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일본연구 과제>

 

 

1. 서론 : 메이지 유신 전후 시기의 사상사적 중요성

 

동아시아 세계, 즉 한국과 일본, 중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근대란 언제나 뜨거운 화두이다. 이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느냐에 따라서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기도 하고, 이것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논쟁한다. 이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 논쟁이다.

더구나, 다른 식민지화된 세계가 그렇듯이, 동아시아 3국도 마찬가지로 그냥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국가적인 규모의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고, 때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개항을 요구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근대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구시대적인 가치관에 매달린 사람도 있었고,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해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민중적인 지지에 기반해 전국가적인 저항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처럼 근대가 동아시아 세계에 가져다준 충격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규정하는 중요한 축이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메이지 유신은 주목할만하다. 이 사건은 일본이 중세적인 봉건 국가에서 근대적인 국가로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정치적인 변화, 새로운 기술의 도입, 생산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것들보다도 메이지 유신이 중요한 더 큰 이유는,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의 근대적인 사상을 성공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유일하게, 더 나아가서는 유럽 이외의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열강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세계대전의 주역으로서 세계사에 등장할 만큼 성장하였고,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처음부터 새롭게 대면한 사상에 빠르게 적응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지식인들도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쇄국정책을 펼친 시기도 있었고, 결국엔 그 결과로서 무력하게 개항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개항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그들은 주체적으로 유신에 성공하게 되며,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의 사상적인 여정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서양의 근대 사상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반응은 그만큼 다양하고, 또 그것을 교류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사상적으로 때로는 정치적으로 많은 충돌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충돌을 겪었다는 것만으로는 메이지 유신만의 독특한 특징, 즉 근대를 받아들인과정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실제로 서양의 문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이런 시각들이 당시에 어떤 사상적인 지형도를 그려냈는지, 그리고 이들이 각각 당대의 정치세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본 지식인들의 이러한 반응을 쇄국/개국, 경막/토막, 국권/민권이라는 대립주제들로 나누어 볼 것이다. 이런 주제들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 세 가지 대립항들이 사상적·정치적 충돌을 일으켰던 주요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들에 대한 의견을 여러 가지로 조합해 볼 때, 당시의 담론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쇄국형 존황양이론’, ‘친막부형 존황양이론’, ‘반막부형 존황양이론’, ‘전면적 수용이 바로 그것이다.

 

2. 문화적 보수주의의 등장 : 쇄국형 존황양이론

 

우선 문화적 보수주의의 등장에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쇄국형 존황양이론이란, 결국 당시의 쇄국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 문물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막거나 극히 일부만 받아들이자는 정치적 견해로 흐르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기본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대신에 큐슈 지방에서 중국과 네덜란드, 조선을 상대로 교역하는 것만을 허가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포함하여 일본 전체가 외국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는 이 곳 한 곳 뿐이었다. 그나마도 네덜란드를 통해서 유입되는 여러 서양사상 서적들의 경우에는 출판을 금지당하거나 실용서적에 한해서만 번역이 허용되었다. 따라서 도쿠가와 시기에는 서양의 문물이 일본 전체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이 매우 적었다.

하지만 1700년대 후반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서유럽-미국의 국가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일 처음 일본에 다가온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북해도 지역에 관심을 가지면서 1778년에 처음으로 통상을 요구하였는데, 일본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1792년과 1804년 재차 교역을 요구하였고, 다시 거절당하자 돌아가는 길에 일본의 에조지蝦夷地 지역을 공격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1810년대에 들어서는 영국의 함선이 교역을 요구하고 사쓰마 번 등에 상륙하였다.

이에 따라 외국 세력의 출현에 대한 위기의식이 확산되었다. 서유럽-미국 세력의 이런 위협적인 모습에 대해, 여기에 대항하고 방비를 갖추며 문호를 열어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장 즉각적이고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2.1. 미토학파水戶學派

 

미토학파는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인 미토번水戶藩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 무리의 학자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개항기에만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미토학파가 중국의 史記를 본딴 일본의 역사인 大日本史를 편찬하기 위해 학자들을 모아 조직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를 시도한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손자이면서 미토번의 2대 번주였던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國. 그는 자신의 영지에 정통 주자학을 보급하려고 애썼다. 일본의 역사를 편찬하려고 시도한 것도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또한 명나라의 학자에게 편찬의 감수를 맡기기도 하였다.

이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만의 독특한 역사관, 즉 일본식 화이론이 발생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주자학의 체계에서 내세우는 세계의 중심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대체함으로써, 자신들의 천황을 천자로서 간주하고,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국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일본의 문물에 대해 연구하는 움직임, 즉 국학國學운동을 주도한 것도 미토학파의 업적이다.

이것은 미토학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미토학파는 태생에서부터 주자학을 연구하는 집단이었고, 당시 일본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의 정초를 놓은 학파인 것이다. 미토학파의 이러한 성격은 개항을 전후한 시기로 내려올 때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일본화된) 주자학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세계관을 주장할 수 밖에 없었다.

 

2.2. 아이자와 세시사이會澤正志齋의 국체론國體論

 

막부 말기의 미토학파를 특히 후기後期 미토학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아이자와 세시사이會澤正志齋(=아이자와 야스지會澤安)는 후기 미토학파를 이끌던 인물이다. 그는 미토학파에서 大日本史를 편찬하던 유학자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일본화된 주자학에 매우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新論에서 국체론國體論이라는 독특한 견해를 전개한다. 그의 국체론은 이후 등장하는 서양에 대한 다양한 견해의 원천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이후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미토학파를 포함하여 현재 일본을 지탱하는 세계관을 고수하는 이들에게 철학적인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아이자와 세시사이가 이야기하는 국체란, 지금의 일본을 만든 천황과 그를 충성과 효도로서 섬기는 관계의 총체를 뜻한다. 또한, 라는 말은 그 이전부터 불교와 주자학에서 본질, 근본, 원리, 원인 등을 뜻하는 말로써 널리 쓰여온 말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현재 일본의 정치체제와 자신들이 물려받은 문화적유산을 일본을 규정할 수 있게끔 해주는 본질로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이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는 것은, 주자학에서 이야기하는 정명正名, 즉 자신의 직분에 알맞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국체론에서는 각 직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그 임무가 주어지고, 그것을 실천할 것을 역설한다. 그가 말하는 직분은 당시의 신분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뜻을 묻는 천자, 천자의 뜻을 대리해서 정치를 담당하는 막부, 막부가 시행하는 정책의 행정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지방의 다이묘, 그리고 물자의 생산과 노동을 담당하는 농민 계급이 그것이다.

그런데 아이자와의 이런 견해는 묘한 이중성을 띄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시 막번체제의 신분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그의 사상을 접한다면, 이것은 당연히 당시의 정치 및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해주는 사상적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면에 막번체제에 비판적인 시선으로 이 글을 읽는다면, 현재 막부에 대해 정치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사상적인 기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국체론은 실제로 당대 지식인 사이에서 이런 두 가지 방향으로 모두 읽히는데, 이것은 이 이후의 지식인들에게 다양한 형식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첫 번째 분기점, 아편전쟁

 

3.1. 아편전쟁과 일본

 

아편전쟁은 1840년 청나라와 영국이 벌인 전쟁이다. 동아시아 세계의 맹주를 자처해오던 중국은 이 전쟁에서 영국에게 무참하게 패배하였고,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강제개항이라는 굴욕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2차 아편전쟁에서는 수도가 공격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이 사건은 전쟁당사자인 청나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현실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그렇게 간주되던 나라가 서양세력의 일개 군대에게 패배한 것은, 일본과 한국 각각에게 엄청난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다. , 우리도 저들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전쟁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임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쇄국과 제한적 개방을 고수하던 일본 정부와 지식인들은 네덜란드의 상인을 통해 아편전쟁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무조건 쇄국을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서유럽-미국 세력에 대해 조금 더 현실적인 안목을 가지려고 시도했다. 이런 변화의 일환으로서 신수급여령薪水給與令이 시행되었다. 이것은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외국의 함대를 공격하는 대신 물과 연료를 내어주는 것을 허가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개항은 아니었고, 막부는 오히려 에도 주변 해역은 방비를 강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다른 한편으로 막부 주변의 방비만 강화하는 것에 대한 불만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현재의 위기상황을 막부의 위기에서 일본 전체의 위기로 인식하는 관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두 가지를 암시한다. 하나는, 아이자와 세시사이의 국체론의 연장선상에서, 일본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사고관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쇄국을 유지하던 청나라의 패배를 보면서, 더 이상 쇄국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일본을 지킬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을 뜻한다.

