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은 2004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문학상을 받은 작품에 주목하는 취향은 아니지만, <불쌍하구나?>를 읽고 와타야 리사에게 매료됐었다.
그러니까 대단한 수상작이기도 하지만, 어쨋든 작가의 매력을 어느정도 알고 본 책이다.
어려운 말들을 두리 뭉실하게 쓰지도 않고 솔직 담백한 문체로 사람들의 감정을 잘 잡아내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늘 통쾌하고 시원한 무언가가 있다.
이 작가 역시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여자의 심리 상태도, 학창시절의 심리 상태도 날카롭게 집어 내는데 그 심리는 정말 무릎이 탁 쳐질 정도다.
<불쌍하구나>에서 여자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잘 표현했다면,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에서는 고등학교 여학생의 심리를 딱 꼬집어 낸다.
나 역시 경험했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생각들이기에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더욱 공감으로 와 닿았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반 아이들에게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하츠.
베프가 있지만 그녀는 하츠 한 명을 친구로 두는 건 못견디는 타입이다. 두루두루 모두와 친해지고 싶어하고 그 무리 속에 끼고 싶어한다.
하츠는 그런 그녀가 섭섭하기만 하고 그런 그녀의 눈에 하세가와가 눈에 띈다.
하세가와는 올리짱이라는 아이돌 연예인에게 푹 빠져있는데 누가봐도 히키코모리라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남학생이다.
둘 다 반에서 쓸쓸한 처지라서 그럴까. 둘은 곧잘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의 집에 놀러도 가고 한다.
하츠가 하세가와를 좋아해서 친해진 건 결코 아니다.
순간순간 하세가와의 축 늘어진 뒷모습을 볼 때마다 하츠는 발로 차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고독해 보이고, 바보같이 연예인에만 빠져있는 답답한 아이.
그렇지만 하츠 역시 어떻게 보면 하세가와 만큼이나 혼자만의 세계에 깊숙이 박혀사는 처지다.
반 아이들이 하츠와 하세가와를 따돌리거나 외톨이로 만든게 아니다.
그들이 무리 속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이 없다.
자신만의 세계에 같혀 있는 모습은 둘 다 공통된 모습이다. 어쩌면 그래서 딱히 서로에게 흥미가 없음에도 가까워진 건지도 모르겠다.

P.94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육상부원들과 선생님 사이에는 거짓이 아닌, 진정한 정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니, 그런게 있을 리가 없다.
조금 전 선배의 말은 단지 허세일 뿐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선배들의 방식에 물들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내게 위협을 느껴서, 그 때문에 나온 허세다.
P.96
인정받고 싶다. 용서받고 싶다. 빗살 사이에 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걷어내듯,
내 마음에 끼어 있는 검은 실오라기들을 누군가 손가락으로 집어내 쓰레기 통에 버려주었으면 좋겠다.
...남에게 바랄 뿐이다. 남에게 해주고 싶은 것 따위는, 뭐하나 떠올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P.145
가장 고통스러운 건 수업 사이사이의 쉬는 시간.
떠들썩한 교실에서 나는 폐의 반 정도밖에 공기를 들이마시지 못한다.
어깨부터 서서히 굳어져가는 압박감.
내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반 아이들이 까불며 떠드는 한쪽에서 전혀 흥미가 없으면서도 다음 시간의 교과서를 펼쳐보거나 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긴 10분.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조금씩 죽어갈 나 자신이 아주 생생하게 그려진다.

외로운 사람들은 항상 강한 자신들만의 벽이 있다.
이렇게 남 얘기처럼 얘기하는 내게도, 외로운 사람이 갖는 견고한 벽이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의 무리 속에 끼는 게 귀찮다고 말하고, 혼자 조용히 사는 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 조차도
사실은 다가와서 말 걸어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하는 마음이 있다.
그걸 감추기 위해, 부단히도 외롭지 않음을 증명하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하츠도 하세가와도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엄청 심각한 것처럼 생각하고 이야기하지만, 어쨋든 "나 외로워요"하는 아이들이었다.
내게도 그런 학창시절이 있었듯, 이 아이들도 그 격렬한(?) 학창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상상은 언제나 내 편이다.
올리짱을 사랑하는 상상, 혼자 쉬는 시간을 보내도 전혀 외롭지 않고 나 혼자만의 시간들로 만족하는 상상.
이런 상상들은 늘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을 버티게 하는 힘이지만 이건 분명히 현실은 아니다.
현실의 올리짱에게 하세가와는 스토커에 가까운 팬일 뿐이고, 현실의 쉬는 시간은 언제나 답답하고 외롭기만 한 시간이다.
이런 상상의 시간들로 채워지는 자신만의 견고한 틀 안에서,
하세가와와 하츠는 점점 깨어나오고 있다.
이 과정이 나는 참 흥미로웠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고 솔직했다.
이게 일본의 어마무시한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실력이겠지.
학창시절을 한참 벗어나, 이제는 외롭지 않다고, 이제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내게
다시 한번 솔직해져 보자는 생각을 갖게 만든 책이다.
정말로 외롭지 않은지.
정말로 남들을 제대로 사랑하고 바라볼 수 있는지.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이 아닌 것 처럼 나도, 하츠와 하세가와처럼 아직 깨지 못한 틀이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