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序


「土地』 제1부를 『현대문학』지에 연재중이던 1971년 8월, 암이라는 진단에 의해 수술을 받은 일이 있다. 수술 전날 병실 창가에서동대문 쪽으로부터 남산까지 길게 걸린 무지개를 보았다. 참 긴 무지개였었다. 아마 나를 데려가려나 보다, 하고 나는 혼자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날 회진 온 의사에게 물었다. 수술은 몇 시간이나 걸리느냐고 세 시간쯤 걸린다는 대답이었다. 대수술이군요, 하고 되었다. 삶에 보복을 끝낸 것처럼 평온한 마음이었다. 휴식으로 들어가는 기분이기도 했다. 야릇한 쾌감 비슷한 것도 있었다.
정작 죽음의 공포, 암이라는 병에 대한 불안은 가을, 회복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언덕길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가고 시장바구니를 든 주부가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은, 모든 생명, 나뭇잎을 흔들어주는 바람까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 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土地』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장을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妄想)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 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련만......
전신에 엄습해오는 통증과 급격한 시력의 감퇴와 밤낮으로 물고늘어지는 치통과, 내 작업은 붕괴되어가는 체력과의 맹렬한 투쟁이었다. 정녕 이 육신적 고통에서 도망칠 수는 없을까? 대매출의 상품처럼 이름 석 자를 걸어놓은 창작 행위, 이로 인하여 무자비하게 나를 묶어버린 그 숱한 정신적 속박의 사슬을 물어 끊을 수는 없을까? 자의(自意)로는, 그렇다, 도망칠 수는 없다. 사슬을 물어 끊을수도 없다. 용기가 없는 때문인지 모른다. 운명에의 저항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시각까지 내 스스로는 포기하지 않으리.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가시덤불의 길일지라도.

악마의 간계에 의해 ‘우스‘의 정직한 한 사내를 전능자 하나님이악마의 손에 넘겨준 『구약』의 「욥기」를 독자들은 기억하리라 믿는다. 악마에게 시험을 당하게 된 그 불운한 사내는 일시에 모든 것을 잃고 자식도 가산도 다 잃어버리고 끝내는 그 자신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창(惡瘡)에 시달리며 신음하는데, 환부(患部)에서 흐르는 고름을 사금파리로 긁어내는 욥의 그 모습을 생각하면부끄럽다.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詭)을 발하지 아니하고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하고 말한 욥을 생각하면 그의 발 아래 꿇어앉고 싶어진다. 시험은 끝나고 모든 잃은것을 찾은 욥을 염두에 떠올리며 위안을 받을 적에 나는 슬프고 내자신이 가엾어진다. 이 미물(物) 같으니라구.

승리 없는 작업이었다. 끊임없이 희망을 도려내어 버리고 버리곤하던 아픔의 연속이 내 삶이었는지 모른다. 배수(背)의 진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근히 발을 내밀 수가 있었다. 아무리 좁은 면이라도 희망의 여백(餘白)은 두렵다. 타협이라는속삭임이, 꿈을 먹는 것 같은 무중력이, 내가 나를 기만하는 교활한술수가, 기적을 바라는 가엾은 소망이⋯ 희망은 이같이 흉하게약화되어 가는 나를, 비천하게 겁을 먹는 나를 문득문득 깨닫게한다.
나는 표면상으로 소설을 썼다. 이 책은 소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하고많은 분노에 몸을 태우다가 스러지는 순간순간의 잔해(殘)다. 잿더미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性)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戰慄)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名利)를 두고 한말이 아니었나 싶다. 혹은 잡사(雜事)에서 손을 떼고 일에 전념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다. 그들 각도에서 본 행, 불행에는각기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론 노여움을, 때론 모멸감을 느끼며 그런 말을 듣곤 한다.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무궁무

진한 인생의 심층을 상식으로 가려버리려는 짓이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 그렇게 가치지어지는 행복이라면 실상그 어느것과도 나와는 별 인연이 있을 성싶지 않았다. 분명 환난을 겪는 옵에게는 행복의 비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土地』 제1부를 쓰던 삼 년 동안의 내 심경이며 그것을 적어본 것이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1973년 6월 3일 밤
作者

