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시나무는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는 애증어린 나무이지만 적어도 저는 그 순간 한 나무가 가진 미덕이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왜 아카시아를 아까시나무라고 하는지 의아해 할 터이니 우선 이것부터 설명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아카시아(acacia)‘라고 부르는나무는 열대지방에 관목상으로 자라는 다른 나무입니다. 아까시나무는 학명에서 가짜 아카시아‘ 라는 뜻인데 우리나라로 들어와 진짜 아카시아로 되어 버린 것이지요. 아카시아라는 이름이 주는 세련되면서도 친숙한 느낌으로 이 이름을 버리기는 못내 아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본래 이 이름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 아까시나무로 해야 맞습니다. 식물 이름은, 특히 세계가 공통으로 쓰는라틴어 학명은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식물이름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국제식물명명규약‘ 이란 것이 있어 선취권을 엄격하게 따져이름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기보다는 좀더 많은 미움을 받는 아까시나무. 하지만 이 나무가 살아가는 방법을 엿보며 조금씩 이해하다보면 오히려 미안할 사람은 바로 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까시나무가 눈총받는 가장 큰이유는 좋은 우리 땅을 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까시나무는 일제시대 때 산을 수탈하느라 소나무를 마구 베는 바람에 산사태가 우 - P186

려되는 땅에 응급복구용으로 들여와 심은 것이지, 이 나무 스스로 우리 땅을나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해방이 되고도 한동안 연료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빨리 키워 땔감으로 쓰도록 식수를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콩과 식물인 이 나무는 공중의 질소를 고정해 땅을 비옥하게 할 수도 있으니 이 나무 입장에서는 억울하지요. 그저 시기를 잘못 만났을 뿐이지요.
아까시나무가 있는 숲은 나쁜 숲이라는 얘기도 그렇습니다. 좋은숲과 나쁜 숲을 딱 잘라 구분하는 것도 어렵지만 일단 우리나라 고유의 나무들이 우거져 살아가는 숲을 좋은 숲이라고 말한다면 아까시나무는 이런 숲에 들어가 살 수 없습니다. 이 나무는 자라는데 햇볕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늘 속에서 세력을 군락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언젠가 숲의 천이를 설명하면서 이 원리를 설명했지요. 그러니 나쁜 숲이라는 것도 역시 우리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 아까시나무탓은 아닌 듯합니다.
다음 주엔 아까시나무의 무서운 가시와 더없이 달콤한 꿀 이야기를 좀더 할까 합니다. 그 전에 문밖으로 나가서 아까시나무 향기와 조우해 5월의 기운을 한껏 느껴보기를 권합니다. - P187

능소화의 별명이 ‘양반꽃‘ 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이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서만 심을 수 있어, 혹 일반 백성의 집에서 이 나무가 발견되면 관가로 잡혀가 곤장을 맞았다는 얘기도 있지요.
한여름, 늘어진 꽃자루 끝에 입을 대고 한껏 힘주어 부는 나팔처럼싱그럽게 고개를 쳐들고 피는 능소화꽃들, 바람이 불고 비라도 몹시•내리면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이 능소화 꽃송이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 그 나팔을 닮은 꽃들이 불어내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시대의 양반이 아닐까 싶습니다. - P217

더욱이 상사화는 사람의 손에 의해 키워진 지 너무 오래된 탓에 본성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의 입장이 아닌 식물 입장에서 꽃의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열매를 잘 맺지 않을 뿐 아니라, 열매가 달린 듯해도 후손이 될 씨앗은 여물지 않습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리워하다 죽어가는 그런 소극적인 절꽃은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왜 절에 많냐고요? 사연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상사화 알뿌리의 방부효과 때문입니다. 불경을 만들 때 종이를 배접해 책을 묶는 데쓰는 접착제에 넣거나 탱화를 그릴 때 섞으면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않게 해주니 항시 곁에 심어두고 이용했던 것이죠.
상사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는 것이 병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고운 상사화 분홍 꽃빛을 넋 놓고 바라보며 이제는 아련해진 첫사랑의 추억에나 빠져드는 것이 더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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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 ㅎ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유잣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다.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쉿,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2006) - P225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창비 1993) - P258

시벽(詩癖)

이규보


나이 이미 칠십을 지나 보냈고
지위 또한 삼공에 올라보았네.
시 짓는 일 이제는 놓을 만한데
어찌해 그만두지 못하는 건지.
아침부터 귀뚜라미처럼 읊조려대고
저녁에도 올빼미인 양 노래 부른다.
어찌해볼 수 없는 시마란 놈이
아침저녁 남몰래 따라와서는,
한번 붙어 잠시도 안 놓아줘서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 도려내
몇편의 시를 쥐어짠다네.
내 몸의 기름기와 진액일랑은
살에는 조금도 안 남았다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나니
이 모습 정말로 웃을 만하다.
그렇다고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 만한 것도 없다네.
손바닥을 비비며 크게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옮는다.
살고 죽음 반드시 이 때문이리
이 병은 의원도 못 고치리라.

