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모리슨Toni Morrison
1931년 미국 오하이오주 로레인에서 태어났다. 하워드대학교에서영문학을 전공하고 코넬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여러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쳤고 랜덤하우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며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70년 첫 소설가장 파란 눈으로데뷔했고, 1973년 출간한 두번째 소설 「술라」가 전미도서상 후보에오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후 1977년 솔로몬의 노래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1987년 출간된 「빌러비드」로 이듬해 퓰리처상, 로버트 F. 케네디 상 등을 수상했다. 「빌러비드」는 오프라 윈프리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92년에는 음악에서 적극적으로 모티프를 차용한 소설 「재즈』를 발표해 평단의 호평을 얻었다. 1993년 "독창적인 상상력과 시적 언어를 통해 미국 사회의 핵심적인문제를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평과 함께 흑인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 전미도서상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2006년프린스턴대학교 교수직에서 퇴임한 후에는 집필에 매진해 소설자비」 「고향」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등을 발표했다. 2012년 버락오바마 대통령에게서 자유 훈장을 받았고, 2019년 88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숨을 거두었다.
가장 파란 눈은 작가의 고향 로레인을 배경으로, 파란 눈을 가지면끔찍한 현실이 뒤바뀔 것이라고 믿은 흑인 소녀의 비극을 다룬 소설이다. 차별과 빈곤, 폭력이 대물림되는 흑인 사회의 슬픈 연대기가 어린아이들의 순수함과 대비되어 더욱 강렬하게 그려진다.
서문
일시적으로든 지속적으로든,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거나 거부했을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모르는 사람은 분명 없을 것이다. 고작 무관심이나 가벼운 짜증 정도의 기분일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상처가 될 것이다. 우리 중에는 실제로 미움을 받는 일이 어떤 건지 아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것도 본인은 어떻게 해볼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면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 때 그 미움이나 증오가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당신이 그런 대우를 받을 까닭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얼마간 위로가 된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가 정서적으로 힘이 되어주고지지해준다면 피해는 덜해지거나 사라진다. 인간으로 살아가다보면겪게 되는 (심각하든 심각하지 않든) 스트레스로 여기게 된다. 『가장 파란 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 관심은 그보다는 다른 것에 - P7
있었다. 남들의 멸시에 대한 저항이나 그것을 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배척을 정당하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 초래되는 훨씬 더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결과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지독한 자기비하의 피해자가 결국 위험하고 난폭한 성향이 되어, 자신을 거듭거듭 욕보이게될 적을 재생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다른 부류는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자신들에게 부족한 강한 자아상을 건네주는 구조 속으로녹아들어간다. 대부분은 그것을 극복하고 성장하지만 말없이, 이름도없이, 그것을 표현하거나 인정할 목소리도 없이 붕괴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자아를 일으켜세울 ‘두 다리‘를 가지기이전의 아이들에게 자존감의 종말은 금방,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무관심한 부모와 무시하는 어른, 자체의 언어와 법과 이미지로 절망을 강화하는 세상에 어린 나이라는 취약성이 더해지면 파멸로 이르는 길은 확정적이다. - P8
그래서 내 첫 책인 이 소설은 어린 나이나 성별이나 인종으로 인해해로운 외부 영향력에 가장 저항하기 힘들 법한 인물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기획이었다. 심리적 살인이라는 암울한 서사로 시작하고 나니, 주인공의 수동성에서 서사의 공백이 초래되어 주인공 혼자로는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인공의 곤경을 이해하고 공감까지 보낼 수있는, 하지만 든든한 부모와 왕성한 혈기라는 이점을 지닌 친구들과급우들을 만들어냈다. 그들도 무력하긴 마찬가지라 친구를 세상에서구해내지는 못했고, 주인공은 망가져버렸다. 이 소설의 첫 구상은 어릴 적 친구와 나눴던 대화에서 나왔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무렵이었다. 친구는 자기 눈이 파란색이면 좋겠다고 - P8
했다. 나는 파란 눈을 가진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고, 그러자 반감이 일었다. 슬픔이 담긴 친구의 목소리가 동정을 바라는 투라서 동정을 꾸며 보이긴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구가 그런 훼손을 원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서 그애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때까지 난 예쁜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 멋진 사람, 추한 사람을 보며 살아왔다. 그리고 ‘아름답다‘라는 단어를 당연히 사용하기도 했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인지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 충격의 강도는 아무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 그것을 소유한 사람조차, 아니 본인이라 특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맞먹었다. 내가 그때 살펴보았던 그 얼굴만의 문제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 이른 오후 거리에 깃든 적막, 빛, 그 고백을 듣던 순간의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때가 내가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알게된 순간이었다. 나 혼자 상상해왔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은 그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본인이 실행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 P9
「가장 파란 눈」은 그런 문제를 두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자 했던 시도다. 그애는 어째서 자신이 소유한 것을 체험하지 못했는지, 혹은 영원히 체험하지 못할 것인지에 대해서. 또한 그애는 어째서 그렇게 근본적인 변화를 원했는지에 대해서. 그애의 욕망에는 인종적 자기혐오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후 스무 해가 지났지만 그런 것이 어떻게 습득•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누가 그런 말을 했을까? 자기 본연의 모습보다 괴물이 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누가 그애에게 심어주었을까?