신판(版) 서문


사정에 의해 1989년 가을부터 나는 인지를 발부하지 않았고 ‘토지』의 출판은 중단 상태로 들어갔다. 문학을 포기할 생각도 해보았고 서점에 『토지』가 꽂혀 있는 것을 보면 심한 혐오감에 빠지기도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절망감은 꽤 오랫동안 나를 침잠하게 했으며 내 문학이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가를 깨닫게도 했다. 그리고 독자들도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 하며 출판 중단을 비난하는 내주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고 시간을 응시하며 겨울나무가 바람에몸을 흔들며 고엽을 떨어뜨리듯 나 역시 새봄을 맞기 위하여 분노의 쓰레기를 떨꾸려고 호미를 들고 텃밭에 나가곤 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무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찰나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작년 가을부터 종결편인 『토지』 5부의 연재를 시작했으며 주변의 비난을 수용하여 『토지』 출판의 재개를 결심했다. 젊고 맑은 감성들이 모여서 하는 솔출판사를 선택하여 이 책이 나가게 되었는데 바라건대 조약돌처럼 이 강산 사방에 깔려 있는 문화라는 허상
속에서 진정한 문화에의 회귀에 성과 있기를 빈다.

1993년 6월 8일
박경리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후우이이 요놈의 새떼들아!"
극성스럽게 새를 쫓던 할망구는 와삭와삭 풀발이 선 출입옷으로 갈아입고 타작마당에서 굿을 보고 있을 것이다. 추석은 마을의 남녀노유,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강아지나 돼지나 소나 말이나 새들에게, 시궁창을 드나드는 쥐새끼까지 포식의 날인가 보다.
빠른 장단의 꽹과리 소리, 느린 장단의 둔중한 여음으로 울려퍼지는 징 소리는 타작마당과 거리가 먼 최참판댁 사랑에서는 흐느 - P11

낌같이 슬프게 들려온다. 농부들은 지금 꽃 달린 고깔을 흔들면서 신명을 내고 괴롭고 한스러운 일상(日常)을 잊으며 굿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최참판댁에서 섭섭찮게 전곡(錢穀)이 나갔고, 풍년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실한 평작임엔 틀림이 없을 것인즉 모처럼 허리끈을 풀어놓고 쌀밥에 식구들은 배를 두드렸을 테니 하루의 근심은 잊을 만했을 것이다.
이날은 수수개비를 꺾어도 아이들은 매를 맞지 않는다. 여러 달만에 솟증 풀었다고 느긋해하던 늙은이들은 뒷간 출입이 잦아진다. 힘 좋은 젊은이들은 벌써 읍내에 가고 없었다. 황소 한 마리 끌고 돌아오는 꿈을 꾸며 읍내 씨름판에 몰려간 것이다.
최참판댁 사랑은 무인지경처럼 적막하다. 햇빛은 맑게 뜰을 비쳐주는데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새로 바른 방문 장지가 낯설다. - P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도언

1972년 충남 금산에서 출생. 199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 소설집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 「악취미들』이 있다.
미술과 사진을 글쓰기와 연계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으며 ‘작업‘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은 사슴‘이라는 뜻을 가진 섬 소록도는 그 이름만큼이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하지만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치료하기 위한 국립 병원이 들어서면서 이 아름다운 섬은 천형의 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 땅을 축축하게 적신 한센병 환자들의 눈물과 한숨을 어떤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700여 명이 집중적으로 보호 치료되고 있는 소록도 국립 병원은 언뜻 보기에는 사기업에서 사원 연수용으로 지어 놓은 건물처럼 산뜻하고 매끈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가을 날씨 때문인지, 병원이나 치료 시설들이 내뿜기 마련인 특유의 음울한 기운은 찾을 수 없었다. - P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망각은 산책한다


보내고 돌아온 사람의 곁에
망각은 있다

비가 다녀간 흔적이 있군요
흙이 마르려면 시간이 걸리겠어요

망각은 커튼을 걷고 찻물을 데운다
다 타기까지는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어요
새하얀 식탁보를 바라보며
선 채로 허물어지는 사람 곁에

망각은 창을 열고 손짓한다
망각의 손짓 한 번에 노랑턱멧새가 날아온다

멧새는 텃새예요 텃새는
계절이 바뀌어도 떠나지 않고 머무는 새를 뜻해요

물은 쉽게 끓는점에 도달하고

산책할까요?

당신은 축복받은 새에게서
시끄러운 새. - P88

닫히지 않는 불의 입구를 본다.

