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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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 있어요?>를 통해 알게 된 주옥같은 소설이다.

제목과 표지만 봤을 땐, 한국 작가가 쓴 책이라고는 쉬이 상상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 어떤 소설보다 한국적이었다. 적어도 스무살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아주 못생긴 여자가 있다.

그리고 인기투표에서 여자들에게 1위를 먹은, 한 남자가 있다.

(이 둘은 모두 갓 스무살 정도의 청년들로, 소설 속에 인물들의 사진이 안 나오는 게 아쉬울만큼 외모에 대한 비중이 큰 이야기다.)

현실 속에서라면 잘생긴 남자가, 가난하고 못생긴 여자를 좋아할리는 없다.(라는 게 일반적인 통념아닐까.)

그렇지만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여기서 이 남자는 가난하고 '토가 쏠릴정도로 못생긴' 이 여자를, 좋아하다 못해 지독히도 사랑한다.

그런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여자를 대변하는 듯한 한 여자의 인생 이야기와, 요란하지 않지만 깊이 아주 깊이 그 여자를 사랑하는 작가를 꿈꾸던 한 남자와,

빠질 수 없는 조연, 요한이라는 남자의 이야기.

 

 

이런 큰 테두리만 뚝 떼어놓고 보자면 그냥 말그대로 소설같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같은데_

나는, 400페이지의 결코 적지않은 분량의 이들 이야기가 결코 그냥 연애이야기로 와닿지 않았다.

손에 책을 놓을 수 없을정도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껴가며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었다. 중간에 다른 책들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오늘 중고책 팔기 리스트에서 당연히 제외했으며, 앞으로도 이 책은 그냥 쭉 소장하는 걸로 ㅎ)

 

 

 

 

 

P.15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P.157

나는 여전했지만 여전하지 않았고, 예전과달리 누가 누구와 헤어졌대, 누가 누구를 버렸대... 주변의 속삭임에도 마음을 아파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났다는 말은, 누군가의 몸 전체에- 즉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린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버렸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뿌리에 붙을 흙처럼 딸려, 떨어져나가는 마음 같은 것...

무엇보다 나무가 서 있던 그 자리의 뻥 뚫린 구멍과... 텅 빈 화분처럼 껍데기만 남아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상상은...

생각만으로도 아프고, 참담한 것이었다.

p.164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p.174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p.200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생각도 들었다.

이왕 태어났는데 저건 한번 타봐야겠지, 여기까지 살았는데... 저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리고 긴긴 줄을 늘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삶이 고된 이유는... 어쩌면 유원지의 하루가 고된 이유와 비슷한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

p.219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p.308

마침 <중산층>이라는 단어가 한창 사회의 이슈가 되던 무렵이었고.. 이 정도는 몰아야... 이 정도는 벌어야... 결국 이 정도는 살아야- 사는 구나, 소리를 듣는 세상이었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닮으려 애를 쓰고 갖추려 기를 쓰는 여자애들을 보며 게다가 이것은 자가발전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인상깊은 구절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랑에 관한 얘기라고 상상하기 힘든 구절들이다.

분명히 사랑얘기긴 한데, 가슴도 아프고 가끔 미소도 지어지는, 그런 사랑이야기이긴 한데

단순한 사랑의 감정 이상의 것들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뿐 아니라, 지난 7~80년대에도 동일하게 존재했을,

끊임없이 남에게 보여지기 위해 사는 사람들, 남을 부러워하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얼마 전에 친구들 모임에 갔다.

결혼 선물로 샤넬 백을 받았다며, 그 백은 500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나는 질겁을 할 정도였는데, 더 놀랐던 건 샤넬백이 다 그렇게 한다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 다른 친구들이었다.

다들 똑같이 월급벌어 생활하는 처지일텐데. 엄청난 기업을 운영하는 재벌 아버지를 둔 아이들도 아닌데 그렇게 덤덤하게 얘기하면서

본인들도 맘만 먹으면 하나 살 수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조금, 만감이 교차했다.

