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일단 저 고통이 타인의 것이라는 판단을 전제로 할 겁니다. 거기에서 벌써 공감의 한계가 생기는 것이지요. 저는 타인의 고통은 표현할 줄 모릅니다. 특히 육체적 고통은 알 길이 없습니다. 타인의 마음의 고통이나 실패는 얼마만큼 공감할 줄 알지요. 하지만 육체의 고통에 저의 육체로 동참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저는제 육체적 고통밖에 표현할 줄 모릅니다. 그것도 잘하지는못하지요. 고통을 표현할 언어는 언제나 부족하니까요. 저는 제 고통이 극에 달한 밤, 제 몸에 돋는 거대한 날개를 목도합니다. 그리고 고통받는 여자의 어깨에 투명한날개가 돋았다고 씁니다. 더 나아가 여자의 고통이 여자를 하늘에 올렸다고 씁니다. 그것뿐입니다. 오직 즉각적인 상상력에 의해서만 우리의 고통을 쓸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타인이 되어보는 상상을 할 때조차도 ‘나‘를 버리지 못합니다. ‘나‘는 타인의 관망자, 유령일 뿐이라고 자책합니다. - P85
전문가가 만든 음식이 보잘것없는 제 부엌의 음식보다 맛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식당에 가서 항상 제가 하는 ‘맛‘ 평가를 기다립니다. 자신들의 판단은 일단 보류해놓고요. 요리 동사를 생각해보십시오. 재료에 열을 더하고 빼고, 칼을 더하고 빼고, 물을 더하고 빼고, 요리하는 이의 손길을 더하고 빼고, 증기를 더하고 뺨에 따라 수많은 동사가 작열합니다. 굽고, 삶고, 지지고, 볶고, 졸이고, 따로 사전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많지요. 자작하게 하고, 팔팔 끓이다 뜸 들이고, 깍둑썰고, 어슷썰고, 질게 하고, 지집니다. 우리나라의 요리 동사들은 모두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동사들과 똑같지요. 마음을 졸이고, 태우고, 볶지않습니까? 미각을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선지, 수, 화, 풍이 모두 작용하는 전 지구의 질료적인 조화가 필요합니다. 내 바깥의 생물을 조리하는 것과 마음을 조리하는 것은 아주비슷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누구의 마음을 조리하듯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하기 싫은데 나아닌 누구를 먹여야 하니까 게으른 검객처럼 칼을 들고, 불을 올리고 하지요. 저 혼자 살고 있다면 그렇게 열심히 반복적으로 조리를 하진 않았겠지요. - P89
저는 ‘모성‘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아요. 모성이 이데올로기가 되다니요? 심지어 모성은 본능적인 것이고, 신화적인 것이고,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라고, 어머니는 신 다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신 다음이 산후우울증에 걸린단 말입니까? 사실 서구에서 모성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것은 18세기부터라고 합니다. 여자를 가정에 두고, 아이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맡기는 역할을 시킴으로써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좋았기 때문이죠. 여자 말고, 어머니를 신화적인 인물인 양 높여주는 척하면서 집 안에 가두는 것이지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자의적으로 사용한, 공고한 사회적 - P107
차별이 가부장제를 당연한 것으로 보장해준 것이지요. 텔레비전을 볼 때 늘 놀라는 장면이 있는데 출연자들이자신의 어머니 얘기를 꺼내면서 불에 덴 듯 운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 있는 어머니를 가졌건, 돌아가신 어머니를 가졌건 말입니다. 아마 저도 그 상황에 처하면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현상이 모성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엄마와 자식 양쪽 다 죄의식 때문에 그렇게 울게 되지요. 부모는 완벽한 모성을 발휘하지 못한 죄의식, 자식은 모성성을 유감없이, 목숨을 바치도록 발휘해서 희생한 자신의 엄마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말입니다. 모성은 사회적 구성물입니다. - P108
이 구성물때문에 여자들은 여자처럼 살아야 하고, 자라서는 어머니노릇을 해야 하고, 주부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안녕과 쾌락을 구할 땐 죄의식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 사회의 모성이데올로기가 여자들에게 영원히 다른 방식으로 어머나되기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니까요. 이때 어머니 스스로가 우울하건 불안하건 자신을 미완성으로 느끼건 소용없지요. 저는 이 모성이라는 말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은 여자겠지만, 안아주고 길러주고 돌봐주는 것을 ‘어머니성‘이라고 부르지말아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누구나 돌보고 보살필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남자건 여자 - P108
건 말입니다. 우리나라 남성 시인들이 쓴 ‘어머니‘에 대한 시들을 일별해본 적이 있습니다. ‘밥해주는, 온 정성을 다한, 희생한, 이제 늙어버린, 그러다가 죽어버린‘ 어머니들이지요. 혹은전능의 판타지를 장착한 어머니들이지요. 그들은 환상 속에서만 어머니를 위치시킬 수 있을 뿐, 실재의 어머니는보지 않으려 하지요. 그 남성 시인들은 여성성을 잃어버리거나 숨긴, ‘새벽 별을 이고 30년을 하루같이 자식들게 둥근 밥상을 대령한 어머니의 피폐한 노동을 왜 그토록 찬양하는 것일까요? 시마저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듬뿍품고, 모성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게 만드는지요? - P109
그러나 여성 시인들이 ‘어머니‘를 쓴 시들은 다르지요. 여성 시인들은 어머니의 자궁을 기쁨의 잠재성으로 노래하기도 하고, 반면에 피폐한 죽음의 공간, 훼손하여 버려야하는 기관으로 노래하기도 하지요. 자궁을 자연과 연결된 공간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그 크기를 오대양 육대주로 넓히기도 하지요. 그래서 어머니를 욕망을 가진, 슬프고 참담한, 절대로 모방하거나 답습할 수 없는, 낯설고 무기력한 존재로 보지요. 그리고 절대로 어머니를 닮지 않겠다는 각오도 하지요. 혹은 이분법적 성의 구별과 차별에 넌더리가 나서 양성적 존재의 구현을 어머니의 모습에서 찾으려 하고요. 저는 모성 또한 우리의 성정체성처럼 개인마다 다른 수천만 가지의 모습이므로, 이데올로기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P109
이미지의 연쇄와 끝없는 시간, 공간적인 인접성의 환기, 그로 인한 현실의 변형과 굴절, 그것들을 굴러가게 하는리듬이 ‘나‘의 결핍 그 자체를 소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원 대립 속에서 하나의 개념을 채택하는 은유의 동일자 의식을 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은유는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욕망을 바탕으로 갖고 있기에 그런것을 갖춘 ‘그‘의 시선을 받는 자리에선 사물/여자는 몸서리를 치게 되지요. 간혹 시를 읽다가 그런 시인의 은유를 만나면 저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자의, 대상에게서 생명을 빼앗고 ‘의미‘를 준 생산자의 얼굴을 마주한 듯한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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