그애를 보며 모자란다고 아름다움의 저울에 올려보니 너무 빈약하다고 여긴 이는 누구였을까? 이 소설은 그애를 단죄하는 시선을 쪼아 없앤다. 1960년대에 인종적 아름다움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켜, 나는 그런 주장의 필요성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남들에게매도당할지언정, 공동체 내에서는 이 아름다움이 왜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못했을까?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어째서 광범위한 대중적 발화가 요구되었을까? 그 대답은 금방 자명해졌고 지금도 그러하니, 총명한 질문들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을 시작한 1962년과 이것이한 권의 책을 이루게 된 1965년에는 그렇게 자명하지 않았다. 인종적 아름다움의 주장은 모든 집단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문화적·인종적 약점에 대한 자조적이고 익살스러운 비판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부 시선에서 유래하는 절대불변의 열등함이라는 가정을 내면화하는 해로운 과정에 대한 반대였다. 따라서 나는 한 인종을 통째로 악마화하는 기괴한 현상이, 아이라는 사회의 가장 연약한 구성원이자 여자라는 가장 취약한 구성원인 인물 속에 어떻게 뿌리박게 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무심한 인종적 멸시로도 초래될 수 있는 인간성의황폐화를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난 전형적이 아니라 독특한 상황을 선택했다. 페콜라의 사례가 지닌 극단성은 평균적인 흑인 가족이나 화자의 가족과 달리 구성원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력한 가족에서 기인한다. 페콜라의 삶이 비록 남다르지만 그 취약성의 몇몇 면모는 모든 여자아이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아이를 말 그대로 산산이 부숴버린 사회와 가정의 폭력성을 탐구하면서 난 일상적이거나 예
외적이거나, 무시무시한 배척의 여러 장치를 마련했는데, 그러는 내내페콜라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악마화 과정에 공모하는 일이 생기지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다시 말해 페콜라를 맹비난하고 그애의 파멸에 기여한 인물들을 비인간적인 인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문제는 소설적 탐구에서 그렇게 연약하고 취약한 인물에게큰 비중을 두면 그런 인물은 아무래도 산산이 부서지기 쉽고, 그러면독자는 그런 상황을 따져 묻기보다 그 인물을 적당히 동정하고 말 수있다는 것이었다. 서사를 여러 부분으로 나눠 독자가 재배열하도록 했던 내 해결책은 당시엔 좋은 방안으로 보였는데, 지금 보니 만족스럽게 실행된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효과도 없었다. 마음이 움직이기보다 동정심만 보인 독자들이 많았으니까.
또다른 문제는 당연히 언어였다. 멸시하는 시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전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 소설은 인종적 자기멸시라는 쓰린 신경을 타격하고 드러낸 뒤, 그것을 마취제가 아니라 내가 처음으로 아름다움을 경험했을 때 발견한 작용을 모사하는 언어로 진정시키고자했다. 그 순간은 워낙 인종에 침윤되어 있었기에 내 친구가 원했던, 아주 검은 얼굴의 아주 파란 눈에 내가 느꼈던 반감, 그애가 아름다움에대한 내 관념에 해를 가했던 일), 난 명백하게 검은 글쓰기를 하려고고군분투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들에도불구하고 난 여전히 그것을 추구할 것이다. 내 언어 선택(말하는 투의 구어적 대화체), 충분한 이해를 돕기 위해 흑인문화에 뿌리박힌 관례에 의존한 일, 직접적인 공모와 친밀함의
효과를 (거리를 두어 설명하는 구조 없이) 추구했던 일, 그리고 침묵을깨뜨리면서 동시에 형성하려는 시도는 미국 흑인문화의 복잡성과 풍부함을 문화라는 이름에 값하는 언어로 변형하려는 시도다. 표현적 언어가 내게 제기했던 문제를 지금 다시 돌아보니, 그것이여전히 유효하고 끈질기게 지속된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교양 있는‘ 언어가 인간의 존엄을 떨어뜨린다는 말이 들리고, 문화적 푸닥거리가문학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상황이 눈에 띄고, 효력을 없애는 은유의호박 속에 자신이 보존 처리되는 상황을 목격하는 지금, 나의 서사기획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 집이 있다. 녹색과 흰색이다. 문은 빨간색이다. 무척 예쁘다. 여기 가족이 있다. 어머니, 아버지, 딕. 제인은 녹색과 흰색의 집에 산다. 아주 행복하다. 제인을 보라.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다. 놀고 싶다고 한다. 누가 제인과 놀아주지? 고양이를 보라. 야옹야옹 운다. 이리와서 놀아. 이리 와서 제인이랑 놀아. 고양이는 놀아주지 않는다. 어머니를 보라. 무척 상냥하다. 어머니, 제인과 놀아줄래요? 어머니가 웃는다. 웃어요, 어머니, 웃어요. 아버지를 보라. 아버지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세다. 아버지, 제인과 놀아줄래요? 아버지가 싱긋 웃는다. 싱긋 웃어요, 아버지, 싱긋 웃어요. 강아지를 보라. 멍멍 짖는다. 제인이랑 놀아줄래? 강아지가 뛰는 걸 봐. 뛰어, 멍멍아, 뛰어. 봐, 봐, 여기 친구가오네. 친구는 제인과 놀아주겠지. 재밌는 놀이를 하겠지. 놀아, 제인, 놀아봐.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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