 

3.2. 양이를 위한 개방 : 친막부형 존황양이론과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이런 전환을 잘 보여주는 인물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다. 그는 주자학자였고, 그 때문에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쇄국과 체제유지를 주장했다. 하지만 주자학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분야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학문분야에 관심을 보였으며, 그 가운데는 서양의 학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개항 직전에 자신의 눈으로 서양의 군함을 직접 목격한 뒤, ‘서양의 것을 배워 서양을 공격하자.’는 견해를 갖게 된다.

그가 내세우는 목표는 간단하게 말해 동양도덕, 서양예술의 공존이다. 여전히 천하의 보편적인 원리로서는 주자학의 견해를 취했지만, 그것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는 철저하게 힘과 세력에 의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주장하는 힘이란 곧 군사력이었다. 이러한 군사력이 앞선다는 것은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는 서유럽-미국 열강들의 국지적인 도발과 분쟁, 그리고 더 크게는 아편전쟁에서 너무도 여실히 증명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입장을 토대로, 그는 군사기술의 도입과 학습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수입하는 이유는 우리의 정신적인 가치관과 체계를 지켜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실제로 막부로부터 해양 방어의 임무를 부여받은 마츠다이松代번의 번주 밑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해양방어를 위한 여덟 가지 대책(海防八策)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서양으로의 자원유출을 막고, 서양의 해양군사기술을 배워 우리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전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일본은 결코 청나라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되었다.

또한 이런 기술 학습에 필요한 여러 제반 조건들도 같이 체득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특히 서양 국가의 언어를 학습하는 것과, 기술과 관련된 책을 번역해 출판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실제로 여러 나라의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실제로 출판 사업에 뛰어들어 이런 기술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양이, 즉 오랑캐를 쫓아내고 일본의 전통을 수호한다는 인식 아래에서 이루어진 발언일 뿐, 서양사상에 대한 전면적인 수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특히나 사쿠마 쇼잔의 경우, 군사 기술에 대한 이런 열렬한 관심에 비해서, 정치나 사회사상 등에는 문외한이거나 관심이 없었음을 고려할 때는 더욱 그 목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4. 두 번째 분기점, 개항과 반응의 분화

 

하지만 이런 구상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개항을 요구하고, 1854년 막부가 굴복함에 따라 그 방향을 달리 전개하게 된다. 앞에서 사쿠마 쇼잔이 제시했던 바와는 달리, 막부는 개항이라는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강제로 개항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받아들여야 할 것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을 고르는 선택권이 일본에게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음을 뜻한다. 자의든 타의든 일본은 세계를 향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개방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개항은 이전까지 제한적으로 수용되거나 몇몇 지식인층에서만 받아들여지던 근대적인 문물이 본격적으로 일본 안으로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불평등조약을 통해서 세계적인 규모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편입되었고, 강대국들의 시장으로 변해갔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인들의 지적인 생활 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의 경제 전반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다 주었고, 일본인들의 삶 전체를 커다랗게 바꿔놓았다. 따라서 개항은 매우 신선한 사건이며, 동시에 충격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이후의 추이를 면밀히 지켜보았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문제가 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막부의 지위와 권한, 역할에 대한 문제였다.

 

4.1. 개항과 막부의 위치

 

개항 직전에 막부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막부의 실세였던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개항을 전후한 대외정책을 어떻게 전개해야할지 각 지역 다이묘大名들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리고 조정에도 이것을 보고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막부가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막부가 해야할 책임을 전가하고 소임을 다 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 또한 여러 다이묘들이 막부측에서 정책자문을 구해온 것을 계기로 막부와 동등한 정치적 위상을 차지하려고 시도하였으며, 또한 천황이라는 새로운 정치주체가 사회에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막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회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개항 전후에 보여진 막부의 무능력에 대해 비판하며, 조정을 보필한다는 막부의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되물었다. 또한 막부가 자신들의 보위에만 급급할 뿐 지방의 번들에게는 아무런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런 지방의 번들은 열강들의 도발에 수시로 노출되어 있었고, 크고 작은 분쟁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 바닷가에 있어 열강 군대와 자주 접촉하는 사쓰마薩摩, 조슈長州, 도사土佐, 히젠肥前번의 불만이 높았다. 또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막부의 중앙관직에 참여할 수 없는 지역인 도자마번外樣藩들이었다. 도자마번들의 불만은 막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축적이 되어 왔으며, 따라서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운동은 곧바로 반막부 운동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이 바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이 곳에서 등장한다.

 

4.2. 메이지 유신의 사상 : 반막부형 존황양이론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완연한 모습은 아니지만,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해주는 사상적인 기반을 제공해준 이는 요시다 쇼인이다. 그는 사쿠마 쇼잔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또한 그와 정치적인 행보를 거의 같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그도 막번체제 자체는 옹호하면서, 군사기술 등의 실용적인 서양의 학문분야를 받아들이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현재 존재하는 정치주체 가운데 일본의 인민들을 가장 잘 결합시킬 수 있는 상징으로서 천황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천황제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국민통합을 위한 사상적인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입장은 막부가 천황의 칙허 없이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1854년을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 사건을 조정의 허락이 있어야 될 사항을 막부가 마음대로 결정한 월권행위라고 간주하였다. , 다시 말해 천황을 제쳐놓고 막부가 일본의 군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세계관에서 통용되는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였으며, 따라서 천황으로부터 부여받은 정이대장군이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 막부가 막부일 수 있는 이유는 그 뒤에 배경으로서 조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부는 더 이상 이런 역할을 자임하지 않으려 하고,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정치에 관여할 자격조차 사라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막부는 조정을 받들어 가장 열렬히 서양세력에 대해 저항하고 일본을 지켜야 될 위치에 서있는 정치주체임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화친조약을 맺었다는 것은 그들과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바로 요시다 쇼인, 그리고 그를 포함한 많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막부가 실망감을 안겨줄 수 밖에 없었던 지점이다.

또한, 막부의 존폐를 거론한다는 것이 서양세력을 쫓아낸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전에는 성리학 체계를 수호하는 한에서 서양세력에 대해 생각하고 바라보았다. 따라서 천황과 막부와 다이묘, 그리고 사농공상의 계급이 확실하게 나누어져 있는 봉건적인 신분질서 또한 수호해야 할 요소였다. 하지만 요시다 쇼인에 와서는 진정한 존황尊皇, 즉 천황 중심의 정치체제를 꿈꾸는 것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쇼인이 직접 그 체계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쇼인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서 충분히 도출될 수 있는 사고관이다.

 

5. 세 번째 분기점, 메이지 유신과 사상의 전환

 

위에서 언급한 도자마번을 중심으로 전개된 토막운동은 막부의 잇따른 실책과 서양세력의 침략 앞에서 보여주는 무력함 때문에 큰 지지를 얻었다. 결국 이들 번은 사카모토 료마를 매개로 동맹을 맺고 막부를 압박, 막부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한다. 유신세력은 천황에게 접근하여 측근 자리를 장악하고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막부의 영지와 정이대장군 관직을 몰수하고 천황이 직접 정치에 관여할 것을 선언하는데, 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이렇게 막부를 해체시키고 난 뒤, 천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행된 개혁들은 근대적인 성격을 띈다. 판적봉환版籍奉還을 통해 각 번주들의 토지를 모두 천황에게 귀속시켰고, 폐번치현廢藩置縣을 통해 일본 전체의 행정을 장악하였다. 이 두 개혁은 각 지역의 봉건적인 토지소유를 없애고,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로 나아갔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징병제 실시, 사족士族의 특권 폐지, 신분에 따른 혼인관계 제안 폐지 등을 추진하였고, 모든 평민에게 성을 사용하도록 허용하였다. 이런 것들은 봉건적인 신분질서를 깨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의 형태가 고대 율령제에서 모티브를 얻은 중앙집권적 체계였을 뿐만 아니라, 천황의 절대성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신성화시키려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근대로 이행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메이지 정부를 장악한 사람들 대부분이 하급 무사계급으로, 여전히 의식적으로는 봉건적 태도를 벗어버리지 못하였다. 또한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고 집회와 강연을 금지하는 등의 통제정책은 메이지 정부의 전제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5.1. 새로운 견해의 등장 :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새롭게 등장한 메이지 정부가 근대적인 모습과 전근대적인 모습이 혼재된 채 개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정 정도는 그들이 뿌리를 두고 있던 사상, 즉 변형된 국체론을 모태로 삼은 존황양이적인 사고관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논의를 넘어서서 서양을 대하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당시 지식인 사회의 과제로 떠올랐다. 바로 서양사상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자는 논의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조류를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이다. 그는 서양이 지금같이 강력해진 이유는 그들의 사상과 철학 때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정치적인 자유주의, 민족국가의 성립, 신분제 철폐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런 변혁을 위해서는 현재 국체國體로서 떠받들고 있는 주자학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서양의 사상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생존하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메이지 정부의 실세들과 회동하여 구체적인 미래 일본의 모습에 대해서 논하기도 하였다.

