보세요, 그 안에 점을 찍으면 그 점이 당신의 마지막 지상의 자리가 됩니다)
그대들은 누구이신지요 앉은 다리로 서쪽을 향해 머리를두고 이 무덤 안에 든 그대들은 누구인지요 햇빛이 나오자마자 날아오는 초원의 파리 떼들 아직 산 자의 뜨거운 얼굴 땀으로 엉겨드는 파리 떼들
이름 없는 집단 무덤 해골 없이 다리뼈만 남아 있거나 마디가 다 잘린 손발을가진 그대들 해와 달이 다 집어 먹어버린 곤죽의 살덩이들은 흙이 되어 가깝게 그대들의 뼈를 덮었는데 아직 흙에는 물기가 남아 있어 비닐봉지에 그대들을 담으면 송송 물이 맺힙니다
그대들은 누구인지요 심장 없는 별을 군복 깊숙이 넣고사는 그대들은 누구인지요 저 초원에 사는 베두인들이 별에 쫓겨 이 폐허로 들어와 실타래 같은 짠 치즈를 팔고 해에 쫓겨 헉헉거리다 잠시 하는 휴식 시간, 설탕에 절인 살구를 치즈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는 이 점령지 폐허에서 그대를 발굴하는 이는 또 누구인지요 - P-1
저 해는 제 식민지를 잘 관리하는 이를테면 우주의 소작인인데 그리하여 우주보다 더 혹독하게 폐허의 등허리를 누르는데 흙먼지 미립 속에 찬연히 들어와 움직이는 식민 권력 속에 목마른 이는 물을 구하러 마을로 가고 폐허에 남은 이는 그대가 든 비닐봉지에 구멍을 뚫어주며 그대의 마지막 물기를 말리고 있습니다 - P-1
그때 달은
그때 달 하나 마치 나를 그릴 것처럼 저 혼자 내 속에서 돋아나더니 내 속을 빠져나가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에 감추어져 있던 나는 그렇게 빛 아래 서게 되었는데 (어쩌다가 내 속은 달을 돋아나게 했을까, 일테면 파충의 기억을 내 속은 가지고 있었던가) 후두둑 까마귀가 날아가는 소리 컹컹 늑대 우는 소리 저 먼 산이나무들을 제 품속에서 끄집어내어 올빼미를 깃들게 하고 (그때 또 달 하나 저 혼자 내 속에서 돋아나더니 내속을 빠져나가) 먼저 걸어 나간 달이 새로 걸어오는 달을 성큼 집어 먹자 산은 깃든 올빼미를 얼른 품으로 끌어안아 들였습니다 (그때 또 달 하나 저 혼자 내 속에서돋아나서는 내 속을 끌고 허공으로 걸어갔습니다) 달을집어 먹은 달은 새로 걸어오는 달과 내 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빛 속에 서 있던 나는 내 속을 성큼 집어 먹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바라보았습니다 내 속에서 돋아든 달과 내 속을 집어 먹은 나는 그렇게 서로 바라보았습니다 - P-1
해는 우리를 향하여
까마귀 걸어간다 노을 녘 해를 향하여
우리도 걸어간다 노을 녘 까마귀를 따라
결국 우리는 해를 향하여, 해질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해 뜰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갔던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나이 어려 죽은 손발 없는 속수무책의 신들이 지키는 담장 아래 살았던 아이들
단 한 번도 죄지을 기회를 갖지 않았던 - P-1
아이들의 염소처럼 그렇게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날아가던 해뜰 무렵
아이와 엉겨 있던 염소가 툭툭 자리를 털면서 배고파, 배고파, 할 때
눈 부비며 염소를 안던 아이가 염소에게 주던 마른풀처럼 마른풀에 맺힌 첫날 같은 햇빛처럼 - P-1
연등빛 웃음
소녀가 웅크린 그 부엌 안에 작은 불을 켜며 라디오를 켜며 많은 나날들이 연빛 웃음처럼 소녀 또한 연등빛 웃음처럼
폭약 많은 오후조차 서기들에게 기록되지 않는 (너무나 흔한데요, 뭘, 등뒤에서 저 개들이 또 서기들의 어깨를먹어치울텐데요) 현대,라는 나날 인간 이야기
그러나 어느 날 우리들이 먹은 닭다리가 저 천변에 해빛에서 아득해질지라도 소풍 가는 날 가만히 옷장을 보면 아직 개키지 않은 옷들이 들어 있어도 그냥 둡시다 - P-1
갈잎 듣는 그 천변에서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므로, 돌아올 것이므로 그날 그 소풍에 가지고 갈 닭다리를 잘 싸고 포도주 두어 병도 준비하고
그대가 내 오라비로만 이 지상에서 그대가 나의 누이로만 이 지상에서 살아갈 것을 서약은 할 수 없을지라도 오오 소풍을 갑시다, 울지 맙시다 - P-1