정민 한시 미학 산책」(휴머니스트 1996) - P281

겨울밤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먼 바다』(창비 1984)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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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순례咸順禮


1966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으며 1993년 「시와사회」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 시인의 말


지난 한 해 숨가쁘게 달려왔다. 작품으로만 흠모해오던 시인들의 시집 여덟 권을 묶어내는 동안 입에서 단내가 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교정을 핑계삼아 그들이 갖고 있는 詩力을 들여다보면서 무릎 내려치기도 하고 고개 주억거리기도했다. 가야할 길이 어렴풋하게나마 가닥 잡히기도 했다. 과연 일 년을 넘길 수 있을까? 만류하는 이들이 많았다. 안 되는쪽에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 딱 일년이다. 그들이 그토록 염려하던... 일 년을 무난히 넘겼다.


이제... 내 피붙이와도 같은 여덟 권의 시집에 또 한 권을 보태려 한다. 나를 세우려 한다. 까마득한 후배를 위해 먼길 한달음에 달려와 구들장 다숩게 덥혀 놓으신 선배님들 계셔서 두렵지 않다. 춥지 않다. 두 발이 뜨겁다.

2006년 성하盛夏 대전에서
함순례

시의 맛과 파장은 아주 싱겁고 엷어서 무미한 진동에 가까워야 하고 그 소극적 운동성이 미세하지만 깊고 먼 여운을 남길 것이라 믿는다. 함순례의 시는 결연한 의지에 차 있지도 않고 세계를 토막내고 비틀지도 않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조용히 스며드는 울림이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가족과 이웃, 자연에 대한 깊고 진솔한 고백들은 순박하고 순정하며 담백하다. 자칫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로 흘려듣기 쉬우나 그것들은 사실 우리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망각 속에 방치해 두었거나 뿌리쳤거나 ‘요금별납‘ 도장을 찍어 멀리 날려 보낸 것들이다. 그 기억들이 지금 다시 살아나 시인의 오늘을 깨우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시인의 손아귀에 쥐어진 분노와 두려움의 「돌멩이」는 물살에 깎여 따스해졌다. 서정시의 미덕은 이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지 않고 멈추거나 뒷걸음질치며 모든 기억들을 치유하고 얼싸안는데 있다.
최영철(시인)

어서 오게. 여기 시가 한상 차려져 있네.
이 자리에서 자네는 고향산천의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자란 풀꽃들의 함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네. 그 모진 비바람 속에서 척박한 땅을 일구어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던 사람들이 있었네.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읽다 보면 눈물이 날 거네. 참 어려웠던 시절의 암담했던 풍경과,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 설움과 쓰림까지도 외면하지 말기를. 우리는 모두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서 합쳐질 것이니. 함 시인의 시세계는 허황된 관념의놀이가 아니라 우리네 삶의 실체와 풍속의 세계를, 인간과 자연의 참 모습을보여주고 있기에 문학적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네. 마음껏 들고 가시게.
이승하(시인, 중앙대교수)

꼴림에 대하여


개구리 울음소리 와글와글 칠흙 어둠을 끌고 간다
한번 하고 싶어 저리 야단들인데
푸른 들녘마저 점점이 등불을 켜든다

내가 꼴린다는 말 할 때마다
사내들은 가시내가 참… 혀를 찬다
꼴림은 떨림이고 싹이 튼다는 것
무언가 하고 싶어진다는 것
마음속 냉기 풀어내면서
빈 하늘에 기러기 날려보내는 것

물오른 아카시아 꽃잎들
붉은 달빛 안으로 가득 들어앉는다

꼴린다,
화르르 풍요로워지는 초여름 밤 - P11




바위 위에 누워 젖은 몸 말린다 인적 없는 숲은 마음껏 엎드려 있기에 좋다 개미들이 발가락 새 파고들다가 옆구리 쪽으로 기어올라 손등에 달라붙는다 허기로 가득찬 몸놀림, 움직이지 않으면 밥 한 그릇 먹을 수 없는 내 생애와어찌 그리 닮았는지, 한 끼 밥이 지닌 무게를 생각하며 개미 한 마리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손, 손금을 훑는다 나도 너처럼 바람과 햇살 따스한 곳으로 항상 까치발 세우며 살고 있으리라 서른 아홉 늦은 저녁, - P21

