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누스 푸디카 창비시선 410
박연준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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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연준 시인의 시집 [베누스 푸디카]는 첫 번째로 실린 시이기도 하다. "Venus Pudica 비너스 상이 취하고 있는 정숙한 자세를 뜻하는 미술 용어. 한 손으로는 가슴을, 다른 손으로는 음부를 가리는 자세를 뜻함."이라는 설명이 각주로 붙어있다. '정숙한 자세', '정숙' 여학생 교실에만 붙어있던 액자 속의 글씨처럼 또렷하게 각인되는 '정숙'. 그래서 1부의 제목을 '정숙한 자세'라고 했구나. 저 행간 사이가 아득하다.

 

 

 

  베누스 푸디카

 

  

  옛날, 옛날, 옛날

  (뭐든지 세번을 부르면, 내 앞에 와 있는 느낌)

 

  어둠을 반으로 가르면

  그게 내 일곱살 때 음부 모양

  정확하고 아름다운 반달이 양쪽에 기대어 있고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지

  아름다운 틈이었으니까

 

  연필을 물고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다

  등허리를 쩍, 소리 나게 맞았고

  목구멍에 연필이 박혀 죽을 뻔했지 여러번

  살아남은 연필 끝에서 죽은 지렁이들이 튀어나와

  연기처럼 흐르다 박혔고

  그렇게 글자를 배웠지

 

  꿈, 사랑, 희망은 내가 외운 표음문자

  습기, 죄의식, 겨우 되찾은 목소리, 가느다란 시는

  내가 체득한 시간의 성격

  나는 종종 큰 보자기에 싸여 버려졌고

  쉽게 들통났고,

  맹랑했지

  (끝내 버려지는 데 실패했으니까)

 

  어느 여름 옥상에서 어떤 감정을 알게 됐는데

  떠난 사람의 길고, 축축한, 잠옷이

  펄럭이는 걸 보았지

 

  사랑이 길어져 극단까지 밀고 가다

  견디지 못하면

  지구 밖으로 밀려나는구나

  피가 솟구치다 한꺼번에

  증발하는구나

 

  후에 책상 위에서 하는 몽정이 시,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엔 그의 얼굴을 감싼 채 그늘로 밀려나는 게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일곱살 옥상에서 본 펄럭이는 잠옷만큼은

  무엇도 더 슬프진 않았고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모든 면에서 가난해졌다

 

 

 

 

  녹

 

 

  이파리로 가득한 숲속에서

  나무는 얼굴이 어디일까 생각한다

 

  바람의 힘으로 사랑에서 떨어질 수 있다면

 

  이파리들은

  나무가 쥐고 있는 작은 칼

  한 시절 사랑하다 지는 연인

 

  누군가 보자기가 되어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일

  떨어지기 위해 물방울이 시작하는 일

 

  두세해 전 얼었던 마음이

  비로소 녹고

 

  어디선가 '남쪽'이라는 꽃이 필 것도 같은

 

 

  

  고요한 싸움

 

  

  버드나무 아래서 기다래지는 생각

  버드나무는 기다리는 사람이

  타는 그네

 

  참새 무덤을 만든 사내가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새가 되려다 실패한 고양이의 눈 속엔

  비밀이 싹튼다

 

  허방과 실패로로부터 도망가는

  지네의 붉은 등

 

  소문이 무성해지는 힘으로 봄은 푸르고

  변심을 위해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버드나무를 무겁게 누르는 오후

 

  여름은 승리가 아니다

 

  흔들리는 것은 죽은 참새와 그네 위

  기다래지는,

  생각

 

  버티어야 할 것은

  버틸 수 없는 것들의 등에 기대어

  살기도 한다

 

 

   '녹'을 옮겨 적다가 '녹綠(푸를 녹)'인 줄 알았더니 '녹錄(기록할 녹)' 이었구나,라고 적어 두었다. 시인이 쓴 '녹'이 '綠'이든 '錄'이든 '鹿'이면 어쩔 것이냐. 읽는 내 마음에 달려있는데 싶다. 그리고 이어서 '고요한 싸움', 필사 후 오래 내 안에서 '고요한 싸움'중이다. 시를 읽는 방법으로 누구나 그러하듯 대부분은 눈으로 읽고, 좋은 시는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어본다. (한번 해보시라, 좋다. 내 목소리로 퍼져서 귀로 되돌아오는 시는 맛이 다르다) 그리고도 여운이 남으면 필사를 한다. 필사는 블로그에 남기기도 하고 sns에 옮겨서 가끔 지인들한테 써먹기도 하지만 가장 즐겨 하는 방법은 노트에 적는 것이다. 그냥 시를 적기도 하지만 몇 줄 단상을 남기기도 한다. 읽을 때, 옮길 때 상황에 따라 늘 달라지는 단상들은 시가 가진 매력 때문이다. 어느 시인의 시들은 매번 다른 노트마다 적혀있기도 하다.

   "버티어야 할 것은/ 버틸 수 없는 것들의 등에 기대어/살기도 한다"라는 마지막 행을 옮기는데 울컥했다. 2020년, 올해를 표현한다면 저 문장 속에 담길 것이다. 무릎이 풀썩 꺾인다. 살아온 어느 해인들 안 그랬을까마는 '버티'느라 힘들었던 모양이다. 시인한테 들켰네.

  전체적으로 '베누스 푸디카'는 슬프다. 아니 슬프다,는 약하다. 오래 통곡을 참느라 심장이 쪼그라드는 통증이 온 옴을 관통한다. 분명 몇 해전 읽었던 시집인데 다시 처음인 슬픔에 창상을 입었다. 이래서 시집을 사들이고 쌓아두는 것일까?

 

 

 

  가라앉은 방

 

  단 하나의 눈동자 단 하나의 입술 단 하나의 얼굴이

  죽어 있는 방

 

  누군가 값진 것들만 훔쳐 달아나고,

  남겨진 방

  텅 비어 가득 찬 방

  부러진 오후처럼 다리 한짝이

  기대서 있는 방

  둥근, 귀, 두조각이

  떨어져 있는 방

  떨어지다 들킨 방

  한없이 더 떨어져야 하는 방

 

  기다릴 수 없는 방 심장이 간지러운 방 손톱이 엉켜 있는 방 머리카락이 끊어진 방 아무것도 견딜 수 없는 방 아무것도 가릴 수 없는 방

  얼굴을 잃은 빗방울들이 모여 문둥이처럼 흐려지는 방

  가닿지 못한 이름들이

  기름처럼 떠 있는 방

  가라앉은

 

  4월, 마이너스 십칠, 1997, 유령, 직각, 2014, 거대한 물살, 스무번도 못 셌어요, 19, 죽어라, 죽는다, 이런 씨발 것들, 죽을까, 죽었잖아, 죽인 걸까, 안 들리나봐, 나는 아냐, 바로 들어, 들고 있어, 조용히 해, 됐다, 아니야, 가만히, 나는 몰라, 가만히 있어, 지나간다, 견뎌, 가만히, 들고 있어, 죽음, 죽음, 죽음을

 

  부러진 시간들이 초로 꽂힌 방

 

  똑똑히 보세요

  우리가 풍경으로 박히는 것을

  찰칵,

 

  문 열 수 없는 방

  나올 수 없는 방

  나는 결코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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