 

5.1.1. 후쿠자와 유키치와 계몽주의자들 : 메이로쿠샤明六社

 

이런 사상과 철학을 소개하기 위해, 그는 그의 경험을 직접 저술한 저서들을 지속적으로 출판하였다. 특히 그가 쓴 책인 西洋事情의 경우, 당대 지식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초기 저서에서는 서유럽-미국의 정치이론에서 보이는 이상적인 모델을 신뢰하였고, 그것이 구현되어야 온전히 근대적인 국가로 탈바꿈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의 저서 學問のすすめ은 시작 부분에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라고 천명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신분제를 비판하면서 거부하고 있다.

또한 이런 서양사상을 전문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인 메이로쿠샤明六社를 조직하고, 여기에서 월간 明六雜誌를 간행하여 메이로쿠샤의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꾸준히 발표하였다. 이 잡지는 매호 3000권이 넘게 발행되어, 당시 지식인층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메이로쿠샤의 회원들이 번역하고 출판하는 책은 일본의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책으로서 자리매김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신학문을 교육할 수 있는 상설 학교도 설립하였는데, 바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이다. 이 곳은 일본의 청년들 뿐만 아니라, 김옥균이나 유길준 등의 조선인 유학생들도 있었다. 이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국의 개화파를 사상적·물질적으로 지원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도 일정 정도 이상 관여하였다.

그가 주로 의지하고 있는 사상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영국의 민주주의 사상이었다. 민주주의 혁명으로서 가장 극적이고 또한 가능성 있는 혁명의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J.S.Mill자유론,대의정부론,공리주의등이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이것은 민주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인식의 기초가 되었다.

 

5.1.2. 군국주의자 후쿠자와 유키치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 본인은 강력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 강한 나머지, 근대적인 국가의 필수 조건인 대중에 의한 정부구성에는 유보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대중들에게 정치적인 권리를 쥐어주었을 경우, 국가가 정치적으로 분열하여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인민 전체에게 그런 권리를 쥐어줄 단계는 아니라는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일본에서 실시될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서유럽-미국 열강들이 아시아에서 부리는 횡포를 직접 목격하고, 그들이 세웠던 정치체제의 이상적 모델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된다. 대신 결국 국제정치는 힘이 지배의 원천이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이상을 좌절시키고 현실을 앞세우는 정치관을 보여준다. 평등하게 적용되는 줄 알았던 국제법이 결국에는 힘의 크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목격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원했던 조선의 혁명이 실패한 뒤에는, 동아시아 세계는 현재 국제정세에 주체적으로 적응할 수 없으므로 일본은 동아시아 세계를 탈피해 유럽의 반열에 들어야 한다는 주장, 즉 탈아론脫亞論를 전개하였다. 이것은 후에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한다.

 

5.2. 진정한 근대란 무엇인가? : 자유민권운동과 나카에 초민中江兆民

 

결국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서히 군국주의적인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은 당시의 국제정세가 미친 영향, 그리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많은 지식인들의 반응 등 여러 가지가 얽혀있다. 하지만 진정한 근대사상의 정점은, 바로 민주주의적인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메이지 유신은 근대에 미처 다다르지 못한 근대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미 하층민중계층을 중심으로 서서히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이것은 계몽사상의 확산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한, 유신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개혁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보통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진정한 근대국가라는 신념을 가진 지식인들은 당시 극심한 경제혼란 속에서 다른 세계를 열망하는 광범위한 하층민과 결합하였고, 변혁을 향한 또 다른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은 공식적인 요구사항으로서 등장하였고, 이 운동을 자유민권운동이라고 한다.

 

5.2.1. 자유민권운동의 시작

 

서양 사상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은, 메이지 유신 이후 자유민권운동에서도 이어졌다. 자유민권운동이란, 다름아닌 서양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정착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 사상의 정착이기도 하다. 또한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전제적인 성격을 점점 강하게 띄어가고 있던 메이지 정부에 대한 민중적인 대항이기도 했다.

자유민권운동은 메이지 7년 민선의원설립건백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 보통선거를 실시해 뽑은 인민의 대표로 의원을 구성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 자유민권운동은 당대에 실각한 정치인들과 결합했다는 점, 봉건적인 사고관을 다 버리지 못한 사족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민권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은, 그만큼 근대적인 사고관이 민중계층 및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진정한 혁명적 민주주의의 발상이 등장하고, 이것은 메이지 유신 전후 시기의 중대한 사상적 의의를 띈다고 할 수 있다.

 

5.2.2. 나카에 초민의 사상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은 이 운동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그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번역한 민약론民約論을 출판해 자유민권사상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이후 민권운동과 관련된 활발한 언론활동을 통해 자유민권사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으며, 자유·인민주권·사회계약설 등을 일본 내에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루소의 사회구성이론을 따라서, 모든 인간은 천부인권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서양의 사회계약론적 주장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사회계약론에서 주장하는 저항권 역시 일본의 인민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천황제를 위협하는 공화정을 지향한 것도 큰 특징이다. 따라서 그는 전제적인 메이지 정부에 크게 반대하였다.

이와 더불어서 민주주의적인 방법을 통해 이룰 세계의 평화에 대해서도 골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三醉人經綸問答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확고한 견해 못지 않게 세계평화에 대한 고민 또한 등장한다. 그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세 인물의 성격 배치(평화주의자, 중간, 호전적인 정복주의자)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칸트와 루소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과 세계평화에 대한 구상을 타인의 입을 빌려 설명하고, 그것에 대해 저서 내의 다른 두 청자에게 동의와 협조를 구한다. 그가 보여주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민주제를 실시하여 전쟁으로부터 벗어나고, 두 번째 군비를 축소하는 것이다. 또한 이 뒤에 국경 자체를 소멸시키고 평화상태로 발전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최고의 목적이다.

 

6. 결론을 대신하며 : 서양의 근대를 수용하는 일본의 독특함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살펴볼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본은 서양사상 수용에 매우 유연했다는 사실이다. 주자학적인 세계관에 대한 자신감에 넘쳐나서 쇄국을 단행했던 조선이나 한족이 아니면서도 중화주의에 물들어있어서 개혁에 실패한 청나라와는 달리, 근대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발빠르게 대처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이룩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거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주체적으로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가 되었고, 당당히 세계적인 열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일본과 비교해보았을 때, 중국은 어땠던가? 자문화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해 쇄국을 한 출발은 일본과 동일했다. 하지만 그들은 2번에 걸친 아편전쟁에서 수도를 공격당하는 수모를 겪고 나서야 그 태도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뀐 태도에 의해 진행한 개혁도 그저 군사기술을 받아들이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그나마도 자본의 부족과 낙후된 산업 등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지지부진했고, 관료들의 비개혁성과 부정부패는 여전히 심했다. 결국 개혁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급기야 변방 중에도 변방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에게 1894년 패하는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중국의 정부는 이때서야 단순히 군사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철학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강유위, 양계초 등을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대대적인 개혁법안을 입법하려 했지만, 이것은 결국 왕실의 사사로운 이득에 의해 좌절된다. 이들은 일본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한국은 어땠던가? 서양 세력이 처음 밀려들어올 당시, 지식인들에게서 가장 많은 호응을 얻었던 것은 가장 극렬한 문화적 보수주의, 위정척사세력이었다. 그들은 대원군의 집권에 환호하였고 쇄국정책에 지지를 보냈다. 동시대의 동아시아 3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자생적인 민중운동을 진압하였고,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살았다. 대원군의 실각 이후에는, 한국보다 한발 앞서 준비한 일본에게 땅을 전쟁터로 두 번이나 내어주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 3국에게 근대로 이행하는 이 시기는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타자를 어떻게 수용하고 그것에 대응할 것인가가 당대의 화두로 떠오른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그 시기에,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가 되었건 우연한 이유가 되었건 근대를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다소 유연하게 수용하였고 그것을 짧은 시간 안에 소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한국과 중국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일본의 근대화만이 가지고 있는 특질이다.

