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9 어둡고 쓸쓸한 날들의 평화
늦가을의 바람이 제법 찼고, 해뜨기 전의 구름들은 파란 잉크가 번진 솜뭉치 같았다. 비가 한 차례 내리면 곧 이어 지상엔 영하의 날씨들이 닥칠 거였다. 겨울, 만물이 어둠 속의 흐느낌처럼 가냘 퍼지는 겨울.
p25
언뜻 그런 우스갯소리들이 엉터리인 것 같지만, 사실 전쟁터에서도 사람이 늘 찡그리고만 사는 건 아니거든, 사람들은 우울한 환경 속에서도 해학을 수신할 수 있는 안테나를 제공받게 마련이지. 생존하려고 말이야. 웃음은 폭풍이 몰아치는 인생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배와도 같아.
p47 이제 나무묘지로 간다
고풍스런 옛 관공서 건물에는, 지난여름 약진하는 군대와도 같이 벽을 타고 기어오르던 담쟁이덩굴의 손자국들이 역력했다. 무성하고자했던 것들, 번식하고자했던 것들의 상흔. 나는 어느새 손톱이 다 부러져 나간 것을, 내 추억의 검은 피가 딱딱하게 맺혀버린 자리를 보고 있었다.
p52
터무니없는 고요라는 것, 나는 폐 속에 갑갑하게 차있는 그 고요함으로 인해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p
p53
거기엔 어김없이 그 혼령의 옷자락 같은 파란 안개가 있었다. 나는 내 영혼이 색맹이기를 바랬다. 세상의 안개들은 워낙 우윳빛일 뿐, 저 안개가 자꾸 파란색으로 느껴지는 것은 내 눈이 이상해서라고 .......
풍경은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향해 날카롭고 가느다란 음각의 판화를 새기고 있었다.
........ 아무런 언어 없이 서로의 세계를 주고받는 모습을.
p62
물이 끓는 난로에 올려놓은 겨울 귤껍질처럼, 서서히 내 몸에서 추억의 냄새가 우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
땅에 묻히기를 거부하는 상처받은 영혼들이 교감하는 어떤 장소에서, 나무만큼 영원한 모습으로 마주치리라는 것을.
....... 손끝에서 별빛 같은 아픔이 반짝였다.
별빛 같은 아픔이.
p67 그녀에게 경배하시오
바람이 생선처럼 식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p101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병원이라는 곳은 환자복만 입히고서도 모든 사람들을 죽음에 가깝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지닌 곳이었다. 생의 체념과 연민의 범벅이 표현하기 힘든 모양으로 흘러내리는 그런 곳이었다.
p109
추억에도 속도라는 것이 있다. 나는 아주 드물게 그 속도를 감지하곤 한다. 나는 내 그림 속의 인물과 사물들이 그 추억의 속도로 움직이길 원했고, 그 그림들에서 지나간 내 모습들을 반추할 수 있기를 추구했다.
p114
지독한 불면의 밤 홀로 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그 방이 활활 타오르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내가 외로움이라는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귓속으로 마치 수돗물이 욕조를 채우듯 올라오는 느낌, 내 삶의 대부분은 그런 쓸쓸함과의 싸움이었다고 장정이 멋진 공책에 쓰면, 그것이 바로 내 자서전이다. 삶에 관한 주의; 부작용인 것이다.
p121 레몬트리
다만 멀리 존재함으로 환상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별들의 세계가 그러하다. 초저녁 서쪽 하늘의 고혹스런 비너스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곧이어 화성의 붉은 사막이 남서쪽 처녀자리 일등성 스피카 곁을 산책하고, 목성은 길잡이별 거문고자리 직녀의 밝기를 무시하며 제 고뇌를 빛낸다.
.......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 주질 않는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기에.
p153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지나치게 소심한 배려는 가장 육중한 비판에 다름 아니라는 걸 왜 모르고 있을까, 그대는.
내가 쓴 소설을 언제나 처음 읽던 여자. 그녀가 쓴 시를 항상 외우고 있던 나. 두 사람 모두 이젠 내게서 떠나라. 내 사랑의 추억, 기다림이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 윤회의 혹독한 끈마저 끊어지도록 매서운 속도로.
p161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두려운 가르침. 진리의 명제 그 역도 참일진대, 훗날 시작된 방황이 저렇듯 끝을 모르고 먼 곳으로 진행될 때, 우린 무작정 미래가 궁금해지고 만다. 종교 없이도 운명을 믿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고는 있지만, 결코 영원히 사랑한 수는 없다는 서글픈 확신.
p170
문이 존재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삶은 깜깜한 복도 정도가 아니야. 미로조차도 아니고. 하지만 어찌 어두운 실 없이 양탄자의 아름다운 무늬를 짤 수 있겠냔 말이지. 보다 포괄적이고 따뜻한 비유를 찾아 헤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네.
p172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바쁘고 정교한 노동인 줄 아나? 가구는 없고 전화만 딸랑 놓인 방에서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다가도,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운명을 바꿔놓을 만한 소식이 끊기곤 하는 게 세월이지.
....... 도시에서의 마흔과 이런 시골에서의 마흔은 다르지. 여기선 세월이 은은하고 선명한 탓에, 시간은 속도가 아니라 얕고 깊음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된다네.
이응준은 처음 만나는 작가다.
오래 전에 구입했는데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좋다.
야~ 좋다, 하면서 읽었다.
왜 그동안 밀어두었는지......
긴 제목이 어색해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거라고 읽으면서 실소를 깨물었다.
전체적으로 긴 제목이 많다.
제목을 정하는 작가의 취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짧은 제목이 강렬한 함축의 의미를 담는다면
긴 제목은 낭만적 상상력으로 호기심을 갖게 해준다.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이 특히 그러했다.
이 작가는 시를 쓰고 소설을 짓고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일까?
감각적인 문장이 많고 시적 은유를 가진 행간에 자꾸 발목이 잡혔다.
최근에 몰입하는 작가 중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에서.
긴 호흡의 문장에서도 강력하게 끌리는 시적 운율을 만난다.
책 耽(탐)이 그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 긋는 횟수가 점점 늘고 있다.
가을에 읽은 책을 이제야 쓴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바야흐로 12월이고 겨울이다.
어쩐지 길 것 같고 추울 것 같은 겨울
살아보자.
"겨울, 만물이 어둠 속의 흐느낌처럼 가냘 퍼지는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