 

5백만원이 넘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도, 성형 수술을 과하게 해대는 것도,

누가 이정도 차는 몰고 다니니 내 남자친구 차도 이정도는 되야 한다는 것도,

누가 결혼하면서 강남에 서른평짜리 집을 구했다더라 하는 것도,

내 주변에서는 어렵지 않게 듣고 있는 이야기다.

여기에 한번도 동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테지만, 이런 현실에 가끔은 답답하고 울적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그렇지 못한 내 처지를 부끄러워하고...

부러운 그 사람처럼 되고자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그래서 명품 장사에 불황이 없고, 서울 강남의 전세값은 계속 오르고, 거의 모든 전광판에 성형외과 광고가 줄어들지 않는 거다.

 

 

이 작가는 삼십대의 여성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런 심리를 이런 현실을 이렇게 잘 집어내고 있을까.

아마 그건, 이런 현실이 비단 삽십대 여성들의 현실일 뿐 아니라,

 나이가 마흔이 되어도 쉰이 되어도. 남자든 여자든 부러움의 대상만 다르다 뿐이지 동일한 현실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 소설이었다.

추녀와 미남의 연애이야기 뿐 아니라, 내 주변의 그 모든 불편한 것들을 시시하게 볼 줄도 아는 용기를 기르게 해 준 것.

 

 

 

짱이다. 왜 15만 독자가 읽은 책인지 알겠다.

(근데 15만명이나 이 책을 읽었는데, 왜 현실은 여전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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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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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은 2004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문학상을 받은 작품에 주목하는 취향은 아니지만, <불쌍하구나?>를 읽고 와타야 리사에게 매료됐었다.

그러니까 대단한 수상작이기도 하지만, 어쨋든 작가의 매력을 어느정도 알고 본 책이다.

 

어려운 말들을 두리 뭉실하게 쓰지도 않고 솔직 담백한 문체로 사람들의 감정을 잘 잡아내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늘 통쾌하고 시원한 무언가가 있다.

이 작가 역시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여자의 심리 상태도, 학창시절의 심리 상태도 날카롭게 집어 내는데 그 심리는 정말 무릎이 탁 쳐질 정도다.

<불쌍하구나>에서 여자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잘 표현했다면,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에서는 고등학교 여학생의 심리를 딱 꼬집어 낸다.

 

 

나 역시 경험했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생각들이기에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더욱 공감으로 와 닿았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반 아이들에게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하츠.

베프가 있지만 그녀는 하츠 한 명을 친구로 두는 건 못견디는 타입이다.  두루두루 모두와 친해지고 싶어하고 그 무리 속에 끼고 싶어한다.

하츠는 그런 그녀가 섭섭하기만 하고 그런 그녀의 눈에 하세가와가 눈에 띈다.

하세가와는 올리짱이라는 아이돌 연예인에게 푹 빠져있는데 누가봐도 히키코모리라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남학생이다.

둘 다 반에서 쓸쓸한 처지라서 그럴까. 둘은 곧잘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의 집에 놀러도 가고 한다.

 

하츠가 하세가와를 좋아해서 친해진 건 결코 아니다.

순간순간 하세가와의 축 늘어진 뒷모습을 볼 때마다 하츠는 발로 차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고독해 보이고, 바보같이 연예인에만 빠져있는 답답한 아이.

그렇지만 하츠 역시 어떻게 보면 하세가와 만큼이나 혼자만의 세계에 깊숙이 박혀사는 처지다.

 

반 아이들이 하츠와 하세가와를 따돌리거나 외톨이로 만든게 아니다.

그들이 무리 속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이 없다.

자신만의 세계에 같혀 있는 모습은 둘 다 공통된 모습이다. 어쩌면 그래서 딱히 서로에게 흥미가 없음에도 가까워진 건지도 모르겠다.

 

 

 

 

 

 

 

P.94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육상부원들과 선생님 사이에는 거짓이 아닌, 진정한 정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니, 그런게 있을 리가 없다.

조금 전 선배의 말은 단지 허세일 뿐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선배들의 방식에 물들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내게 위협을 느껴서, 그 때문에 나온 허세다.