한 마리의 몸을 가르고
수십 마리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당신은 모든 것을 등뒤로 보내려 하고

망각은 오르막길을 좋아한다.
한 걸음 뒤에서 걸으면
당신의 쏟아지는 뒷모습
발자국까지 집어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끓어요, 휘발되도록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없게

지워줄게요, 전부

잡아먹히며 평온한 하루가 간다 - P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울증이 오래 간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
노인처럼 따뜻하고 좁은 곳에 숨어 있고 싶다. 날씨만 좀 따뜻해지면 한강에 나가보는 것이 제일 좋은데, 한강의 물빛은 내 멜랑콜리를 가장 오랫동안 보아왔던 대상이다.
추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마음이 얼어붙었다. 지금이 하루 중 기온이 가장 높을 시간인데도 영하 7도, 내일 아침 기온은 영하13도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독한 술을 마시고 싶기도 하지만 내 몸이 버텨줄지 모르겠다. 우리 집은 간질환을 가족력으로 가지고 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그 때문에 차례차례 쓰러졌다. 하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심장병이 있다거나 신체적 기형을 갖고 태어나는 운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알코올이 그동안 나를 적잖이 - P226

위무했다. 알코올은 견고한 생활의 질서를 견디는 동안 생채기가 난 영혼을 달래주었고, 얕은 상상력에 기름을 부어넣어 주었으며, 만성적인불안과 공포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게 해주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술을끊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2011년 1월 29일 토요일, 생장점을 손으로가리고 무작정 불리한 날씨를 견디는 겨울나무들에게 눈길을 좀 더 줘야겠다. - P227

한국일보문학상 시상식장에 다녀왔다. 수상자인황정은 씨를 축하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녀는 우리 회사의 청탁으로 원고를 쓴 필자이기도 하다. 의외로 시상식장은 한산했다. 동료문인들도 그다지 보이지 않았고 또래 소설가들은 더더욱 없었다. 더욱 특이했던 것은 수상자의 가족조차 시상식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비로소 알게 되었다. 황정은 씨가 무척 고독하고 단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황정은 씨의 소설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뼈저린 맑은 적막이 그의 소설에푸른 독의 향기를 선사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이없게도 어떤 작가들은 적막을 빌리기도 한다. 그의 내부에서는적막이 태어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적막을 어디선가 빌려오는 것이다. 그것은 가짜 적막이다. 그의 곁에는 사람들이 흘러넘친다. 그러면서그는 끝없이 외롭다고 하소연한다. 자신은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고 스•스로 맹렬하게 주문을 건다. 그의 적막은 인사도 잘하고 사회성도 밝은 이상한 적막이다. - P228

주간신문에 사진에세이 연재를 시작하기로 하고, 그동안 찍어서 남 몰래 보관해온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첫 번째 연재물에 들어갈 사진으로 나무를 찍은 사진을 골랐다. 내가 찍어서보관하고 있는 사진은 사람을 찍은 것과 동물을 찍은 것, 그리고 날씨를찍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나는 첫 사진을 식물로 정했다. 이렇게생각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생명은 동물에서 식물로, 발언에서 응시로진화하기 시작했다고. 이것은 좀 경솔한 진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나는 노골적으로 움직이는 것들의 숨소리와 그것에서 나는 냄새를 예전만큼 긍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전의 나는 그것들을 역동적인 생의 작용이며 절제의 유혹을 초월한 순수한 에너지라고 찬탄해왔다. 나는 욕망을 언어로 말하는 그들의 명료한 의지와 의사가 맘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눈에 그것은 다만, 살아서 움직일 수있는 것들의 오만처럼 보인다. 살아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이 훨씬 고귀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 그리하여 나는 고양이보다 선인장이 편하고, 강아지보다 벤자민이 편해졌다. 선인장을 물어뜯고 있는 고양이가 있다면 주저 없이 회초리 같은 것을 들고 고양이를 나무랄 것이다. - P285