지금은 세계질서가 미국 중심의 일원적인 체제에서 다각적인 체제로 변화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 우리는 이 시기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전후의 일본의 변화양상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모범이 될 만한 것이다.

 

 

* 참고서적

 

박석순 외 3명 지음, 일본사, 서울 ;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장인성 지음, 메이지 유신 : 현대 일본의 출발점, 경기 ; 살림출판사, 2007

정형 지음,일본, 일본인, 일본문화, 서울 ; 다락원, 2004.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엮음, 근대일본사상사(연구공간 수유+너머일본근대사상팀 옮김), 서울 ; 소명출판, 2006

이마이 쥰(今井淳오자와 도미오(小澤富夫) 엮음, 논쟁을 통해 본 일본사상(한국일본사상사학회 옮김), 서울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1.

 

W.G.Beasley 지음, 일본근현대사(장인성 옮김), 서울 ; 을유문화사, 2004


 

























 

* 참고논문

 

김정호, 19세기 전반기 일본 양학파(洋學派)의 개혁·개방론 : 와타나베 카잔과 타카노 쵸에이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38집 제5, 200412, 한국정치학회

김채수, 근세 일본에서의 국체사상의 성립과 유교의 역할, 일본문화연구25, 20081, 동아시아일본학회

朴三憲, 幕末維新期의 대외위기론, 문화사학23, 20056, 한국문화사학회

朴薰, 德川末期 後期水戶學民衆觀 : 會澤安新論을 중심으로, 역사교육85, 20033, 역사교육연구회

박홍규, 나카에 쵸민(중강조민)의 평화이념 : 민주제·연방제·군비철폐론, 한국정치학회보, 39집 제5, 200512, 한국정치학회

송석원,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해방론(海防論)과 대 서양관 : 막말에 있어서의 양이를 윟나 개국의 정치사상, 한국정치학회보, 37집 제5, 200312, 한국정치학회

 

야가사키 히데노리, 근대일본정치사상에 나타난 이상과 현실 : 일본의 과오와 교훈, 국제정치논총, 44집 제2, 20046, 한국국제정치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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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화혁명 - 유럽의 패권을 가져온 세계관의 탄생
앨프리드 W. 크로스비 지음, 김병화 옮김 / 심산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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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양문화사 숙제>

 

 

세계관의 중요함

 

철학을 비롯해, 각 학문 분과에서 근대는 언제나 중요한 주제이다. 근대는 단순히 서기 1500년 이후의 시간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때로는 발전을 상징하고,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독특한 정치체제를 의미하기도 하며, 법칙과 논리적 설명으로 파악하는 역사연구방법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눈부신 과학적 발전의 성과가 압축되어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반면에 세계 전체에 가해진 폭력, 끝없는 자기부정과 동일화과정, 식민지화와 세계대전을 함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두 가지 과정이 동시에 일어났고, 그것이 어떤 특정한 하나의 세계관을 연역했을 때 나오는 두 결론이라는 점이다.

앨프리드 크로스비Alfred W. Crosby는 바로 이 근대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 잘 알려져있는 학자이다. 근대라는 독특한 세계 그리고 세계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에 천착하여 이와 관련된 많은 저서들을 펴냈다. 특히 생태제국주의같은 책은 1500년대 이후 유럽이 어떻게 전세계를 유럽화하였는지 면밀히 분석한 책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바 있다.

그가 쓴 수량화혁명역시 근대에 대해 다룬 책이다. 더 정확하게는, 근대라는 세계관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수량화와 시각화라는 작업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여러 분야에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원래 영어제목은 The Measure of Reality : Quantification and Western Society, 1250-1600 인데, 오히려 이 제목이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더 잘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실재Reality를 측정measure한다는 것이야말로, 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근대라는 세계관이 보여주는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특징적인 면모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재어, 보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이런 독특한 세계관이 우연한 사건들의 결합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지금과 같이 역사가 발전한 과정에 필연성이나 법칙같은 것을 부여하는 작업은, 아주 쉽게 인종주의적 편견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근대가 진행되는 과정 자체는 그런 폭력에 너무도 쉽게 노출이 되어 있었다. 이 과정 자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입장에 서있는 저자로서는, 그런 종류의 분석은 마땅히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저자는 여러 파편화된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결합하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 사건들은 우연히 결합했지만, 그 결합의 효과로서 나타난 여러 사태들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독특한 사고관의 출현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분석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철학 분야에서 이런 사고관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논의해야만 한다. 사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한 실재Reality라는 말은, 그것이 실제 세계를 지칭하기 이전에 철학적으로 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실제는 가상fiction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논의는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논의하던 바이다. 저자도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있는데, 따라서 그가 수량화를 다루면서 가장 앞에 배치한 것은 바로 실재에 대한 고대의 사고관, 즉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이다.

사실 근대의 핵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학문적 도구들은, 그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해있었다. 특히 수량화에 가장 중요한 학문인 수학의 경우에는, 기하학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이미 융성하였다. 르네상스 시기를 괜히 르네상스, 즉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로마 전통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다. 학문 역시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고대적인 전통이 부활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세계를 수량화시키는 다양한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중세 전통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실재를 가상과 구별하는 전통이다. 이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중세의 교부 철학과 스콜라 철학 모두가 공통되게 가지고 있는 특성이었다. 수학과 기하학은 서양의 역사 전체를 걸쳐서 학문의 전범으로서 추앙받았지만, 그것은 사고과정을 기술하는 체계였을 뿐이다. 사고의 세계와 감각의 세계를 구분하는 세계관에서 수학은 사고의 세계를 설명해주는 체계였을 뿐, 그것으로 감각의 세계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감각의 세계를 설명해주는 체계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고대와 중세는 수학과 물리학은 있었지만 수리물리학은 없었던 시대였다.

이런 사고관에서 출발해 세계를 질quality로서 이해하고 설명하던 시대의 세계관을 저자는 유서 깊은 모델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 유서 깊은 모델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계산하기 불편한 로마 숫자 표기법, 예언이 성취되는 메시아적 시간, 해마다 일치하지 않는 부활절 주간, 성경에 기초한 시대구분, 원운동을 완벽한 운동으로 간주하는 물리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여기에는 이 세계의 구성을 형상form과 질료matter의 결합으로 설명하며, 물체를 규정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이라고 이해하는 스콜라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설명법도 한몫 하고 있다.

유서 깊은 모델이 결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런 탄탄한 철학적인 토대와는 너무도 다른 현실적 세계가 출현하면서부터이다. 이 모델을 무너뜨린 것은 이런 사고관에 대해 매일 연구하고 깊이 고뇌하는 철학자들이 아니라, 금융업을 중심으로 성장한 도시부자들, 즉 우리가 후일 부르주아라고 부르게되는 신흥 상공업 부호들이다. 이들은 효율적인 작업과 극대화된 이익을 성취하기 위해 전혀 다른 세계관을 상정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근대적인 세계관의 토대가 되었다.