 

 

P.96

인정받고 싶다. 용서받고 싶다. 빗살 사이에 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걷어내듯,

내 마음에 끼어 있는 검은 실오라기들을 누군가 손가락으로 집어내 쓰레기 통에 버려주었으면 좋겠다.

...남에게 바랄 뿐이다. 남에게 해주고 싶은 것 따위는, 뭐하나 떠올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P.145

가장 고통스러운 건 수업 사이사이의 쉬는 시간.

떠들썩한 교실에서 나는 폐의 반 정도밖에 공기를 들이마시지 못한다.

어깨부터 서서히 굳어져가는 압박감.

내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반 아이들이 까불며 떠드는 한쪽에서 전혀 흥미가 없으면서도 다음 시간의 교과서를 펼쳐보거나 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긴 10분.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조금씩 죽어갈 나 자신이 아주 생생하게 그려진다.

 

 

 

 

외로운 사람들은 항상 강한 자신들만의 벽이 있다.

이렇게 남 얘기처럼 얘기하는 내게도, 외로운 사람이 갖는 견고한 벽이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의 무리 속에 끼는 게 귀찮다고 말하고, 혼자 조용히 사는 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 조차도

사실은 다가와서 말 걸어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하는 마음이 있다.

그걸 감추기 위해, 부단히도 외롭지 않음을 증명하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하츠도 하세가와도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엄청 심각한 것처럼 생각하고 이야기하지만, 어쨋든 "나 외로워요"하는 아이들이었다.

내게도 그런 학창시절이 있었듯, 이 아이들도 그 격렬한(?) 학창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상상은 언제나 내 편이다.

올리짱을 사랑하는 상상, 혼자 쉬는 시간을 보내도 전혀 외롭지 않고 나 혼자만의 시간들로 만족하는 상상.

이런 상상들은 늘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을 버티게 하는 힘이지만 이건 분명히 현실은 아니다.

현실의 올리짱에게 하세가와는 스토커에 가까운 팬일 뿐이고, 현실의 쉬는 시간은 언제나 답답하고 외롭기만 한 시간이다.

이런 상상의 시간들로 채워지는 자신만의 견고한 틀 안에서,

하세가와와 하츠는 점점 깨어나오고 있다.

 

이 과정이 나는 참 흥미로웠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고 솔직했다.

이게 일본의 어마무시한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실력이겠지.

 

 

 

학창시절을 한참 벗어나, 이제는 외롭지 않다고, 이제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내게

다시 한번 솔직해져 보자는 생각을 갖게 만든 책이다.

정말로 외롭지 않은지.

정말로 남들을 제대로 사랑하고 바라볼 수 있는지.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이 아닌 것 처럼 나도, 하츠와 하세가와처럼 아직 깨지 못한 틀이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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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도쿄
김민정 글.사진 / 효형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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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름도 생소하고, 화려하게 광고를 하는 책도 아니었지만

'엄마'와 '도쿄'라는 단어 두개만 보고 고른 책이었다.

 

감성이 뚝뚝 뭍어나는 사진들과 역시 감성적인 글들로 페이지들을 채우는 수많은 에세이들 속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진솔한 삶의 모습들을 좀 보고 듣고 싶었다.

웬지 이 책은 그런 이야기들을 해 줄 것만 같아 선택했는데,

254페이지의 에필로그까지

정말 아까워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너무 소중하게 본 책이었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40대 초반의 아이 둘 가진 여성에게 삶은 슬퍼하고 앉아만 있길 허락하지 않았다.

억척같이 강인하게 살던 엄마는 어린 아이들 둘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온다.

그녀의 꿈과 인생따위는 마치 전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스무해동안 낯선 땅에서 철저히 자식들 뒷바라지와 생계를 위해 살아간다.

