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고 제18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부산지방법원 창원지방법원·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부산가정법원장 등 부산·경남 지역 법관으로 공직 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판사 시절, 양형 기준을 강화하여 공직 부패와 비리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판결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에겐 상담과 치료 프로그램을 이행하게 한 후 그 결과를 양형에 반영했다. 민사 재판에서는 원고와 피고 각각 실리와 명분을 찾아 모두가 이길 수 있는 협상과 조정에 무게를 두었고 형사 재판 중 단 한 번도 사형 선고를 하지 않았다. 2018년 4월 19일 헌법재판관 임기를 시작하여 2025년 4월 18일 퇴임했다. 정상에 오르지 않는 등산을 좋아하고 나무 이름에 해박하다.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券書行萬里路지향하는 엄청난 독서광이자 산책광이다. - P-1
"이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것이다." 김장하선생의 말씀은 제가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지침이 되었습니다. 2025년 4월 19일, 저는 38년의 공직 생활을 끝내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에게 재판권을 위임한 사람도 재판을 받은 사람도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좋은재판을 하기 위하여 시민들과 소통하였고 책을 읽었습니다. 공자의 말씀처럼,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망에 빠지기 쉽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기 쉽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배운 바를, 생각한 바를 글로 썼습니다. - P5
요구하기 위해 쓴 글도 있고 성찰하기 위해 쓴 글도 있습니다. 이제 무직이 되어 여유가 생겼으므로 인생과 함께 글을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우선 그동안 썼던 글들을다시 읽고,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골랐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인생에 조언할 만큼 지혜롭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판사나 재판관으로 있으면서 생각하였던 바를 여러분에게 말하고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저의 인생이 풍요로워질 것이고, 어쩌면 여러분의 인생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한국민으로서 비슷한 고민을 하니까요. - P6
평생 책 한 권 내는 것을 꿈꾸었던 저에게는 이 책의 발간이 큰 의미가 있음이 명백하지만, 여러분께는 어떠한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던 어느 판사의 기록입니다. 호의를 갖고 썼던 글을 책으로 내놓습니다. 판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판사들은 무슨 책을 읽는가? 궁금한 분들, 특히 저의 생각이 궁금한 분들은 한번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2025년 8월 문형배 - P7
나는 ‘헌법의 존립을 해하거나 헌정 질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헌정 질서 파괴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배제되고 있는 동안(1983~1986년) 대학교를 다녔다. 그때 열심히사법 시험 공부를 하였다. 헌정 질서가 파괴되건 말건, 헌정 질서가 파괴되는 것에 저항권을 행사하건 말건. 그렇다고 20대 초반의 들끓는 피를 가지고 있던 내가 현실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생 운동을 하던 친구가 있었고 당장 도서관 공부를 방해하는 최루탄이있었다. 나는 판단을 유보하였다. 시험을 끝내놓고도 얼마든지 시간은 있다고. 1986년 2차 시험을 끝내고 그 무렵 유행하던 공장 체험을 해보기로 하였다. 민중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은 주장이나 실천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기득권때문에 민중의 고통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그 당시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 P13
내가 원했고,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결정할 수 있고, 또내가 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판사. 국민으로부터 의심 어린 눈초리와 못 미더운 시선을 받은 적도 있지만 법원만큼 자연 치유력을 갖고 있는 국가 기관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하면서, "불의가 법을 유린할때 그건 불법이다. 불의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그건 정의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지 못한 과거를 스스로 반성할줄도 아는 판사들의 법원. 안치환의 노래는 종반부로 치닫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않았네. 길은 멀은데 가야 할 길은 더 멀은데. 비틀거리는 내모습에 비웃음 소린 날 찌르고. 어이 가나 길은 멀은데." - P18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하다.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 - P20
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 P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