화인火印


요금별납, 印을 찍는다
반액 할인 위해 우편번호대로 분류한
책들 풀고 또 묶는다
행간을 열지 못한 채 구석으로 밀려날 지 모르는
받는 즉시 폐기될 지 모르는

낙인을 찍는다
낱낱의 환부만을 건드리는 건 아닌지
멈칫 멈칫 흔들리지만
질긴 누군가의 생에
요금이라도 대신 내주고 싶어
힘주어 꽝! 찍는다 - P31




안개 깔린 이른 아침
느리게 차를 몰면서 새들이 걷는 걸 본다
시속 30km 틈새로 찍히는
새들의 발자국
얼음 물 속에 콕!콕! 부리를 적신다

사방 숲으로 날아오르기 위해
제 뼛속 비우고
먹은 것 땅에 내려놓았구나

아프다, 라는 말
잇몸새 누르고 계신 골다공증 어머니
병문안 가는 길이다 - P85

폭포


여기부터 시작이라는 것인가

내리꽂히는 황홀함에 길들여져 왔으나
물이 뛰어내린 자리에 발 담그며 환호했으나

폭포는
물의 계단

폭발하는 바닥의 빛!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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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네 번째 ‘시인의 말‘ 을 쓴다.

‘시인의 말‘ 이라 써놓고 보니
갑자기 먹먹해진다.

시를 들여놓기도 부끄러운 집인데
말에게도 방 한 칸 내주어야 하는지.......

숲에 드는 나이라지만
숲은커녕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제대로 보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제주에서 파풍破風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폭풍의 뜻이 아니라 바람을 깨뜨리는, 현무암 돌담들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단호한 벽이 아니라 숭숭 뚫린 구멍의 몸으로 바람의 길을 내주기 때문이다. 바람과 돌담의 깊은 통정, 김수열 형의 시가 그렇다. 분별지를 넘어 지천명의 경지에 올랐으니 "늙은 밥솥이 아니라 마침내 파풍의 시가 되었다. 문득 "왜, 내 말이 우습냐?! 한잔 따라봐" 뭉쳐도 자꾸 눈물겹다. 실로 오랜만에 인공 조미료를 치지 않은 시의 진경, 원석을 보았다. 입맛 상큼하니 내장마저 환하고 피는 좀 더 맑아진 기분이다. 당분간 꿈자리 사나운 시들은 멀리해야겠다.
ㅡ이원규 시인

그는 섬이다. 섬의 기질을 타고 났다. 무리에 섞여 있어도 홀로 고즈넉한 모습이 그러하고, 만만찮은 이력임에도 이를 명함 삼지 않는 은둔의 처세가 그러하며, 여간해선 동요하지 않는 뚝심이 그러하다. "물엣"들은 물론이거니와 "비록 섬에 있어도 섬 아닌 것들은/ 정말 모"르는 섬, 바로 그 자체다. 삶과 시는 무관하지 아니하므로 그가 빚은 시 또한 섬일 터, 쉽게 들고 나지 못해 더욱 절절해진 그리움의 표상일터, 그리하여 김수열의 시집을 펼치는 일은 섬에 입도入島하는 일과 진배없는 일일터이다. 아! 오늘 같은 날 "인생에게 질 준비가 되어 있"는 그와 화북방파제에 퍼질러 앉아 "낮술"을 대작하고 싶다. 취한 척, ‘선배는 시가 커? 사람이 커?‘ 딴지도 걸어보면서 역정은커녕 낄낄대며, ‘그래 나 키 크다, 왜?‘ 할 게 뻔하지만 나는 안다. 그의시가 무진장 크다는 거, 어디에 내다 놓아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우뚝하다는 거.
ㅡ손세실리아 시인

늙은 밥솥을 위하여


한땐 그랬다
저 밥솥처럼 씩씩거리다가
더 내지를 소리 없어 숨이 막힐 즈음이면
마지막 탄성으로 뜨거운 콧김 길게 내뿜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소곳해졌다

이젠 늙은 밥솥을 이해할 나이
겉은 제법 번지르르하나
속내 들여다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다
콧김은 잦아들고
잠잠한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고슬고슬한 밥은 간데없고
늘 타거나
설었다

늙은 밥솥 하나
흐린 정물처럼 고즈넉하다 - P13

낮술


인생에게 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비 내리는 낮술을 안다

살아도 살아도 삶이 내게 오지 않을 때
벗이 있어도 낯설게만 느껴질 때
나와 내가 마주 앉아 쓸쓸한
눈물 한 잔 따르는

그 뜨거움 - P14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줄 알았다
설운 서른에 바라본 쉰은
너무 아득하여 누군가
손잡아주지 않으면 못 닿을 줄 알았다
비틀거리며 마흔까지 왔을 때도
쉰은 저만큼 멀었다