투명하고 차갑고 푸르고 높고 따뜻한 상처의 힘


해거름의 술집에서 김도언을 처음 만났다. 술빛보다 찬란하고 깊은 눈동자는 황홀과 불안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나는 피리에 홀린 물고기처럼 그의 틈새에 파랗게 깃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궁토록 불친절한 사람이어서 함부로 스스로에게 희망의 언약을 베푸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곧 구원을 믿는 자의 결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다만 그의 눈빛에서 더 이상 나의 슬픔이 내 내부에만 머물 수 없으리란 것을 예감하고 말았다.
김도언은 여전히, 또 오래도록 ‘잘 웃지 않는 소년을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상처의 힘을 온 영혼으로 살아내는 사람의 자세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울지 않는 사람과 잘 웃지 않는 사람 사이에 어떠한 불화가 존재할 수 있는지 나는 아직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 투명하고 차갑고 푸르고 높고 따뜻한 책 안에서 나는 그가 이 세계에 대해 꿈꾸고 있는 화해와 용서와 구원의 증거를 물빛처럼 환하게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김도언에게 한 번 호명된 사람과 사물과 책들과 언어들이 비로소 어떠한 생명력으로 스스로의 놀라운 길을 획득하게 되는지를 확인하는 순간 자명해진다.
경이로운 장르의 책 한 권이 우주 안에서 빠르게 하느님에게 잊혀지고 있는 지구의 위치를 다시 특별하게 붙들어 매어놓는다. 김도언의 사색가적 직관만이 베풀 수 있는 이적이다.

류근(시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짜 시인‘이라는 이데아적인 관념이 실재한다면, 시집을 내기 전의 시인이 시집을 낸 시인보다 진짜 시인에 더 가까울 것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집을 펴내는 순간 시인에게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시험이 오는 것 아닐까. 작가와 시인에게 오만함은 어떤 부분에서는 필요한 것인데, 그것은 당당함과 의젓함의 표현이어야 한다. 자신을 타자와 구별 짓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다른 이에 대한 업신여김의 표현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작가나 시인은 걸인보다 낮을 수 있고 황후보다도 높을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다들 황후보다 높은 쪽만 되려고 하지는 않는가.
책을 내기 전과 후, 상을 받기 전과 후, 혹은 편집위원 같은 영향력 있는 자리를 맡기 전과 후가 늘 다름없는 소설가와 시인,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문학의 희망을 발견한다. 내가 지지하는 문학은 낮아서 높아지는 문학, 세상의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는 문학이다. 이게 불가능한것이라면, 아마도 내가 마시는 술이 조금 더 늘겠지? - P171

누구나 살다 보면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만나게 되는데, 신중하면 신중할수록 좋은 선택의 순간은 세 가지라고 쓴 적이 있다. 배우자, 첫 직업, 칫솔이라고. 어디 이 세 가지뿐이겠는가. 모든 선택은 다 어렵고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하고 절대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어떤 요소들에 대해서 우린 선택의 기회조차 가질수 없는 경우도 있다. 부모가 그렇고, 형제가 그렇고, 직장 상사나 동료가 그렇다. 심지어는 사는 도시나 동네조차 우리 맘대로 결정하기 힘들다. 내 쌍둥이 형만 해도 회사의 명령에 따라 근무 도시를 다섯 번이나 옮겨야 했다. 나는 그 도시들의 이름을 간혹 중얼거리곤 한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들의 내역에는 시와 소설도 포함시키고 싶다. 시와 소설은 매순간 마주치거나 쏟아지는 언어, 사고, 상상력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작업이다. 남길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하는 동안의집중과 긴장을 쾌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시와 소설을 쓰면서 행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선택이란 사실상 시인과 소설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것은 그냥 시와 소설이 하는 것이다. 작품과 작가를 분리해서 생각하자는 구조주의자들의 아이디어도 이런 생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 P175

시는 혹독한 결핍의 산물이어야 한다. 그 결핍은 영원히 채울 수 없는것이어서 참혹하다. 시 쓰기는 이 참혹의 진창을 뒤져 사금을 줍는 행위다. 여림 시인은 진창에 들어가 사금을 줍다가 평생토록 햇볕 한 번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나는 그의 죽음이 서럽다. 그를 지상의 영토에서 무자비하게 추방한 이는 다름 아닌 시인들이다. 그 잘나고 힘센 시인들은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명랑한가.
여림 시인은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화려하게 등단했지만 세상을 뜨기전까지 단 한 편의 시를 발표했다. 이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가얼마나 ‘세상에게 철저히 지기만 하는 시인이었는지를. 그래, 모름지기 - P198

시인이라면 패배하는 데 성공해야 한다. 패배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시인은 실패한 시인, 아니 가짜 시인일 뿐이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나는 비겁하게도 세속의 편리와 풍요를 포기할 자신이 없어 시인의 길을 가지 못했다. 나는 비겁을 못 면했고 그 대가로 부끄럽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어느 날은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나는 지금 지나치게 불행과 멀리 있는 것이 아닌가. 불행이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불행의 옷소매를 붙잡아야 하지 않는가. 같은 해 같은 지면으로 등단한 시인이 죽음으로써 내게 심어준 편견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 P1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