 

그런 엄마에게도 꿈이 있고 인생이 있었는데,

딸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Someday I Will Fly Away"

엄마의 열쇠고리에 적힌 이 문구를 보고 눈물을 그칠수 없는 장면에서는 역시 그런 인생을 살아왔을 우리 엄마가 생각나서 눈물이 났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매일 밤 쉬지도 않고 여덟시간을 꼬박 서서 일하며, 때론 일본사람들의 조롱을 받아가며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엄마에게

암이라는 무서운 선고가 떨어지고,

그 선고를 받은 후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남은 딸은 엄마와의 스무해 추억을 더듬는다.

엄마와 맛있게 먹었던 돈가스 집, 엄마가 좋아하던 끽다실 르누아르의 커피, 구시노보에 있는 구시아게 집.

함께했던 신주쿠 교엔, 도쿄의 병원, 골든가에 있는 엄마의 심야식당 '파인트리'.

도쿄 곳곳에 녹아있는 엄마와의 추억이, 마치 나의 추억인듯 애틋해지고 설레었다.

 

 

 

"한꺼번에 철드는 일은 없었다.

한 철 한 철 계절을 넘길 때마다

조금씩 어른이 되어갈 뿐이었다."

- P.100 

 

"그렇게 원하던 자유를

엄마는 일본 땅에서 조금쯤은 맛봤을까?

일본에 온 후 엄마에겐 미국을 동경할 틈마저 없었던 것은 아닐까?"

- P.224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애틋해지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은,

한살씩 나이가 먹어가면서 더해지는 것 같다.

특히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집이 아닌 시댁으로 명절을 맞이하러 가는 기분은 더욱 그랬다.

함께 할때 잘할걸.

이라는 말이, 왜 그렇게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엄마와 내가 참 다르면서도 참 많이 닮았듯이,

작가와 도쿄의 엄마도 그랬다.

같은 작가를 좋아하고, 같은 음악을 좋아하고, 같은 의류 브랜드를 좋아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속을 알수없는 엄마의 마음에 답답해하기도 일쑤였다.

그랬음에도,

결국은 엄마가 떠난 후에 남은 주변의 흔적들은 엄마의 것이 아닌게 없다.

어딜가도, 뭘 먹어도, 작가에겐 엄마와의 추억이 되어 있었다.

 

 

스무살부터 서울로 올라와서 엄마와 떨어져서 산 나는,

어쩌면 엄마에 대해서 훨씬 더 모르는 게 많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무슨 음식을 잘 드시는지, 어디를 좋아하는지,

작가만큼 세세히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럼  나는 나중에, 엄마를 추억하고 그리움을 함께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아쉽고, 슬프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스무해 동안 작가가 엄마와 다닌 추억의 장소와 맛집들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졌다.

 

 

 

 

 

지금은 이렇게 슬프고

눈물마저 말라

다시는 웃지 못할 것 같지만

그런 시절도 있었다고

얘기할 날이 언젠가 오겠지

저런 시절도 있었다고

웃으며 얘기할 날이 오겠지

그러니 오늘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오늘의 바람을 맞아보자

 

-나카지마 미유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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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자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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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잘 안 읽히는 때가 있다.

한창 열심히, 일주일에 몇 권씩 달리다가 어느순간 뚜욱_하고 끊겨버리는.

자꾸만 뭔가 더 읽고 싶어서 책 쇼핑은 더욱 박차를 가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침대 옆에 자꾸 쌓아두게 되는 책만 높아져가는 시기.

그럴땐,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다.

500페이지든, 600페이지든 전혀 부담이 없다.

그렇게 한권을 뚝딱 금세 읽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예전의 패턴으로 돌아온다.

 

 

 

 

 

히가시노 게이고 책은 틈틈이 열심히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읽는 속도보다 이 아저씨 책을 내는 속도가 더 빠른가보다.

정신차려보면 처음 구경하는 신간이 켭켭이 쌓여있다.

<신참자>는 이미 발간된지는 꽤 됐는데, 나왔을때 책소개를 보고 "오호~ 이젠 이웃들의 거짓말!!"하며 재밌겠다 생각했는데, 결국 놓치고 못봤었고

드라마가 나와서 일본에서 히트를 쳤다고 할때도, 봐야지 하고 못봤었다.

이제서야 폭풍 집중!!!!

