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대박
싱고의 <詩누이> 에서도 박소란시인을 첫, 으로 만난다.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yes.
심지어 병적으로 다정한 사람 ㅠ.ㅠ 이라고 적고나니 혼자서 뻘쭘~~~!
어이구야~! 삼월도 절반이 지나간다.

설탕
박소란
커피 두 스푼 설탕 세 스푼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오 어쩌면
테이블 아래 새하얀 설탕을 입에 문 개미들이 총총총 기쁨에 찬 얼굴로 지나갑니다 개미는 다정한 친구입니까 애인입니까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 달콤한 입술로 내가 가본 적 없는 먼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당신을 위해 오늘도 나는 단것을 주문하고 마치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웃고 재잔대고 도무지 맛을 알 수 없는 불안이 통째로 쏟아진 키피를 마시며
단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다정을 흉내 내는 말투로 한번쯤 묻고도 싶었는데
언제나처럼 입안 가득 설탕만을 털어넣습니다 그런 내게 손을 내미는 당신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오 제발 다정한 당신의 두 발, 무심코 어느 가녀린 생을 우지끈 스쳐가고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2015) - P22
환상의 빛 강성은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 2013) - P32
몽유산책 안희연
두 발은 서랍에 넣어두고 멀고 먼 담장 위를 걷고 있어
손을 뻗으면 구름이 만져지고 운이 좋으면 날아가던 새의 목을 쥐어볼 수도 있지
귀퉁이가 찢긴 아침 죽은 척하던 아이들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이따금씩 커다란 나무를 생각해
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불이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고 절벽 위에서 동전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나올 때
불현듯 돌아보면 흩어지는 것이 있다 거의 사라진 사람이 있다
땅속에 박힌 기차들 시간의 벽 너머로 달려가는
귀는 흘러내릴 때 얼마나 투명한 소리를 내는 것일까
나는 물고기들로 가득한 어항을 뒤집어쓴 채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 - P41
봄날 김기택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잔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잘만 하면 한순간 뽀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거리던 봄볕에 못 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해져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사무원(창비 1999) - P47
돌멩이 오은
뻥뻥 차고 다니던 것 이리 차고 저리 차던 것
날이 어둑해지면 운동장이 텅 비어 있었다
골목대장이던 내가 길목에서 이리 채고 저리 채고 있었다
돌멩이처럼 여기저기에 있었다
날이 깜깜해지면 돌담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좁은 길로 들어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돌멩이처럼 한곳에 가만히 있었다
돌멩이처럼 앉아 돌멩이에 대해 생각한다 - P54
돌멩이가 된다는 것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 온 마음을 다해 온몸이 된다는 것 잘 여문 알맹이가 된다는 것
불현듯 네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 마침내 네 가슴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 철석같은 믿음이 된다는 것
입을 다물고 통째로 말한다는 것
날이 밝으면 어제보다 단단해진 돌멩이가 있었다 내일은 더 단단해질 마음이 있었다
「의자를 신고 달리는」 (창비교육 2015) - P55
구름의 산책 이현승
아빠 구름은 어떻게 울어? 나는 구름처럼 우르릉, 우르릉 꽝! 얼굴을 붉히며,
오리는? 나는 오리처럼 꽥꽥, 냄새나고,
돼지는? 나는 돼지처럼 꿀꿀, 배가 고파.
젖소는? 나는 젖소처럼 음매, 가슴이 울렁거린다.
기러기는? 나는 기러기처럼 두 팔을 벌리고 기러기럭,
그럼 돌멩이는? 갑자기 돌멩이를 삼킨 듯 울컥해졌다. 소리 없이 울고 싶어졌다.
아빠, 구름은 우르르 꽝 울어요?
「생활이라는 생각」(창비 2015) - P62
슬픔 이시영
김포에서 갓 올라온 햇감자들이 방화시장 사거리 난전에서 ‘금이천원‘이라는 가격표가 삐뚜루 박힌 플라스틱 바가지에 담겨 아직 덜 여문 머리통을 들이받으며 지희끼리 찧고 까불며 좋아하다가 "저런 오사럴 놈들, 가만히 좀 있던 못혀!" 하는 할머니의 역정에 금세 풀이 죽어 집 나온 아이들처럼 흙빛 얼굴로 먼 데 하늘을 쳐다본다.
「호야네 말」(창비 2014) - P71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는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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