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고전 : 한국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김욱동 지음 / 비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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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연에게 빚을 갚아야할 때

[서평] 생태주의적 인문학 <녹색 고전>



근대 이전까지 인간은 자연에게 많은 빚을 지며 살았다. 인간은 항상 자연에게 일용할 양식을 얻었다. 견디기 힘든 추위도 자연에 있는 나무를 베어와 불을 때며 살아남았다. 이때 인간은 자연에 속한 존재였기 때문에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자연의 나무나 물, 불에 정령이 있다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상황은 급격하게 돌변했다. 인간이 산업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기계와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됐다. 자연에게 종속됐던 신세를 벗어나 자연을 이용하고 개발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자연을 마구잡이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철로를 깔고 건물을 올리고 공장을 지었다. 자연을 개발하는 만큼 인간의 과학기술은 나날이 발전했고, 그 발전 속도만큼 자연도 더 빠르게 파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연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었고, 이제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자연보호를 위한 여러 시민단체가 등장했고, 자연보호와 관련된 여러 책들도 출간되기 시작했다. 여러 국가들도 이런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는지 녹색 성장, 지속가능한 성장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생태주의라는 학문도 등장했다. 이처럼 자연보호는 시대의 화두가 됐다. 이번에 소개할 <녹색 고전>이라는 책도 생태주의, 자연보호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생태주의적으로 고전을 해석하다


<녹색 고전>은 조금 특이한 책이다. 중·고등학교에서 국어시간에 공부했던 ‘청산별곡’이나 ‘바리공주’ 등의 한국 고전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녹색 고전>은 이런 한국 고전들을 생태주의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특이하다. 이 책을 읽는다면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배웠던 한국 고전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었구나하고 놀랄지도 모른다.



십 년을 살면서 초가삼간 지어냈으니

나 한 칸, 달 한 칸, 맑은 바람 한 칸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곳이 없으니 이대로 둘러두고 보리라



이 시조는 조선시대 중기에 활약한 문신인 면앙정 송순이 지은 평시조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대로 해석한다면 이 시조는 말년에 낙향한 선비가 자연과 벗하며 노래한 시조라느니, 유학자가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격해 하는 유교적인 충의사상을 내면에 깔고 있다느니 하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녹색 고전>에서는 다르다. <녹색 고전>은 이 시조를 생태주의적으로 해석한다. 2절의 ‘나 한 칸, 달 한 칸, 맑은 바람 한 칸을 맡겨두고’를 분석하면서, 2절이 “시적 화자 ‘나’가 자신이 방 한 칸을 쓰고 나머지 두 칸은 달과 바람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곧 달과 바람을 한식구로 삼는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적 화자인 ‘나’는 한 가족의 가장이고 달과 바람은 그 가족의 소중한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생태주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시적 화자인 ‘나’가 한 가족의 가장이고 달과 바람이 그 가족의 소중한 구성원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인간은 자연과 상당히 멀어졌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녹색 고전>은 현대인은 쉽게 발견해내지 못하는, 하지만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선인들에게는 당연한 생태주의적 관점을 되살려내고 있다. 


인간중심주의에서 파생된 자연 파괴


실옹은 인간중심주의라는 눈곱을 떼고 좀 더 맑은 눈으로 다른 생물을 바라볼 것을 권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생태계라는 거대한 가족에 속한 소중한 구성원일 뿐 그 가장(家長)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생태계는 그만큼 건강한 모습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188쪽)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 인간중심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만물 중에서 으뜸이라는 인식은 생태주의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생태주의는 만물이 평등하다는 인식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만물에게 우열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연은 현재 이용 가능한 것일 뿐이다. 경제적인 논리가 만연한 지금, 공장에서는 정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오폐수를 몰래 버리는 등의 행동은 쉽게 일어난다.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환경보호는 뒷전이다. 인간에게 이롭기만 한다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쉽게 결정되는 일이다.


이는 지난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만성적인 경기불안으로 위기에 처한 토건업자들을 구하기 위해 벌인 이 사업은 국민들의 세금 22조를 토건업자들의 배 속으로 집어넣어준 것뿐만 아니라 애먼 4대강까지 파괴하고 끝이 났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은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서 얼마나 쉽게 자연이 파괴당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다.  





오염된 언어를 순화하는 언어 생태학


인간의 입장에서 생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태도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언어학 분야를 ‘언어 생태학’이라고 합니다. 자연이 훼손되고 환경이 오염되어 있듯이 언어도 사용하다 보면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오염된 언어를 찾아내고 그것을 순화하는 것이야말로 언어 생태학이 무엇보다도 관심을 두는 문제입니다.(95쪽)


<녹색 고전>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언어 생태학’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생각하는 대로 다른 생물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권력이며, 잘못 사용하면 폭력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대항할 수 없는 상대에게 마음대로 그 힘을 행사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언어 생태학’이 조금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다면 하나의 운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를 들면 잡초라 불리는 것들도 분명히 그들만의 특색과 매력을 가지고 있을 것임에도, 그것이 경작물을 망친다고 해서 잡초라 불리는 것은 폭력이다. ‘언어 생태학’이 이런 오염된 언어를 더 많이 순화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시 자연과 벗하는 우리 사회가 되기를 


무위자연의 세계는 바로 건강한 생태계가 지향하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생태주의의 원친 가운데 “자연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있습니다. 자연은 아무런 인공을 보태지 않고 본디 상태 그대로 그냥 내버려두었을 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원칙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연은 손을 대면 댈수록 손해를 봅니다.(155-156쪽)


<녹색 고전>은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옛 선인들의 글을 생태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다시 발견해낸 책이다. 어쩌면 옛 선인들은 이미 생태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후대의 현대인들이 근대의 화려함에 취해 그것을 잃어버리고 만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이 더 망가지기 전에 다시 자연과 벗하는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개인은 자연보호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 할 수 있다. <녹색 고전>과 같은 책을 읽어보는 등의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환경을 파괴하는 정책을 입안하는 것은 각 국가의 정부다. 이제 정부도 말로만 ‘녹색 성장’을 외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녹색 성장을 실천해야 한다. 더 이상 토건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이제 자연과 상생하는 성장이 반드시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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