술은 여전하였지만
말은 부질없고 괜히 언성만 높았다
술에 잠긴 말은 실종되고
더러는 익사하여 부표처럼 떠다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몇 벗들은 술병과 씨름하다
그만 샅바를 놓고 말았다
팽개치듯 처자식 앞질러 간 벗을 생각하다
은근슬쩍 내가 쓰러뜨린 술병을 헤아렸고
휴지처럼 구겨진 카드 영수증을 아내 몰래 버리면서
다가오는 건강검진 날짜를 손꼽는다 - P15

과속방지턱


나이를 먹다 보면 말이야
머리와 발이 따로 놀고
가슴과 아랫도리가 하나가 아닌 거라
생각 같아선 박지성이 부럽지 않지만
십 분만 뛰어봐, 하늘이 노래
오장 쓴 물까지 나온다니까
생각으로야 단번에 설 것 같지만
막상 뛰어봐, 한 게임도 숨차
문전만 어지럽히다 말거든
멀리는 머리와 발 사이
가깝게는 가슴과 아랫도리 사이
그래서 과속방지턱이 있는 거라
한꺼번에 넘지 말라고
한번쯤은 생각하고 넘으라고

왜, 내 말이 우습냐?
한잔 따라봐 - P17

고등어를 굽다가


등푸른 고등어 한 손 사다
절반은 구이용으로 패싸고
나머지는 조림용으로 토막 내고

불판에 올려 고등어를 굽는다
적당히 달구어 뒤집어야
유연한 몸매 그대로 살아
푸른 물결 찰랑이는데
대책 없는 서툰바치
뒤집을 때마다 몸통 갈라지고
머리통 떨어져나간다
능지처참이다

사람 만나는 일
더도 덜도 말고 생선 굽듯 하라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 망가뜨리면서
나는 여기까지 왔을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 무너뜨리면서
남은 길 가야 하는가 - P18




강,
하고 부르면
입안 가득 찰랑거리다
은은한 물비늘로 되울려오는

이미
오래 전이었으나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첫 포옹 같은

어머니,
하고 부르면
온통 그리움으로 환하다가
돌아서면 못내 아련해지는

살아 있는
온갖 것들 품고
어김없이 마른 가슴 열어
빈 젖 물리는
- P29

생각을 훔치다


꽃은
하늘 올려다보면서

올까
말까

비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갈까
말까 - P32




팔순 고비에서 어머니는
속엣것들을 다 비워내고
새가 되려 하신다

모이 한 줌
물 한 모금

어머니에게
푸른 하늘은커녕
잠시 쉬어갈 나무도 못 되다니!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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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바퀴


모든 시스템은 무겁다, 시스템을 온전히 떠받치고 있는 바퀴는 무거워, 구르고 싶은 거다. 중앙시장 여인숙 창녀는 아줌마다, 색기(色氣)가 빠져나가는 사십 대, 이렇게라도 구르지 않으면 생업의 시스템을 견딜 수 없어요 가방을 뒤저 콘돔을 꺼낸다. 집을 나온 L과 P가 불륜의 방에 든다. 과육을 빠는 벌레들처럼 서로를 빨아 댄다. 사랑으로 제 몸을 맹렬히 굴리지 않고서는 그나마 견딜 수 없다는 거다.
두 번이나 옥상에 올라갔다 내려온 두식이는 지금도 허공에서 구르고 싶다, 두식이는 우등생이다, 그는 날마다 일등해야 한다는 일등 시스템을 견뎌야 한다. 어느 날 철규 씨는 죽은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아부지 이제 그만 진짜 죽으세유, 그동안 지들이 삼십오 년 동안 지사 지냈잖유, 인저 엄니두 늙어 요양원에 가시구 지사 지낼 사람두 읎슈, 이번이 마지막 지사유 알았지유, 개미들이 지은 개미집, 벌들이 지어놓은 육각형의 벌집, 시스템은 도깨비 빤쓰보다 찔기고도 튼튼하다, 끄덕없다. 무겁다, 세상의 모든 바퀴는 구르고 싶은 거다 - P49

거미


혼자 아픈 날 늘어가리

혼자 중얼대는 날 늘어가리

혼자 멍 때리는 날 늘어가리

허공에 매달린 거미처럼 - P89

일곱 시 반의 신도림역


쉰다섯이 넘으면 누구나 다 출가하고

상아를 묻으러 가는 코끼리처럼

일흔다섯이 넘으면 누구나 다 죽으러 간다면

그런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 비밀스런 행위를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저 때가 되면 조용히 일어나

알아서 문을 열고 나간다면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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