 

 

 

 

아홉개의 이야기가 가닥가닥 단편 같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런 구성은,

그간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에서 종종 접하게 되는 구성이다.

개인적으로 단편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라,

아무리 큰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에 한창 집중해서 읽고 ​있는데 급박하게 종료되는 듯한 이 구조는,

읽는데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곤함이 느껴졌다.

이제 슬슬 내막이 파헤쳐지려나보다-하고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면,

가가형사 혹은 단편의 주인공들이 사실을 술술 고백한다.

그러면 푸쉬쉬-새는 김.

이걸 여덟번이나 반복하려니 ;;;

 

 

 

 

 

 

심지어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은 이리 얇다.

이야기의 시작은, 니혼바시의 한 원룸 아파트에 혼자 사는 40대 여성이 살해를 당하면서 시작된다.

언제나 등장하는 가가형사가 일대의 상점가를 돌면서 피해자 여성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을 한다.

피해자를 작당하고 죽여놓고 그 범행을 덮기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짓 증언들이다.

이런 거짓 증언들에 대한 이유를 각각 발견하게 되는데,

이게 어떻게보면 너무 허무하리만큼 금방 드러났다.

그러나 각자의 그 증언들 속에 등장하는 피해자의 행적과, 사람들의 거짓 증언에는

하나같이 가족의 따뜻한 사랑으로 마무리가 된다.

마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같은 느낌이랄까.

 

 

 

 

 

책 제목의 <신참자>는 그냥 가가형사였다는 ㅋ

+

단편처럼 잘라지는 얘기는 별로네 어쩌네해도,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재밌게 잘 읽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스릴 넘치는 추리가 있으면서도 무섭지 않아서 좋다.

살인사건이 나오는데도 밤에 편안하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하지 않아서 좋다.

특히나 이렇게 따뜻한 소스들을 가미한 책들은, 감동적이고 기분좋은 소설 한권을 읽은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책을 닥치는대로 다 읽지 않는 이유는

다락방에 감춰놓은 꿀같은 거라고나 할까.

심심할 때, 재밌는 책이라도 한 권 읽고 싶은데 도무지 책 읽을 마음도 안날 때, 스트레스 엄청 받는 일이 있어서 좀 현실에서 탈피하고 싶을 때,

한 번씩 꺼내서 읽으면 완치되는 느낌. 아껴가며 한권씩 한번씩 읽고싶은 마음.

이번에도 잘-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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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여자 - 떠남과 돌아옴, 출장길에서 마주친 책이야기
성수선 지음 / 엘도라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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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선 작가는 작년에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라는 책을 접하게 되면서 좋아하게 된 작가다.

전직도 아니고 현직 삼성정밀화학 해외영업 차장을 역임하고 있는 그녀는,

책도 지금까지 세권이나 낸, 작가로도 인정받고 있는 대단히 멋진 여성이다.

나도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일도 똑부러지게 잘하고 서른이 되면 책도 내고 해야지-하고 막연하게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나타난거다.

 

 

 

 

이 책은 책을 아주 좋아하는 그녀가 길고 짧은 출장길에서 마주한 책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독서에세이지만, 읽은 책 내용보다는 그녀의 일상을 다루는 이야기들이 좀 더 많다.

어쩌면 그래서 더 재밌었다.

해외영업 직장인의 삶도 막연히 화려해보이기만 했는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바쁜 업무에 허덕이고, 그냥 나랑 똑같은 직장인이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다른 일반의 직장인들과 조금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그 고군분투의 치열한 일상 가운데 책으로 인한 위로와 즐거움이 채워진다는 것이다.

 

책을 통해 위로를 얻고, 책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고,

책을 통해 사람을 얻고, 책을 통해 즐거움을 얻었다.

일상의 한 순간 한 순간 속에, 그 좁은 간격안에 반짝 하고 떠오르는 책의 구절들이나 내용은,

그녀의 건조한 삶에 아주 건강한 보습제가 되어주었다.

 

 

 

 

P.54

회사에서도 "안 되면 되게 하는 게 능력이지, 무슨 핑계가 그렇게 많아? 긴 말 듣기 싫고 결과를 내놔!"