저자는 이 수량화의 과정이 가장 급진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이행되면서 사람들의 사고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부분을 시간공간에 대한 이해의 변화에서 찾고 있다. 상공업 부르주아들은 효율적인 노동을 위해 시간을 지속적으로 분절하기 시작했고, 이것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기계는 다름아닌 시계였다. 이것을 통해,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사람들은 시간을 메시아적 시간에서 균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런 변화가 농업 중심의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나타나기보다는, 상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짜여있었던 이탈리아 항구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로, ‘좌표화를 통해서 지도를 제작함에 따라 공간관이 바뀌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하지만 단순히 세계를 양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양으로 이해한 세계는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것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보고 따라해야 했다. 특히나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작업방법과 거래방법의 공유를 위해 노력했던 상공업 부르주아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전달할 수단을 마련하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이 모든 것들을 보여줄 수 있게 하는 것, 바로 수량화가 시각화로 이행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저자는 학문적이고 순수한 연구보다 오히려 복식부기가 진정한 세계관의 변화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악보를 적는 음악의 시각화나, 보이는대로 그림을 그리려는 원근법 도입보다도 훨씬 큰 파문을 일으켰는데, 이런 입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사실 당대의 학문적 논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거기에 비판이나 지지의 견해를 덧붙일 수 있을만큼 추상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복식부기는 그에 비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다시 말해 돈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복식부기에서 모든 것을 이익과 손해로 계산하는 방법은, 실제로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을 인간(자신)에게 돌아올 이익과 손해로 환원하는 사고관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그 때,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이런 저자의 작업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연구하고 서술하려는 주제에 맞게 다양한 분야의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배치하고 서술한다는 데 있다. 특히 지금 우리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에는 그 어떤 상관도 없어보이는 회계법과 회화의 원근법을 시각화라는 한 주제 아래 놓아둔 것은 당시에 이루어진 정신적 움직임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뒤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근대의 탄생이라는 아주 큰 주제로서 다분히 어려워질 수 있는 저술을 아주 평이하고 읽기 쉽게 써놓았다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료분석을 강조하고 우연적인 결합으로서의 근대의 탄생에 대해 역설하다보니, 이 과정에서 어떤 사고관이 등장하고 변화하였는지 좀 더 세밀한 서술이 없는 것은 이 책이 보여주는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수학은 어떤 시대에서든지 보편학문의 전범으로서 추앙받았고, 고대나 중세에도 여전히 그것은 실재Reality에 대한 학문이었다. 하지만 이 실재가 진짜 실제the real(?), 우리가 보는 현상적인 사물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분명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논쟁적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철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그저 비수학秘數學 추종자들의 산물이나 수학에 대해 호기심을 품었던 화가들의 산물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설득력은 높지만 그것에 비해 깊이는 조금 못미치는 내용이 아닐까.

오히려 유용한 세계관이 서서히 등장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철학적인 정당화도 필요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길고 지루하지만, 꼭 필요한 논쟁들로 채워져있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반대하고 중세적인 세계관을 고수하려는 사람에서부터, 각 학문과 예술의 최전선에서 이런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개발하려했던 사람들까지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양하다. 이것이 아무리 유용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당화시킬 수 없는 확고한 이론체계가 등장하지 않는 한 결국 이전과 마찬가지로 가상fiction을 다루기에 편한 쓸모있는 도구 정도로 전락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문화와의 비교가 없는 것도 문제이다. 이것은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가 지적하고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수량화와 시각화의 핵심은, 누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실재를 다루는 학문인 수학을 가상의 세계, 즉 감각의 세계로 끌어내린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사고-감각의 이원론에서 사고+감각의 일원론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관은 다른 문화권에도 존재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주자학의 경우 리라는 개념에 감각과 실재, 도덕과 자연의 세계를 통합시킴으로써 일원론적인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주자학자들에게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학문적 주제였다. 실제로 주자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송--명을 거친 시기의 중국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음을 동아시아의 과학의 역사가 입증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발전이 중도에 그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의 논의를 그대로 따라가보면 자연스레 이런 의문에 다다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단지 유럽에서 수량화와 시각화가 등장한 과정만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계관이 드러난 과정을 각 항목에서 분석해 내보여주는 것에는 아주 충실하지만, 왜 그런 세계관이 정당화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서술은 다소 부족한 감이 없지않다. 저자도 강조하듯이 수량화하고 시각화하는 세계관은 이 당시에도, 심지어 19세기가 밝아오는 당시에도 그 체계가 완전히 정립된 것은 아니었고, 지속적인 혼란의 시기였다. 하지만 그 혼란이란, 사람들이 부대끼는 세속의 삶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고도로 집약된 철학적 논의에서 오는 혼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논의의 과정을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근대의 탄생

 

하지만 어쩌면, 이런 논의에 대해 기술하는 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는 조금 뒤로 물러난 연구주제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런 철학적 논의들은 이미 세계가 바뀌고 난 뒤에 따라오는 정당화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논의는 이런 면모가 더욱 강하다. 따라서 이론적 논의 없이도, 구체적인 자료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근대의 탄생을 목격하고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특정한 사고관과 맞닿아있는 무엇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이 우연이건 필연이건 결국 근대는 그렇게 유럽에서 탄생했다. 그것은 고대적 사고관의 존속이었고 동시에 재해석이었으며, 중세적인 사고관에 대한 재해석이며 동시에 반대였다. 그리고 그 세계관이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정립되어갈 무렵, 유럽은 그것을 바탕으로 전세계를 향해 자기들의 손을 뻗어나갈 수 있었다. 그들이 현재까지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떤 물질적 성과물이 월등하거나 혹은 차별될 뿐만 아니라, 그런 물질적 세계를 창출해내는 세계관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주입하고 감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탄생을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유럽)에 대한 연구일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어떤 사고를 하면서 살아가는지에 대한 좋은 연구가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근대적 사고관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작지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철학적 논의가 없는 다소간의 단점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마치 (이 책에서 설명하듯이) 메르카토르 작도법이 평면에 육지를 그리는 과정에서 생기는 왜곡과 비슷한 형태의, 현실과는 멀어지더라도 매우 쓸모있는 종류의 단순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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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신서 377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윤형숙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009년 개항기 한국 사회와 문화 숙제>

 

 

한국의 민족주의는 문제다. 건드리기 힘들다. 여기에 대해서 비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한다. 특히나 국가가 주도하여 민족이라는 개념을 가르치는 면모를 많이 보이기 때문에, 한국 안에 사는 사람들은 민족을 벗어난 삶을 상상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TV가 시작하고 끝날 때 꼭 애국가가 나온다. 어찌되었든 여러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와 관련을 짓는 사건이 한 해에 꼭 두어 건씩은 벌어진다.

하지만 민족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만큼, 민족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해보았는가 되묻는 일은 잘 벌어지지 않는다. 한민족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정의내릴 것인가? 한민족보다 상위개념인 민족은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이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각도로 접근했는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얼마나 질문을 했는가. 이런 질문에 명확히 답을 내릴 수 없다면,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 자리잡은 민족주의에 대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주의를 분석한 유명한 책이다. 그가 유지하는 관점은, 민족을 사회적인 실재라는 주장이다. , 민족주의의 틀 내에서 민족을 초역사적이고 근원적으로 보는 것과 달리,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은 어떤 개념이라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어떤 개념이 어떻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되었는가를 구체적인 사례 속에서 분석한 뒤 보여준다.

그가 남긴 이런 분석이 한국을 규정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베네딕트 앤더슨은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살펴보고 적절한 결론을 내리는 데 좋은 분석의 틀을 제공해줄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한국은 민족주의적으로 민족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과 반대되는 관점에서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크나큰 충격이 될 것이다. 또한 다른 세계의 국가들이 민족주의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의 민족주의가 구축되는 과정을 돌아보는 것도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우선, 베네딕트 앤더슨이 민족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표하는 두 나라,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 사이에도 엄청난 다툼이 있었다. 이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 틀 안에서는, 모든 사회주의 국가가 계급해방을 위해서 연대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경제적인 사상 밖에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분석의 틀이 있어야만 이런 사건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틀은 바로 민족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근대 이후에 등장하였다. 따라서 기존에는 민족을 근대의 산물로 파악하고, 근대화와 함께 이 과정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앤더슨은 민족을 단절적인 변화로 이해하지 않고, 기존에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어떤 공동체 의식의 양상이 변한 것이라고 파악한다. 역사적인 사건과 사람들의 변화한 세계관이 우연히 결합해 양상의 변화를 만들어냈다.

근대 이전에는 종교 공동체가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맺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공통된 경전을 익혔기 때문에 문자언어로서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둘째, 성지를 중심으로 짜여진 지역별 위계 때문이다. 종교공동체의 구성원은 성지를 여행하는 경험을 통해 거쳐가는 모든 곳, 그리고 성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원래 살았던 영역 모두를 성지를 중심으로 한 단일한 공동체의 소속 지역으로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종교적인 의례에서 보여지는 현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예언된 사건의 이미지이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동일한 이야기 구조의 재생을 경험하고, 이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동일한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직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과학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발달, 해양 진출 등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 종교 경전에서 말하는 세계가 실제로 이루어진 세계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종교적인 세계 안에서 인간은 수직적으로는 초월적인 존재와 맺는 관계속에서만 시간에 의미가 주어지기 때문에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 또한 수평적으로는 초월적인 존재과 맺는 각각의 인간들이 초월적인 실재를 재현해내고 있으므로 재현의 시간이다. 반대로 근대적인 세계에서는 자신과 다른 공간의 사람들과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시간이 수평적으로 같다. 또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확실하게 나누어진다고 믿고,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기 때문에 시간은 수직적으로 진행의 시간이다.

