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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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 있어요?>를 통해 알게 된 주옥같은 소설이다.

제목과 표지만 봤을 땐, 한국 작가가 쓴 책이라고는 쉬이 상상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 어떤 소설보다 한국적이었다. 적어도 스무살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아주 못생긴 여자가 있다.

그리고 인기투표에서 여자들에게 1위를 먹은, 한 남자가 있다.

(이 둘은 모두 갓 스무살 정도의 청년들로, 소설 속에 인물들의 사진이 안 나오는 게 아쉬울만큼 외모에 대한 비중이 큰 이야기다.)

현실 속에서라면 잘생긴 남자가, 가난하고 못생긴 여자를 좋아할리는 없다.(라는 게 일반적인 통념아닐까.)

그렇지만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여기서 이 남자는 가난하고 '토가 쏠릴정도로 못생긴' 이 여자를, 좋아하다 못해 지독히도 사랑한다.

그런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여자를 대변하는 듯한 한 여자의 인생 이야기와, 요란하지 않지만 깊이 아주 깊이 그 여자를 사랑하는 작가를 꿈꾸던 한 남자와,

빠질 수 없는 조연, 요한이라는 남자의 이야기.

 

 

이런 큰 테두리만 뚝 떼어놓고 보자면 그냥 말그대로 소설같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같은데_

나는, 400페이지의 결코 적지않은 분량의 이들 이야기가 결코 그냥 연애이야기로 와닿지 않았다.

손에 책을 놓을 수 없을정도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껴가며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었다. 중간에 다른 책들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오늘 중고책 팔기 리스트에서 당연히 제외했으며, 앞으로도 이 책은 그냥 쭉 소장하는 걸로 ㅎ)

 

 

 

 

 

P.15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P.157

나는 여전했지만 여전하지 않았고, 예전과달리 누가 누구와 헤어졌대, 누가 누구를 버렸대... 주변의 속삭임에도 마음을 아파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났다는 말은, 누군가의 몸 전체에- 즉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린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버렸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뿌리에 붙을 흙처럼 딸려, 떨어져나가는 마음 같은 것...

무엇보다 나무가 서 있던 그 자리의 뻥 뚫린 구멍과... 텅 빈 화분처럼 껍데기만 남아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상상은...

생각만으로도 아프고, 참담한 것이었다.

p.164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p.174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p.200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생각도 들었다.

이왕 태어났는데 저건 한번 타봐야겠지, 여기까지 살았는데... 저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리고 긴긴 줄을 늘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삶이 고된 이유는... 어쩌면 유원지의 하루가 고된 이유와 비슷한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

p.219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p.308

마침 <중산층>이라는 단어가 한창 사회의 이슈가 되던 무렵이었고.. 이 정도는 몰아야... 이 정도는 벌어야... 결국 이 정도는 살아야- 사는 구나, 소리를 듣는 세상이었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닮으려 애를 쓰고 갖추려 기를 쓰는 여자애들을 보며 게다가 이것은 자가발전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인상깊은 구절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랑에 관한 얘기라고 상상하기 힘든 구절들이다.

분명히 사랑얘기긴 한데, 가슴도 아프고 가끔 미소도 지어지는, 그런 사랑이야기이긴 한데

단순한 사랑의 감정 이상의 것들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뿐 아니라, 지난 7~80년대에도 동일하게 존재했을,

끊임없이 남에게 보여지기 위해 사는 사람들, 남을 부러워하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얼마 전에 친구들 모임에 갔다.

결혼 선물로 샤넬 백을 받았다며, 그 백은 500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나는 질겁을 할 정도였는데, 더 놀랐던 건 샤넬백이 다 그렇게 한다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 다른 친구들이었다.

다들 똑같이 월급벌어 생활하는 처지일텐데. 엄청난 기업을 운영하는 재벌 아버지를 둔 아이들도 아닌데 그렇게 덤덤하게 얘기하면서

본인들도 맘만 먹으면 하나 살 수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조금, 만감이 교차했다.

 

5백만원이 넘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도, 성형 수술을 과하게 해대는 것도,

누가 이정도 차는 몰고 다니니 내 남자친구 차도 이정도는 되야 한다는 것도,

누가 결혼하면서 강남에 서른평짜리 집을 구했다더라 하는 것도,

내 주변에서는 어렵지 않게 듣고 있는 이야기다.

여기에 한번도 동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테지만, 이런 현실에 가끔은 답답하고 울적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그렇지 못한 내 처지를 부끄러워하고...

부러운 그 사람처럼 되고자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그래서 명품 장사에 불황이 없고, 서울 강남의 전세값은 계속 오르고, 거의 모든 전광판에 성형외과 광고가 줄어들지 않는 거다.

 

 

이 작가는 삼십대의 여성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런 심리를 이런 현실을 이렇게 잘 집어내고 있을까.

아마 그건, 이런 현실이 비단 삽십대 여성들의 현실일 뿐 아니라,

 나이가 마흔이 되어도 쉰이 되어도. 남자든 여자든 부러움의 대상만 다르다 뿐이지 동일한 현실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 소설이었다.

추녀와 미남의 연애이야기 뿐 아니라, 내 주변의 그 모든 불편한 것들을 시시하게 볼 줄도 아는 용기를 기르게 해 준 것.

 

 

 

짱이다. 왜 15만 독자가 읽은 책인지 알겠다.

(근데 15만명이나 이 책을 읽었는데, 왜 현실은 여전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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