하고 부하직원을 다그치는 것보다,

"잘하고 있어. 다소 어려움이 있겠지만 김 대리야 워낙 능력이 있으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부담 갖지말고 말해, 뭐든 도와줄게.

너무 척척 알아서 하면 내가 심심하잖아, 알았지?"하고 지지해주는 게 막강한 동기부여가 된다.

 

 

P.124

어떤 재태크책은 부동산 투자의 시대가 온다고 하고, 어떤 책은 부동산 가격 대폭락의 시대가 온다고 한다.

이것저것 다 따라하다가는... 인생 끝난다. 누가 뭐라고 하건 '나'라는 인간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자꾸 귀 얇은 티 내며 이 말 저 말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P.164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고 김훈이 말했듯이,

우리 앞의 현실은 길고 지루하다.

사랑은 끝났다가도 다시 시작되지만, 퍽퍽한 현실은 쉼없이 계속된다.

그런데도 나는 더러 사랑타령을 하느라, 꿈과 이상을 논하느라 밥벌이의 중요성을 망각한다.

기초체력이 있어야 축구도 하고 철인 3종 경기도 하듯이, 내 밥벌이는 내가 할 수 있어야 사랑도, 꿈도, 이상도 실현할 수 있다는 너무도 기본적인 사실을 잊어버리고

밥벌이의 구차함을 논하기에 바쁘다.

아직 철이 없어도 한참 없다.

 

 

 

 

P.188

속옷 입는 것까지 검열과 지시를 받아야했던 어린 소녀들이 자라 오토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제약과 자기검열이 내면화된 어른이 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제약한다.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너무 강해 보이면 안 돼, 너무 약해 보여도 안 돼, 너무 잘나 보여도 안 돼, 너무 없어 보여도 안 돼...

하루종일 안 돼, 안 돼, 안 돼! 괜히 피곤한 게 아니다.

 

P.217

누군가와 일상을 함께한다는 게 항상 즐겁거나 낭만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 싸우고, 몰랐던 상대방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서로 다른 생활습관 때문에 불편하고 짜증이 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일요일 오후를 함께 보낼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별다른 계획 없이, 그저 편하게. 더 이상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의심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옆에 있고 싶은 사람,

척 달라붙어 팔베개를 베고 자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책을 좋아하는 직장인"이라는 공통점 때문일까.

그녀의 말에 구구절절 공감가는 얘기들이 너무나 많았다.

자기계발도 귀찮고, 이것저것 다 귀찮을 때.

침대 맡에 소설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는 모습을 보고 오빠가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자기는 너무 책을 편식하는 거 아니야? 의미 없이 소설만 읽지말고 도움이 되는 경제경영이나 역사책 같은 거 읽어보는 게 어때?"

 

그때 발끈해서 왜 소설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건지, 문학의 중요성을 왜 모르냐며 엄청 열을 냈던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설득이 되진 않았는지,

여전히 침대 한켠에는 소설이나 에세이가, 반대편에는 각종 경제서와 인문학 책이 쌓여있다.

 

소설을 읽는 다는 것이,

그냥 단순한 지적인 유흥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생활에서 얼마나 지혜가 되는지를 그녀는 너무나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아-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이 페이지를 쫘악 펼쳐서 오빠한테 당장 읽어보라고 치켜들고 싶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책들을, 이 단편적인 이야기들로만 봐서는 그 책이 무슨 내용인지 과연 재미가 있을것인지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내가 한두권씩 꾸준히 읽은 책들이, 하나의 문장들이 일상에서 툭툭 튀어나와 활력소가 되고 양질의 보너스가 된다는 게 포인트.

내가 읽은 수많은 책들도,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니 줄거리도 희미한 책들이 많지만) 앞으로의 내 일상 가운데 그렇게 양질의 활력소로 잘 녹아들겠지?

행복하다.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도 행복한 일인데, 그로 인해 얻는 유익도 이렇게 매력적이라니.

 

 

+

아, 그녀가 종종 언급한 <마담 보바리>는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오늘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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