또한 전근대적인 공간은 정치적으로 진공이거나 회색지대인 곳이 훨씬 많았다. 권력은 봉건영주들에게 분권화되어있고, 그들의 힘이 미치는 곳은 성 안쪽이 전부였다. 반대로 근대적인 공간은 실제로 보이지는 않지만 분절적이다. 경도와 위도가 그렇고, 국경이 그렇다. 국경선이 그려진 안쪽은 정치적인 영향이 미쳐야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그 크기는 국가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상태에서 민족의 출현은, 사실 많은 우연이 겹친 것이다. 그 누구도 민족에 대해서 고의적으로 말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다. 출판업자, 유럽 열강 정부, 소설가, 신문은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공간과 시간의 변화는 이것을 체험할 수 있는 몇몇 지식인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작업이 합쳐져서 우연히 공동체의식을 형성하였고, 이것은 과거의 어떤 공동체의식과도 그 양상이 달랐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태어난 민족주의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남아메리카의 식민지 관료들에서부터 시작된 식민지 민족주의이다. 앤더슨의 관점은, 대개 유럽을 출발지로 보는 민족주의에 대한 널리 퍼진 관념과는 다르다. 저자 본인도 이 부분을 강조한하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민족주의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이 보이는 장소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관료들의 의식 속이다. 식민지 출신인 사람들은 본국의 정책에 의해 의도적으로 차별을 당했다. 이것은 식민지 출신 백인들 사이에서 어떤 괴리감을 느끼게 하였다. 자신은 분명히 본국과 언어, 문화, 세계관 등을 공유하고 있고 혈통으로도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본국으로 진출할 수 없다는 이상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또한 식민지 출신 백인들은 본국에서 지정해준 행정구역 내에서만 관리에 임명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마치 종교공동체에서 순례를 통해 공간적 공동체성을 확보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식민지 출신 백인들은 봉건 영주나 그 밑에서 일하는 가신이 아니라 관료이기 때문에, 발령지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자신이 움직이는 그 한계가 곧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한계라고 여긴 것이다.

이것이 곧 자신들을 독립된 공동체로 규정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이전에 존재하던 어떤 공동체와도 다른 것이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이는 민족을 앞세운 아메리카 각 국가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관료 시절 움직이던 한계가 곧 공동체의 경계로 인식되었고, 아메리카 전체의 통합된 독립은 이뤄질 수 없었다.

둘째는 유럽의 대중민족주의이다. 이 민족주의는 시기상 아메리카 식민지보다 뒤쳐진다는 점에서, 식민지의 민족주의에 다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중요한 요소는 출판산업이다. 출판을 위해 선택해야 하는 활자언어의 문제가 출판산업 종사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대두되었고, 그것이 민족언어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에만 하더라도 각 지역에는 엄청나게 많은 지방언어들이 있었다. 출판산업 종사자들은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서 지방언어를 택해야 했지만, 여기에서 지방언어의 개수와 생산의 효율성을 저울질해야하는 난관에 봉착한다. 여기에서 택한 방법이, 몇몇 활자를 표준어로 삼아 인쇄할 때 쓰고, 각 지방언어를 표준어에 맞게 통일하는 방식이다. 표준어는 그 지역의 민족어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마치 종교공동체에서 경전의 언어가 소통의 도구가 되었듯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 민족어가 소통의 도구가 되었다. 또한 이 민족어를 쓰는 사람 모두가 한 민족으로 간주되었다.

셋째는 후발근대화국가들의 관주도 민족주의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와 달리, 관주도 민족주의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교육을 통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주입하는 민족국가 생성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전의 민족주의의 경우에는 기존에 마련된 문화적, 사회적 기반 위에 생성된 우연한 효과였을 뿐이다.

앤더슨은 관주도 민족주의를 공동체 내의 평등한 형제애라는 민족주의적 사고관에 대한 집권층의 반동이라고 규정한다. , 민족주의는 내부적으로 모두 다 같은 인격으로서 취급받아야 하는데, 이런 입장을 도입하면 왕정의 정치적인 정당성이나 존속에 매우 위태롭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각 왕정들은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왕정은 자신을 민족의 대표자로 상정하고, 그리고 대변해줄 수 있는 대상들로서 인민들을 포섭한 후 한 민족으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예로부터 고유하게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는 민족의 특성을, 지금까지 그 땅에 존재해왔고 지배세력으로 군림한 여러 왕조들을 민족의 역사에 편입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정당화한다. 이는 물론 역사를 어느 정도 조작한 결과이다. 각 왕조 간의 단절성보다는 연속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는 옛날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역사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관주도 민족주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더욱 긴요하게 이용된다. 식민지 현지 엘리트들은, 지배국가 관료가 되는 과정에서 민족 개념을 확립하게 된 그들의 역사를 배운다. 바로 이것이 직접적인 침략의 체험과 함께 식민지에 민족주의를 유포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현지 엘리트들은 지배국가가 민족국가로 변화한 과정과 똑같이 조국을 독립국가로 만들려 노력한다. 그래서 식민지의 민족운동은 현지 엘리트인 소수 상류층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아래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개념으로 확립된 민족은 항상 과거에 의존하여 자신을 규정하는 특성을 지닌다. 그것은 민족이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어떤 것으로서 상상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족에 기대어 기존 정부를 전복하고 들어선 새로운 정부가 여전히 과거를 답습하는, 근대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먼 이상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예전 정부에서 확보해놓았던 모든 물질적인 토대들을 흡수함으로써, 이전 체제와 다를 것이 없는 통치기구로 자리잡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 정치체제와는 다른 큰 차이가 있다. 민족국가는 단순히 물적인 토대를 흡수하여 그것을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것은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십분 활용한다. 그것은 곧 현재 들어선 정부의 정통성을 사람들에게 표명하는 것과 꼭 같은 작업이 된다. 민족이 있는 한, 이런 현상은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앤더슨이 제기하는 민족에 대한 구성적 관점은, 구성적이라는 면에서 그 자체로 높은 설득력을 지닌다. 어떤 사회-정치-경제 이론도 민족에 대해서 확실한 규정을 내리려 했으나 실패했다. 특히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은 항상 민족문제를 안고 매달려야했다. 민족이 어떤 면에서든 본질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구성적이라고 규정하면, 많은 상황을 탄력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 같은 민족주의라도 전혀 양상이 다른 유럽의 민족주의와 식민지의 민족주의, 그리고 식민지 사이에서도 아메리카의 민족주의와 아시아의 민족주의를 모두 설득력있게 기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각종 민족주의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 사회들 가운데서 민족이라는 개념, 민족주의라는 관념이 어떻게 자리잡았는가 차분히 보여주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런 다양한 민족주의의 사례를 보여주고 그것을 단일하지만은 않은 몇몇 유형으로 구체화시키는 것 자체가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또한, 이 과정에서 민족에 대한 고찰의 한계가 드러난다. 사실 민족은, 어떤 식으로 정의해도 자기 스스로 정의되지 않으며, 언제나 타자성을 담고 있다. , 타자가 없이는 자신도 정의될 수 없고,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아닌 남의 존재를 필요로이는 역설적으로 앤더슨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열거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식민지 독립을 위해 일했던 백인들은, 정책적으로 자신을 차별하는 사람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신을 공동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유럽 본국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벌이는 열강 간의 세력다툼의 과정에서 민족주의를 구체화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발생기원을 명확하게 추적할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명확한 정의를 내리려고 노력해보지만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우연한 효과에 의해 만들어진 뒤에 의도적으로 추진된 관주도 민족주의의 경우는 타자에 대한 우리의 성격이 더욱 명확하다. 저들도 하니 우리도 뒤질 수 없다는, 단순하지만 설명은 힘든 도식인 셈이다.

결국 민족주의에 대한 개념화는 맥락에 따라 문화적으로 유형화시키는 앤더슨 식의 성과 또는 한계에 다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유형화 이상의 명확한 규정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것 자체가 개념화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다.

더군다나 식민지 관료들이 아니라 현지 엘리트들이 민족주의의 주체로 등장한 아시아의 민족주의 같은 경우에는, 타자를 반드시 거쳐야만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도 그렇다. 일본을 비롯한 유럽-미국의 열강이 침입하기 전까지, 근대적인 민족에 대한 개념은 없었다. 또 당대 지식인들은 자신을 상대화할 다른 대등한 공동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민족주의적인 의식이 싹트는 것은 열강을 눈으로 본 사람들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되자 그들이 아닌 우리로서 정립되었다.

