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진에서 기차를 갈아탄 조찬하와 오가다는 새벽이 뿌옇게 걷힐 무렵 진주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이 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오종종하질 않고 훤히 트인 것 같군요. 바다도 없는데 말입니다."
오가다가 낯선 고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이 있어서 그렇겠지요."
"강을 끼고 들어오는 이 도시 어귀는 아름답더군요"
"여러 가지로, 유서 깊은 고장이지요."
"이곳이 형평사 운동의 진원지라면서요?"
"그렇다더군요 옛날에는 민란의 진원지이기도 했고."
"기생 논개 얘기도 있고."
"나보다 더 잘 아는데?"
"인실씨한테 들었지요."
"흔히 색향(色鄕)이라고들 하는 모양인데 옛날 감영의 관기(官妓)들 전통이 이어져서 그럴 테고 농산물의 집산지인 만큼, 돈푼깨나 있는 지주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그러나 임진왜란 때도 그랬었지만 저항이 드센 곳이라 하더구먼."
두 사람은 역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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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은 백정의 사우고 지는 살인자의 아들 아닙니까."
"참 그렇고나, 그렇지."
하다가 관수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한복이도 함께 소리를 내어 웃었다. 두 사내는 자신들이 왜 웃는지, 웃어야 하는지 분별도 없이,
우는 대신 웃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형님, 지는 말입니다. 지는요, 지는 말입니다. 후회 안 할 깁니다. 겁이사 나겄지마는요, 발 빼지는 않을 겁니다. 영호하고 약조를 했인께요 살인 죄인으로 세상 끝내기 보담이야 애국자로 세상 끝내는 편이 안 낫겄십니까."
애국자라 했을 때 한복의 얼굴에는 수줍음이 지나갔다. 그리고술 안 마시고는 못할 말들이었다.
"그라고 그래야만 나는 빚을 갚는 기이 안 되겄십니까? 빚 안지고 살겄다 그기이지 평생의 소원인께요. 관수형님이 처음 지보고만주 가라 했을 직에는 원망스럽기도 했제요. 하지마는 만주 가서길상형님을 만나보고 그곳 사정을 보이, 야, 길상형님이 나를 깨우쳐준 기라요. 나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라 벗어라 그것은 니 잘못이아니다...... 남이사 머라 카든지 서러버도 억울해도 이자 나는 기대고 떠받칠 기둥 하나를 잡은 기라요. 사람답게 살자...... 나는 발못 뺍니다. 나도 이 강산에 태어나서 소리칠 곤리가 있인께요. 형님이 훌륭하고 그 발밑에도 못 가는 거는 지도 압니다. 하지마는 형님! 지 앞에서 울믄 안 됩니다. 형님 우는 거를 보이 조금은 같잖다는 생각이 듭니다. 와요, 지 말이 틀맀십니까?"
"야, 한복아 그기이 정말로 니 말가? 니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나 못 믿겠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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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씻겨서 흐르는 도랑물같이 상쾌해 보인다. 인실은 조용하를 쳐다보았다. 나이를 헤아릴 수 없게, 뭣인지 모르지만 종잡을 수 없는 미묘한 것, 그리고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눈빛이다. 마음에, 육신에 숨죽이고 있을 치부를 엄폐할 여유를 주지 않는 눈이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또 주량이 늘었기 때문인지 조용하의 안색은 병적으로 창백하였고 피부는 탄력을 잃었으며 최상급 박래품으로 여전하게 세련된 차림새였으나 양복에 감싸인 육체는 초라해져가고있었다. 금력과 세력과 명예? 왕가의 피가 흐른다는 한말의 명문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고 오늘날에는 비록 대일본제국의 귀족으로 탈바꿈을 했을망정 어쨌든 조용하가 가진 것, 누리고 있는 것이 한반도에서는 적어도 으뜸에 속해 있건만 요즘 들어서 찬바람 같은비애에 침식되어가고 있는 그의 울울한 영혼을 인실의 눈은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힐난도 동정도 아니다. 타인의 눈이다. 하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서로의 존재, 피차간의 처지를 알고는 있었지만 만나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타인! 사람을 대할 적에 조용하는 늘 타인임을 과시하는 것으로 강자인 자신을 확신해온 사내였다. 냉담하다는 것은 그가 쓰는 칼 중에서도 예리한것이었다. 그랬는데 조용하는 지금 타인임을 웅변하는 인실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감히 내가 누구인데, 분노할여유도 주지 않는다. 명회는 거의 조용하를 정시하는 일이 없었다. 여자가 남자를 정시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행실이라 하더라도 명희의 그것은 좀 철저하였다. 마음을 감추는 행위로 볼 수 있겠고상대를 거부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한때 명희는 조용하에게 결코 타인이 아니었다. - P185

"조선 사람 전부가 임금 노예로 떨어진다 할 것 같으면 상대적으로 조선 사람 전부가 결사대로 들어가자 그런 말도 나옴직한데 정복자나 피정복자 쌍방의 방향이 화살 가듯 그렇게 곧게 나 있는 것은 아니며 제아무리 욱일승천(旭日昇天)한다는 일본의 기세이기로,
또 한편 한 사람의 친일파도 없는 조선 민족이라 가정하더라도 말입니다. 역사의 역학적 방향과 인간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일까요?"
"절망적이군요. 침략하는 일본이나 짓밟히는 우리들 모두는 의지밖에서 역사에 희롱당하거나 혜택을 받는다 그런 얘긴가요? 저는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말살당하느냐 안 당하느냐그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거구, 친일파의 존재가 아니었던들 우리의 사정은 좀 달라져 있었을 거예요. 길은 형편 따라 우회할 수도 있고 질러갈 수도 있겠지만 생각은 화살 가듯 곧아야 한다고 믿어요."
"생각이란 늘 이상에 기울기 쉬운 겁니다. 길과 같이 생각도 우회할 때는 해야 하고 지름길도 가야 합니다. 들판에서 식량을 생산해내는 농부가 싸움터에 병사를 보내어 의미 없는 죽음을 강요하는군주보다 훌륭하다, 이론으론 그렇지요. 또 그게 진실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 가치관이 힘을 쓴 적이 있습니까? 지배자 없는 시대가 있었습니까?"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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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도 한쪽으로 눕는다


