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밑줄 긋는 여자 - 떠남과 돌아옴, 출장길에서 마주친 책이야기
성수선 지음 / 엘도라도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성수선 작가는 작년에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라는 책을 접하게 되면서 좋아하게 된 작가다.
전직도 아니고 현직 삼성정밀화학 해외영업 차장을 역임하고 있는 그녀는,
책도 지금까지 세권이나 낸, 작가로도 인정받고 있는 대단히 멋진 여성이다.
나도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일도 똑부러지게 잘하고 서른이 되면 책도 내고 해야지-하고 막연하게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나타난거다.

이 책은 책을 아주 좋아하는 그녀가 길고 짧은 출장길에서 마주한 책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독서에세이지만, 읽은 책 내용보다는 그녀의 일상을 다루는 이야기들이 좀 더 많다.
어쩌면 그래서 더 재밌었다.
해외영업 직장인의 삶도 막연히 화려해보이기만 했는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바쁜 업무에 허덕이고, 그냥 나랑 똑같은 직장인이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다른 일반의 직장인들과 조금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그 고군분투의 치열한 일상 가운데 책으로 인한 위로와 즐거움이 채워진다는 것이다.
책을 통해 위로를 얻고, 책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고,
책을 통해 사람을 얻고, 책을 통해 즐거움을 얻었다.
일상의 한 순간 한 순간 속에, 그 좁은 간격안에 반짝 하고 떠오르는 책의 구절들이나 내용은,
그녀의 건조한 삶에 아주 건강한 보습제가 되어주었다.

P.54
회사에서도 "안 되면 되게 하는 게 능력이지, 무슨 핑계가 그렇게 많아? 긴 말 듣기 싫고 결과를 내놔!"
하고 부하직원을 다그치는 것보다,
"잘하고 있어. 다소 어려움이 있겠지만 김 대리야 워낙 능력이 있으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부담 갖지말고 말해, 뭐든 도와줄게.
너무 척척 알아서 하면 내가 심심하잖아, 알았지?"하고 지지해주는 게 막강한 동기부여가 된다.
P.164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고 김훈이 말했듯이,
우리 앞의 현실은 길고 지루하다.
사랑은 끝났다가도 다시 시작되지만, 퍽퍽한 현실은 쉼없이 계속된다.
그런데도 나는 더러 사랑타령을 하느라, 꿈과 이상을 논하느라 밥벌이의 중요성을 망각한다.
기초체력이 있어야 축구도 하고 철인 3종 경기도 하듯이, 내 밥벌이는 내가 할 수 있어야 사랑도, 꿈도, 이상도 실현할 수 있다는 너무도 기본적인 사실을 잊어버리고
밥벌이의 구차함을 논하기에 바쁘다.
아직 철이 없어도 한참 없다.
P.188
속옷 입는 것까지 검열과 지시를 받아야했던 어린 소녀들이 자라 오토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제약과 자기검열이 내면화된 어른이 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제약한다.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너무 강해 보이면 안 돼, 너무 약해 보여도 안 돼, 너무 잘나 보여도 안 돼, 너무 없어 보여도 안 돼...
하루종일 안 돼, 안 돼, 안 돼! 괜히 피곤한 게 아니다.
P.217
누군가와 일상을 함께한다는 게 항상 즐겁거나 낭만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 싸우고, 몰랐던 상대방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서로 다른 생활습관 때문에 불편하고 짜증이 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일요일 오후를 함께 보낼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별다른 계획 없이, 그저 편하게. 더 이상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의심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옆에 있고 싶은 사람,
척 달라붙어 팔베개를 베고 자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책을 좋아하는 직장인"이라는 공통점 때문일까.
그녀의 말에 구구절절 공감가는 얘기들이 너무나 많았다.
자기계발도 귀찮고, 이것저것 다 귀찮을 때.
침대 맡에 소설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는 모습을 보고 오빠가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자기는 너무 책을 편식하는 거 아니야? 의미 없이 소설만 읽지말고 도움이 되는 경제경영이나 역사책 같은 거 읽어보는 게 어때?"
그때 발끈해서 왜 소설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건지, 문학의 중요성을 왜 모르냐며 엄청 열을 냈던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설득이 되진 않았는지,
여전히 침대 한켠에는 소설이나 에세이가, 반대편에는 각종 경제서와 인문학 책이 쌓여있다.
소설을 읽는 다는 것이,
그냥 단순한 지적인 유흥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생활에서 얼마나 지혜가 되는지를 그녀는 너무나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아-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이 페이지를 쫘악 펼쳐서 오빠한테 당장 읽어보라고 치켜들고 싶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책들을, 이 단편적인 이야기들로만 봐서는 그 책이 무슨 내용인지 과연 재미가 있을것인지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내가 한두권씩 꾸준히 읽은 책들이, 하나의 문장들이 일상에서 툭툭 튀어나와 활력소가 되고 양질의 보너스가 된다는 게 포인트.
내가 읽은 수많은 책들도,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니 줄거리도 희미한 책들이 많지만) 앞으로의 내 일상 가운데 그렇게 양질의 활력소로 잘 녹아들겠지?
행복하다.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도 행복한 일인데, 그로 인해 얻는 유익도 이렇게 매력적이라니.
+
아, 그녀가 종종 언급한 <마담 보바리>는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오늘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