또한 뒤늦게 열강의 대열에 끼어든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아시아적인 상황은 앤더슨의 틀에서도 약간 벗어나는 유형이기도 하다. 이것은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아시아 민족국가라는 일본의 특이한 위치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이전에 같은 종교공동체였던 상태에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지배를 당했다는 급속한 당시의 국제정세와 한국의 상황이 더 큰 원인이다.

아주 결정적인 차이는, 현지 엘리트들의 지배국가에 대한 태도이다. 일본은 마치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 펴는 정책처럼, 조선에도 식민통치 기구를 두었으며 현지 엘리트들을 관료로 양성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폈다. 하지만 조선과 일본 사이는, 유럽 열강과 아프리카 식민지 만큼의 인종적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반감이 적다. 조선의 현지 엘리트들은 민족적 계몽을 꿈꾸기도 하지만 이를 위해서 제국주의 일본과의 완전한 일체를 꿈꾸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이 같은 사고관에서 연역된 결론이라는 점이다. , 완벽한 타자화에 실패하고 이에 동화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민족주의의 확산 못지 않게 근대화라는 과제가 더 중요하게 걸려있었다. 어느 것을 우선으로 삼을것이냐 논쟁하는 과정에서 결국 매듭을 짓지 못하고, 민족주의의 대표로 자리매김한 대다수 지식인들은 일본의 근대화정책에 손을 들어주었다. 내선일체라는 거대한 근대화 목표에도 동참하였다. 이를 홍보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했다. 이것은 앤더슨의 어떤 유형으로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이는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연결된다. 해방 이후에 전개되는 민족주의의 확산은, 앤더슨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전형적인 관주도 민족주의의 형태를 띈다. 보통교육을 확산시키고, 이를 통해 민족이라는 의식을 확고하게 자리잡게끔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민족주의적 변신은 경제개발이라는 목표에 성취하기 좋은 그만큼까지만 고양되었다. 박정희는 한민족이라는 개념을 확산시키고 민족구성원들을 집결시킨 민족주의자이지만, 동시에 그보다 더한 근대화지상주의자였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전히 한국에서는 민족주의가 화두이다. 민족을 건드리는 자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한국어로 번역된 상상의 공동체에는 2002년 한일 양국 월드컵 당시의 응원단 사진이 붙어있다. 이것은 민족을 건드려서 웃은 사례이다. 하지만 한일전에 광분하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응원을 광기라고 몰아붙인 사람들은 민족을 건드렸다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만큼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민족과 항상 얽혀서 살아간다.

그래서 민족에 대한 고찰은 언제나 필요하다. 민족에 대한 분석의 틀 가운데 앤더슨이 제시하는 방법은 구성주의적이라는 면에서 설득력이 있다. 민족은 여러 가지 현상이 우연적으로 결합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 작용을 통해 사람들을 규정하고, 정의해주었으며, 기존에 있던 공동체의식을 대체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을 얼마간 지속되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민족을 스스로 정의하는 일는, 그 개념이 타자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결정적인 한계에 직면한다. 비유하자면, 민족은 내면으로부터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치는 자기자신을 정의하는 것이 그 출발이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앤더슨은 유럽-미국 열강과 직접 대면한 국가만을 분석한 유형화는 성공했지만, 일본이라는 독특한 경우가 포착되지 않았다. 물론 일본 스스로는 미국과 대면했기에 일본의 관주도 민족주의를 분석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일본이 지배한 국가들에서 어떻게 민족주의가 생겨났는지를 살펴보는데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분석의 힘은 유효하며, 현재 확산되어있는 민족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앤더슨을 뛰어넘어, 민족에 대해 더욱 뜨겁게 생각해보아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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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 - 조선 지식인 유길준, 서양을 번역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8
유길준 지음, 허경진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10월
평점 :
일시품절


<2009년 개항기 한국사회와 문화 숙제>

 

여행

 

그는 여행을 떠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기간 동안. 그가 갈 곳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 그저 내가 살던 곳에 들어온 몇몇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 지금껏 내가 배운 책에서도 자주 볼 수 없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그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눈에 담아 그려내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공부한 것들을 이용해 이것저것 짜맞추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는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공적으로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외교사절이라는 임무를 띄고,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안은 채 멀고 먼 바다를 건너, 책으로도 보기 힘들었던 그곳에 다다랐다.

이 여행이 없었다면,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도 서양을 소개하는 책은 여러 권이 있었다. 이미 유럽-미국 열강에 한번 크게 데인 청나라에서 출판된 위원魏源해국도지海國圖志, 일본의 서유견문쯤 되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서양사정西洋事情같은 책들이 그렇다. 이 외에도 많은 책들이 청나라, 도쿠가와 막부 치하에서 발행되었을 것이고, 학문적으로 같은 시대와 경향 아래 놓여있던 조선의 지식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서적을 수입해 접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에서 시작한 유럽과 미국에 대한 반응은, 청나라와 도쿠가와 막부, 그리고 조선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처음엔 자국의 정체성과 전통을 지키자고 이야기하는 복고주의적인 세력이 등장해, 교류 단절과 쇄국, 그리고 양이洋夷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청나라의 황실과 몇몇 지식인들이 그렇고, 조선의 조정과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유학자들이 그렇고, 일본 내에서 국체론國體論을 주장한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그랬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정치적으로 얼마 안가서 그 기반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는데, 세 정부 모두 강제로 개항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 무리의 지식인들은, 이미 이루어진 개항을 물릴 수는 없으니, 개항과 교류라는 조건을 끌어안고서 펼칠 미래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그들의 정치체제와 사고방식 전면을 수용하여 소화하려는, 이른바 개화開化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살펴볼 때, 유길준이 떠난 여행은 단순히 공적인 면모나, 개인의 호기심에 충만한 여행은 아니었다. 이런 조건을 딛고, 자신이 생각한 최선의 지적 판단에 따라 떠난 지식의 여행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에는, 책으로만 읽고 국내에서 그 일부의 행각만 보던 책상물림에서 벗어나,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생기있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있다.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전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조선의 언어로 풀어내 자신이 받았던 인지적인 충격을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달하려고 했던 마음. 유길준은 아마 이 책을 쓰면서, 바로 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늘어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서양을 전달하려는 의도 이상의 것이 들어있는 것이다.

 

백과사전의 배치

 

하지만, 자신도 처음 보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하니, 무엇을 어떻게 전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책으로 보고 그것에 대해 머릿속에 어떤 형태로 그리고 있었어도, 그것이 눈앞에 현현하는 순간에 받는 충격은 이루 말로 다 할수 없었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어떤 것은 전해주고 어떤 것은 전해주지 않아야 할지, 어떤 것은 좋다고 하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할지, 어떤 것은 이런 점이 좋은데 이런 점은 나쁘다고 할지. 아무리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도 이것을 그 짧은 시간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유길준은 다 쓰기로 마음먹는다. 이것은 당시에 간행된 서양을 소개하는 서적들이 많이들 쓰는 방식이기도 했겠지만, 그것보다도 유길준 개인의 욕심이나 포부가 더 많이 작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지식인의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될 식사예절이라든가, 아이 키우는 방법 따위의 글을 쓸 까닭이 없다. 이런 항목들은, 사실상 우리가 서양의 문물이라고 부르는 것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스무 편 가운데 몇 편을 차지하고, 정치나 사상 같은 항목과 같은 수준의 취급을 받는다. 분류에 있어서, 같은 위상인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서유견문은, 그래서 백과사전이다. 책 하나에 자기가 보고 들은 것 모두를 담고자 하는 유길준의 기획이 담겨있는 것이다. 물론 유길준 개인의 관심사가 묻어나는 부분들은 그 분량이 매우 많고, 자세하다. 특히 유교적 우환의식憂患意識과 관련된 민생, 정치적 안정에 대한 내용은 그 자체로 한 편씩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분류와 항목화에 있어서 생활 습관이나 의례같은 것이 정치, 사상, 경제와 같은 위치에 놓여있는 것, 그리고 그 내용도 그렇게 허투루 적힌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이 백과사전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크게 보여준다.

