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의 역사와 문화
2010년 4월 5일 - 사계절출판사
지은이 나가사와 카즈토시
전통적인 동양사학의 기초 위에 고고학 및 종교, 특히 불교사와 불교미술사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뛰어난 전망을 지닌 일본을 대표하는 중앙아시아사 전공 동양사학자이다.
옮긴이 민병훈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으로 재직중이다. 『초원과 오아시스 문화 중앙아시아』(2005)를 비롯하여, 실크로드 관련 유물에 대한 논고 50여 편이 있다.
동투르키스탄의 동쪽 끝임과 동시에 하서지방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돈황...
중국의 비단을 동경한 초록 눈의 호상(胡商)들이 동투르크스탄의 검은 모래바람과 고비사막의 악귀 같은 열풍, 미친 듯 불어대는 모래 바다를 힘겹게 넘어서면 저 멀리 눈에 들어오는 희미한 초록빛 도시가 바로 ‘돈황’이다.
(아래는 돈황 막고굴의 모습)
오랜 옛날부터 돈황은 하서지방의 주요 교통로였다. 한무제대에 이르러 하서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흉노가 쫓겨난 후 돈황에 하서사군 중 돈황군이 성립되면서 대완원정의 근거지로 이용된다. 한(漢)이라는 중국 왕조의 서쪽 끝이기에 타 민족과의 전쟁에 대비한 군사도시로 역할 한 것이다. 그러나 서역으로의 관문이라는 역할은 꾸준히 담당해 왔다. 특히 불교의 유입이라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불교는 후한말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시기 돈황은 서역승려와 경전의 왕래, 불교 그 자체의 수용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후 황건의 난이 일어나고 진이 건국되었다가 5호16국이라 불리는 혼란기를 거치면서도 돈황의 서역경영은 계속되었다. 진 왕조는 돈황을 중심으로 타림분지의 국가들을 영향력 하에 두고 관명을 부여했고 진 왕조 붕괴 후 전량 서역무역의 중요한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런 혼란기를 틈타 돈황에서 소왕국이 형성되기도 했다. 돈황은 서역무역의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자 멀리 천축으로 불법을 찾아 떠나는 승려, 반대로 저 멀리에서 포교를 하기 위해 찾아온 서역승들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이 때에 돈황에서 막고굴로 대표되는 굴원이라는 사원양식이 전해진 것도 이러한 영향 아래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수당시대에 이르면 돈황문화는 절정에 도달한다.
중국의 혼란기를 통일로 이끌어낸 수나라는 서역 진출에도 힘을 기울이고 불교 부흥정책 또한 활발히 추진한다. 수나라는 오직 38년간 존속했지만 막고굴 중 수대의 굴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돈황이 국제적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수양제를 충분히 충족시켜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대 돈황의 중심에는 불교가 있다. 당나라 초기에는 서역과의 교류를 잠시 중단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에 현장이 서역으로 구법여행을 떠나려 하자 여러 사람이 감복하여 도왔다고 한다. 법을 어겨서라도 불교에 대한 진리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당의 서역 경영은 급속도로 발전한다. 서돌궐의 내분으로 인해 혼란한 시기에 이를 평정하고 타림분지를 정복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돈황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역참 도시로서 활약한다. 돈황의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안사의 난으로 당 왕조가 흔들릴 무렵 하서지역에 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토번왕국이 성립되어 당의 서역경영에 차질이 생겼다. 곧 돈황은 토번왕국에게 넘어가 70여년 가량 지배당한다. 이후로 9세기 중엽부터 11세기 초 까지는 장의조, 장승봉같은 장씨일족이 독립국을 세우기도 했고 그 뒤를 이어 조씨일족이 이곳을 다스리기도 했다. 이 때에도 돈황은 중계무역을 담당하는 도시이고 총 인구 2만에 승려가 무려 천명이 넘는 거대한 불교도시였다.
장의조 출행도, 만당, 막고굴 제 156굴
돈황이 쇠했을 때에는 천불동의 조영도 쇠하고, 활황을 나타냈던 때에는 크고 화려한 굴이 조영되고 있다. 즉 천불동은 돈황 역사의 반영이며, 사회의 축도 그 자체라고 여겨졌다.
(돈황의 역사와 문화, pp229)
투르판의 침입이 있기 전까지는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도 그 돈황이라는 특수한 지역성으로 말미암아 유지되었지만 투르판의 침입이 계속 되면서 돈황은 동서 교통이 점차 차단되어 침체기로 접어든다.
돈황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도사 왕원록에 의해 어마어마한 양의 고문서가 발견된 이후이다. 영국의 스타인이나 프랑스의 펠리오가 돈황에서 발견된 고문서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미리 연구에 착수하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도 알려져 있던 고문서는 시기가 내려가더라도 송대의 것 이었기 때문에 돈황 고문서의 발견은 동양학계의 큰 성과였다. 천불동을 비롯한 이러한 고문서의 발견을 통해 돈황과 돈황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의 단편은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