그해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그해 들판에는 꽃이 유난히도 많이 피고 꽃진 자리에서는 잎도 무성하게 돋아 나오다 잎은 오랫동안 가지에 달려 있고 그 아래에서 소들은 잘 쉬다 염소에게 말을 걸고 장난을 치던 토끼는 연둣빛 풀을 배불리 먹고 작은 토끼를 낳고 들판을 아가 토끼와 걸어다니다 여자들은 아가 토끼를 사랑하여 그 옆에서 책을 읽고 수를 놓다 가지고 온 점심 도시락을 열어 까르르거리며 맑은 장아찌를 흰밥에 올려 먹다 그리고 그해 들판에는 해도 자주나와서 여자들의 등을 만져주다 여자들은 해를 껴안고 깊이 잠이 들기도 하다 바람이 지나갈 때 잠깐 깨어나서 눈을 부비다 구름은 나하고 하늘은 깊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는 이 세상 소리가 아닌 것처럼 맑다 여자들은 다시 눈을 감으며 멀리 잠이 들다 그해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그해 들판에서 많은 짐승들이 평안할 동안 멀리 잠이 든 것처럼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 P-1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얼마나 많았던가
빛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 시간을 거슬러 가서 평행의 우주까지 가는 일
그곳에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다른 부모를 가지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내 육체는 내가 가진 다른 이름을 이루어내고
그곳에서 흰빛의 남자들은 검은빛의 여자들에게 먹히고 (그러니까 내가 살던 다른 평행에서는 거꾸로였어요, 검은빛의 여자를 먹는 흰빛의 거룩한 남자들이 두고 온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자꾸 꾸며 우는 곳이었지요) 나는 내가 버렸던 헌 고무신 안에 지붕 없는 집을 짓고 무력한 그리움과 동거하며 또 평행의 우주를 꿈꾸는데
그러나 그때마다 저 너머 다른 평행에 살던 당신을 다 - P-1
시 만나는 건 왜일까. 그건 좌절인데 이룬 사랑만큼 좌절인데 하 하, 우주의 성긴 구멍들이 다 나를 담은 평행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면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서 아무것도 만나지 못하던 일, 평행의 우주를 단 한 번도 확인할 수 없던 일 - P-1
여름 내내
사과나무 아래서 책을 읽었습니다, 책 제목...... 기억나지 않네요, 사과가 아주 작을 때부터 읽기를 시작했는데, 점점 책 종이가 거울처럼 투명해져서 작은 사과알들을 책을 읽으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점점 책 종이가 물렁해져서 책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던 사과알들이 책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활자도 사과알을 따라 책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책은 물렁해졌고 물처럼 흐르려고 했어요, 물처럼 흐르는 책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요, 사과알이 든 흐르는 책을 여름 내내 읽고 있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사과알들이 다 사라지고 난 뒤, 나무가 책의 물 회오리로들어왔습니다, 집과 새와 구름이 들어왔습니다, 해가 그리고 내 위의 하늘조각도∙∙∙∙∙, 책은 무거워지고 더 거세게 흐르고, 여름 내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사과나무도 구름도 해도 하늘조각도 사라지는 자리에서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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