대관령에 이르러 눈을 뜬다 높은 곳에 이른 귀 고막의 외마디 소리 때문이다 그래 가벼운 것들이 위를 향하지 문득 몸무게를 떠올려본다 왜 지나온 나이들은 무거워지는것일까 능선에 가까울수록 나무들은 한쪽으로만 몸이 기울었다 수평을 잡지 못하는 저들의 마음도 바다 쪽으로 향하는가 순간 나무들의 비명이 가파르다
그래 넋이 나간 게야 한쪽으로만 쓰러진 마음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과연 동해로 가는가 아름다운 것들은 스스로 대칭을 이룬다지만 대칭의 건너편에 늘 멀리 있는 사람이 있다
안개 속을 헤매인다 안개 속에서는 모든 풍경이 먼 휘파람처럼 손짓한다 꼭 그만큼의 거리가 여기까지 날 내몰은 것이다 수평은 아득하다 넘어갈 수 없는 선이 수평선을이룬다 결국 저 숨가쁘게 달려온 철길처럼 나는 끝내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 P14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툇마루에 앉아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마당 한쪽 햇살이 뒤척이는 곳 저것 내가 무심히 버린 놋숟가락목이 부러진
화순 산골 홀로 밭을 매다 다음날 기척도 없이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 마루 위엔 고추며 채소 산나물을 팔아마련한 돈 백만원이 든 통장과 도장이 검정 고무줄에 묶여매달려 있었다지
마을 사람들이 그 돈으로 관을 마련하고 뒷일을 다 마쳤을 때 그만 넣어왔다 피붙이도 없던 그 놋숟가락 언젠가 이가 부러져 솥 바닥을 긁다가 목이 부러져 내 눈 밖에 뒹굴던 것

버려진 것이 흔들리며 옛일을 되돌린다 머지않은 내일을 밀어올린다 가만히 내 저금통장을 떠올린다 저녁이다 문을 닫고 눕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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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은 그 대화를 반추해본다. ‘가슴에 못을 박아놨십니다.‘ 그것은 외로움인가 외로움, 그것은 아픔이다. 외로움보다 더 짙은 한일것이다. 예수의 그것은 더욱 더 짙은 것, 절대적인 것, 그리고 고토쿠에게는 선택의 여지는 있었다. 하기는 침묵했어도 외로웠을 것이지만 어떤 형태 어떤 상황이든 그것은 모두 사랑이 빚은 외로움이요 아픔인 것은 공통이다. 윤국은 숙이를 바라본다. 몇 번이나 빨랫방망이 밑에서 견디었는가. 숙의 하얀 무명 적삼은 얇고 낡아 있었다. 걷어올린 소매 밑에 드러난 팔목이 가늘다. 저 가는 팔로 매일 부지런히 쉴새없이 일을 하며 그러고도 항상 차림새는 단정하다. 숙이 때묻은 버선을 신고 있는 것을 윤국은 본 적이 없다.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울지 않기 위해 그런 것 같았다.
‘순결하구나, 들꽃 같구나. 나는 느낄 수 있어, 너 마음이 슬픔에 가득 차서 깨끗하게 씻겨져 있는 것을.‘
빨래를 끝낸 숙이는 빨래통에 빨랫방망이를 찔러놓고 그것을 머리에 이면서 일어섰다. - P129

남자라는 자각에 주먹질을 당한 것만 같았다. 별안간 자기 자신이 왜소해진 것을 느낀다. 여자라면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런 화제에 동요하는 것이 상식이다. 최서희라는 여자는 예외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묘해진다. 대단한 여자다. 구마가이같은 베테랑도 공략하기 어려운 여자다. 서장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구마가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새삼 무서운 여자라는 것을 느낀다. 말이 신랄하다든지 의미가 깊다든지 그런 것보다 서희가 자아내는 분위기에는 생래적(生來的)인 당당함, 그것이 구마가이를 위압했다. 당당함뿐이랴. 발톱을 감춘 암호랑이같은 영악함이, 언제 앞발을 들고 면상을 내리칠지 모른다는, 그것에는 다분히 선입견도 있었다. 분통이 터진다. 그러나 터뜨리지 못하게 서희의 말에는 잘못이 없었고 허식이나 수식이 없다. 허식도 수식도 없다는 것은 괘씸하다. 일본서는 최상급에 속하는 여자를 내보였는데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오히려 불쾌해하다니, 일본이 모욕을 당하였다. 조선 사람 거반이, 친일파만 빼면,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무식꾼조차 일본을 모멸하고 비웃는 것은 다반사가 아니던가. 구마가이 경부는 그것을 모르는 바보인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의 모멸이나 비웃음은 원성이요 약자의 자위다. 그러나 서희는 원성도 자위도 아닌, 조선의 문화, 그 우월의 꽃 속에 앉아 허식도 수식도 할 필요가 없는, 제 얼굴을 내밀고 있으니, 날카롭고 예민한 사내다. 엷은 그 입술이 상당히 깊게 넓게 느낀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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