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그리도 우스웠던지. 저는 그녀를 먼저 보내고 카페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남편을 만나려면 아직 십 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남편을 카페로 불러낼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어둠으로 푸르게 물들어가는 바깥에서 만나는 게좋을 듯했습니다. 바깥 공기가 상큼할 것 같았습니다. 그날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별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R저는 손목시계와 저녁하늘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시월의 저녁 여섯 시 오십 분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의 옷섶에도 활기참이 넘쳤습니다. 가로수며, 시청의 전자시계,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네온들이 아주 깨끗한 바람에 씻기운 듯했습니다. - P83

대한문 앞에는 이상한 어둠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이상한‘이라는 말에 저는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일 재주가 없군요. 저는 언젠가도 그곳에서 남편을 기다려본 적이 있습니다. 여름이라면 여덟 시 이후, 겨울이라면 여섯 시 이후의 어둠이 그렇습니다.
대한문 우측에는 55번이라든가 603번 좌석버스를 타는 곳입니다. 대한문 좌측으로 가면 지하철 입구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작은 파출소가 나오지요.
좌석버스 정류장이거나, 우측 지하철 입구께나, 파출소 앞은 그다지 이상할 게 없는 어둠들입니다.
그런데 대한문 앞에, 제가 말한 시간에 한번 가서보세요. 오싹한 기분이 들 겁니다.
그 시간대에 그곳에 있어봤지만 그런 기분을 못느끼겠더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위아래 흰옷을 입고 다시 한 번그 시간에 거기에 가서 보십시오. 그리고 푸른색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옷을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 P85

이런 식으로밖에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고 있는 모호함의 정체를 알기 위해 저는 굳이 슈퍼컴퓨터를 동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동원한다고 해도 아마 알 수 없을 겁니다. 요컨대 우리부부는 문제 제로의 상태라는 겁니다. 문제 제로.
뭔가를 배우는 게 좋겠다는 건 제가 사양을 했고 가끔 밖에 나가는 건 제가 동의를 했으므로, 그날도 저는 밖으로 나와서 가고 싶은 델 갔던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가끔씩은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합니다만, 저는 혼자인 것이 더 좋습니다. 수다를 떠는 건 제 쪽이 아니고 항상 상대편이었으니까요.
이것도 천성인지, 전 수다 같은 걸 떨 줄 모릅니다. 상대편의 이야기가 꼭 제 구미에 맞으라는 법도없지 않겠습니까. 응, 응 하고 최소한의 반응을 보이는 일조차 죽도록 힘겨울 때도 종종 있게 마련이거든요. - P98

고추냉이는 아주 비정한 맛을 가지고 있다. 맛이 풍요롭지 못해 생선회가 아니고는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겨자는 풍요롭다. 아주 좋은 겨자는 기름도 동동 뜨고, 쫀득쫀득한 게, 구수하기조차 하다.
겨자라면 나는 거의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 그래서 막걸리에다 밥을 말아먹는다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식탁에 오른 거의 모든 음식을 이 겨자에 찍어 먹는다. 인절미도 겨자에 찍어 먹는다. 마늘도, 식빵도.
초장에서 고추냉이를 거쳐 겨자에 이르는 이 지극히 간단한 노정에다, 나는 거의 십오 년 세월을바친 셈이다. 이 정도면 기구하다고도 할 수 있지않을까.
나는 스카치 투명 테이프와 스테인레스 가위와,이 겨자를 좋아한다. - P117

이해되지 않아도 되고, 변명하지 않아도 되고, 타당성 따위를 찾느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혼돈 자체가 질서가 되는 세상. 합리적이라 일컬어지는것들이 오히려 참을 수 없이 거추장스러운 세상. 제가 이전에 살던 질서와 가치와 의무와 도리의세상은, 저 숱한 빌딩숲을 건너고, 소음의 하늘을지나고, 시간의 강을 건너, 소리쳐도 들리지 않을만큼 먼 곳에 조용히 버려져 있다는 기분입니다.
제 삼십사 년의 생애가 잔해되어 널브러져 있다는 기분입니다. 해가 지는 저 서녘의 멀고 먼 벌판위에 말입니다. 저는 제가 다다른, 설레는 이 혼돈의 세계에서 새로운 느낌과, 새로운 활기와, 새로운감정의 피를 수혈받고 있다는 기분입니다. - P143

그녀는 일원이 되지 못한다. 이 사회의 일원이되지 못한다.
일원이 된다 해도 한시적이다. 나나 그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다. 그녀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그런 식으로 이십팔 년 혹은 이십구 년을살아온 것이다.
일원이 되지 못하는 삶. 어쩌면 그녀에겐 이미그게 더 자연스런 삶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함께직장에서 일한 것도 일년 반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거처도 늘 일정치않다. 사당동에 사는가 하면, 어느 틈에 원효로다.
면그녀의 유일한 일원이라면 나 정도뿐이다. 적어도 우리는 7년 이상 만남을 유지해 오고 있으니까.
그녀와 한 번 잔 뒤로 또다시 그런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를 15일에 한 번쯤은 볼 수 있다. 왜 다시 자지 않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안다. 그녀의 몸 둘레에 씌워져 있는 투명막이라 - P178

는게 단추만 풀면 언제라도 벗어던질 수 있는 외위와는 정말 다르다는 것.
이제 또 그녀는 거처를 옮기려는 것이다. 정처없는 삶이란 어쩔 수 없는 거라지만, 그녀가 살림살이꾸려들고 서울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걸 보전 왠지 유민(民) 같아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결혼을 해서든, 아니면 무슨 든든한 직장을 구해서든 왜 정주하지 못하느냐고 그녀에게 물을 수도있겠지. 그러나 그런 물음은 어쩐지 그녀에게 더 깊은 상처만 줄 것 같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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