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 베이커를 좋아한다. 투명한 밤이 떠오르는 그의 목소리를 사랑하고, 나른하고도 낭만적인 트럼펫 연주에 매료되곤 한다. 노트북과 아이패드 배경화면은 음반 녹음중인 쳇 베이커의 사진이며, 그의 곡을 컬러링으로 설정해둔 지도 꽤 되었다. 기댈 곳 없던 시기에 그의 음악은내게 안식을 주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는 위대한 트럼페터이자 보컬이지만, 마약을 사기 위해 연인의 물건을 전당포에 넘기고 전화선을 목에 감는 등의 폭행을 일삼던 추악한 인간이기도 하다. 달콤한 목소리 뒤에 감춰진 그의 - P185
악마성은 선득하고 경악스럽지만...... 마찬가지로 나는 우디 앨런을 좋아한다. 친구와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에서 어떤 장면이 가장 좋았는지 공유하고, <카이로의 붉은 장미>와 <맨해튼> 중 어떤 작품이 더 취향인지 열띠게 논하는 과정이 즐겁다. 여전히 <매치 포인트>를 보며 감탄하고, <블루 재스민>을 돌려 보며 나는 죽었다깨나도 저런 역작은 못 만들 거라 감복하지만…… 우디 앨런과 관련된 불쾌하고 끔찍한 스캔들은 구태여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다. 쳇 베이커의 음악이 듣고 싶거나, 우디 앨런의 신작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민에 잠긴다. 저 사람의 작품을 과연 듣고 보는게 옳을까. 그래도 될까. 그러나 결국 듣고 본다. 숨어서, 묘한 죄책감을 느끼며. 내가 좋아하는 건 그들의 작품이지 인격이나 삶이 아니라고 합리화하기도, 판단을 유보하기도 하지만 피해자의 항변과 명징한 사실로부터 나는 늘 자유롭지 못하고 그래서 더 복잡해진다. - P185
이 소설은 그러한 상충에서 기인했다. 죄의식과 사랑(혹은 기호)이라는 얇은 막 하나를 오가며 번민하는 나 또는 우리의 내면을 마주보고 싶어서. 하드보드지처럼 두껍고 견고한 사랑도 있을 테지만, 대개의 사랑은 습자지 같아서 단 한 방울의 반감과 의심으로도 쉽게 찢어지는 것 같다. - P186
그러나 어떤 사랑은 푹 젖어도 찢어지지 않고 도리어 곤죽처럼 질퍽해진다. 사랑이고 죄의식이고 찬미고 경멸이고 죄다 흡수해 종내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누군가를 ‘그런 사람‘이라 단언하기보다 ‘그럴 수도 있는 사람‘ 이라는 여지를 두고 깊고 길게 들여다보는 것이 이해고 사랑이라여기지만, 그러한 방식에도 늘 변수와 병폐가 존재하는 것 같다. 툭 튀어나온 부분을 다듬을 수 있는 영화와 달리, 현실은 소거와 편집이 불가하므로 이미 벌어진 사건을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무감히 넘기는 건 기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심결에 옹호와 이해를 동일시하거나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맹목적인 변호를 이어간다. 이것을 단순히 병적 애착 혹은 집착이라 부르는 게 옳은지. 그안에 담긴 진심마저 쉬이 배제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불신 없는 무조건적 사랑은 과연 가능한지 문득 의문이 든다. 가부를 나눌 수 없는 무수한 문제 속에서 우리는 자주 구겨지고 찢어지며 괴리를 겪는다. - P187
길티 플레저는 죄책감을 뜻하는 길티 guilty와 기쁨을 의미하는 플레저 pleasure의 합성어로, 어떤 행위로부터 즐거움을 느끼지만 그를 통해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기에 떳떳해질 수 없는 마음을 가리킨다. 예컨대 귀지 파기 영상이나 숨어서 듣는 나만의 명곡과 같이, 남들 앞에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지만 나에게는 은밀한 만족감을 선사하는 그 무언가를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것이다. 성해나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이 길티 플레저를 경유해 우리의 일상 곳곳에 잠재해 있으나 입 밖으로 내뱉기는 어려운 감정들을 포착하는 소설이다. ‘나‘는 우연히 영화 <인간 불신>을 본 것을 계기로 영화감독 김곤의 열렬한 팬이 된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며 일약 스타로 부상한 그는 커피 찌꺼기로 염색한 셔츠를 입고, - P188
특정 출판사 시집의 애독자이자, 즐겨 마시는 맥주가 있는, 자신만의 취향이 분명한 사람이다. ‘나‘는 수려한 외모와 예술성을 갖힘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올바르고 ‘힙‘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지지한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느낀다. 김곤은 고급스러운 문화적 취향을 가진 자이기에 ‘나‘의 욕망의 대상이 되며, ‘나‘에게 김곤의 팬이 되는 일은 스스로를 ‘예술이랑 먼 사람‘으로 규정지었던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식의 단절과 자기규정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개인의 취향이란 순수한 기호나 선호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계급적 구별 짓기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중무엇을 향유하는지에 따라 예술적 취향이 구분되며, 취향은 각각의 사람들이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문화적 계급 질서는 개인이 수치심이나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자유로이 자신의 취향과 선호를 드러내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길티 플레저‘는 흔히 유치하거나 예술적 가치가 낮다고 여겨지는 작품에서 모종의 즐거움을 느낄 때 발생하는 양가감정이다. 고상하지 못한 자신의 취향으로 인해 자신 역시 형편없는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주는 쾌락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 P189
내가 타인의 고통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의심도 들었다. 나는 김곤이 혐오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안쓰러웠다. 만일그 사건이 사실이더라도 쪽잠 자며 촬영하다보면 누구든 예민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실수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근데 그래도 되는 건가. 실수라 해도 일곱 살 난 아이에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친구들 말처럼 만약 그게 내 아이의 일이었대도나는 김곤의 영화를 몇 번씩 관람하고 굿즈를 소비할 수 있었을까. 늘 헷갈렸지만 그럼에도 김곤의 신작을 기다렸고 그의 기사에 선플을 달았다. (155쪽)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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