이런 가운데서도 정치, 사회, 경제적인 것이 책 전체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은, 유길준이 선택한 일종의 전략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피상적으로만 알려져 있었을 개인의 자유(4), 만국공법에 기초한 국제질서(3), 사회계약론을 기반으로 한 정부구성이론(5), 시장을 중심으로 운용되는 자유주의(자본주의) 경제체제(4), 개인의 정치-경제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법제적 구성(6), 강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한 조세제도(7, 8) 등은 그 자체에 대한 내용으로만 한 편씩 차지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앞쪽에 배치되어 있기도 하다.

게다가 단순한 소개와 분석의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도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는 것, 어떤 조세제도가 좋으며 어떤 것은 좋지 않은지에 대한 유길준의 견해도 다소 강력하게 표명되어있다. 현재 근대화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있는 우리의 눈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당시에 개화파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던 유길준에게는 무엇보다도 이런 면이 빨리 소개되는 것을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제도가 하루빨리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이런 형태로 변화하는 것만이 국제사회에 적절한 위상으로 편입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묻어나온다.

 

정치와 전략적 글쓰기

 

유길준이 변화의 모델로 제시한 근대적 정치체제는, 크게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천부인권으로서 보장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이다. 이것은 근대적 정치체제의 가장 특징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요소로서, 이것을 부정하면서 결코 변화를 이룰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둘째는 사회계약론적인 정부구성이론이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각각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할애하여 정부에게 권리를 부여한다는 입장이다. 셋째는 법에 의한 지배이다. 이것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자의적인 요소에 구애받지 않는,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정치체제이다. 넷째는, 이렇게 성립된 정부들을 지배하는 만국공법적인 국제질서이다.

특기할만한 것은, 발생적인 순서로 따졌을 때는 가장 뒤에 나와야 할 만국공법 질서에 대한 설명이 순서상으로는 가장 앞에(3) 나온다는 점이다. 유길준이 전략적 글쓰기를 수행한다는 점이 이 대목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내용은, 서유견문을 쓰던 당시에 가장 조선에게 필요한 내용이었다. 바로,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조공을 바치던 청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성립하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있는 내용인 것이다. , 조공을 바치는 것이 독립국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지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독립국가이긴 하지만 조공을 주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 묻는 것이다.

유길준은 이에 대해서 본국-속국의 관계와 수공국(공물을 받는 나라)-증공국(공물을 주는 나라)의 관계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본국-속국은 속국이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고, 본국으로부터 총독이 파견되며, 경찰이나 의회의 결정권 등등이 모두 본국에 비해 하위인 나라를 뜻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식민지 상태에 있는 국가의 상태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인 것이다. 반대로 수공국-증공국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두 나라는 실제로 독립국이며, 서로에게 국가의 권리를 침해할만한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또한 사법권 또한 각국 정부에 있으며, 정부 역시 부속기관이 아니라 서로 따로 세운 정부라는 것이다. 이것이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던 관계이며, 따라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또한 유길준은 공물을 주는 것은 외교적 의례 혹은 자신이 당장 급한 위험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속국임을 증명하는 표식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만큼이나 중요한 점은, 이런 이야기하는 근거로서 만국공법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이전에도 조선은 독립국이라고 하는 주장은 있었다. 특히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에 의해 정부가 세워지자, 의식적으로 명나라를 추모하며 자신들이 그 적통을 이었다고 생각하는 소중화의식이 퍼져있었다. 이런 기반에서도 물론 조선은 청나라에 대해서 독립국이다. 하지만 유길준은 이런 의식에서 벗어나, 국가를 기반으로 한 근대적인 국제정치질서를 수용하고 있었다. 이것이 지금 시대를 규정하고, 또한 조선이 적응해야 할 체계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제대로 국가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인민의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유길준의 생각인 듯하다. 만국공법에 대한 설명 뒤에 국가내부의 개혁에 대한 기획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유재산과 행위, 집회, 종교, 언론의 자유 등을 포함한 인간의 자연권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 자유로운 행위 사이의 경쟁을 통한 경제, 정치적 발전, 경쟁사회 안에서는 개인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과 연결된다는 자본주의적인 발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 이런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목적이고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근대적인 정부의 목표에 대한 인식이 보인다. 그리고 이런 정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조세제도를 포함한 일련의 법체계, 그리고 이를 통해 강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 시행하는 군제개편과 교육제도, 경찰, 정당제도에 대한 소개가 등장한다.

이처럼 서유견문의 전반부는 유길준의 사유의 순서에 따라 전개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 서양에 대해 묻고, 권하는 것이다.

 

담담한 서술의 전략

 

책의 후반부에는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은 항목에 대한 사전적인 소개로 채워져있다. , 생존에 직접 필요하지는 않지만 서양에 대한 정보로서 유익하고 또 필요한 것들을 계속 나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조선의 전통에 대비되는 서양의 학문적 전통과 그 분류, 그리고 조선의 예법과 다른 서양의 예식과 행사, 그리고 조선에서만 살고 있다면 보기 힘든 여러 풍경들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때에는 개항에 긍정적인 의식을 가진 지식인이 아니라면 이런 풍경을 이렇게 담담하게 그려내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조선을 침략하고 정복하러 온 사람이라는 의식이 명확해진 시기였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한 뒤에, 경제적으로 점점 일본과 유럽-미국 세력에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었고, 압도적으로 앞서있던 산업화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의 산업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산업화를 이룬 국가들은 조선에서 막대한 이윤을 챙겨가지만, 이것은 결코 조선의, 더 정확히는 조선 민중의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곧장 전국적인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지식인들은 척사를 내세워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려 했고, 민중들은 농민전쟁 시기에 동학이 서학에 반대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호응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유길준의 필치는 더욱 돋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후반부에는 건의나 변화에 대한 강력한 변화의 열의가 엿보이는 전반부와는 다르게, 변화에 대한 어떤 의견을 피력하는 부분이 수그러들거나 줄어드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이런 모습에 대해 부정적이었거나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술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어떤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저 이런 면모도 있다는 것을 기술하고, 그것에 대해 가치판단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객관적인 태도는,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서술하면서 일관되게 유지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이 책의 백과사전적 면모를 더해준다. 일견 자신의 견해가 다소 강력하게 드러난 전반부는 객관적이지 않은 서술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조선은 정치철학적인 면에서 매우 뒤떨어져있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후진적이고 낙후되어있다. 따라서 이것을 쇄신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옳은 일이다. 반면에 풍습이나 예법에 대한 것은 애초부터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진 대상이 아니다. 이것을 조선의 예법을 지켜야한다는 모토 아래 서양의 예법에 대해서 금수라고 비난하거나 인간으로서의 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격하하는 것은 이런 객관성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유길준은 자신이 배운 전통과, 서양에서 지금 행하는 예법을 비교하면서 가치판단적인 언술을 배제하면서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여행한 도시의 여러 면모를 스케치하는 것으로 자신의 저술을 마치는데, 이것은 일견 자랑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객관적 기술, 백과사전식 편집의 마침표로서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지금까지 적어놓은 모든 내용이, 단순히 다른 책에서 본 내용을 엮어서 쓴 것이 아니라, 정말 있는 그대로, 날것의 서양을 그대로 전해준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더없이 알맞은 끝맺음인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이 앞에 서술했던 다소 학술적이고 정치적인 내용들은 그 생생함이 배가 되고, 자신의 여행에 대한 자랑까지 덧붙일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은, 내용과 판이하게 서유견문西遊見聞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변화

 

이런 유길준의 서술과 사유방식, 그리고 그가 내면적으로 내렸을법한 결론이 정말 옳은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가 소개해주고 있는 서양사회의 모습은, 사실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자유방임주의’, ‘야경국가라고 부르는 정부형태의 전형이다. 그는 국가에 의한 무상복지정책은 국민을 게으르게 만들 뿐이라면서 부정한다. 대신 국민연금제도과 사립 보험회사를 통해 자신의 삶의 방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좋은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연금의 목적이 국민의 복지에 있지 않고, 단기간에 큰 자본을 모아 국가발전에 사용하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를 만국공법에 입각해 기술하는 부분에서도, 순진하다 못해 종교적 열정에 가깝게 만국공법을 신뢰하는 모습도 보인다. 약자의 위치에서 그 질서에 편입된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결점은, 19세기라는 그의 위치를 이해해야지만 그 공과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경제을 뛰어넘는 정치이론으로서 사회주의가 동아시아에 수입되는 것은 20세기가 들어서고 나서도 몇 년이나 더 지난 뒤의 일이다. 당대에는 유럽에서보다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만국공법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조선은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또한 우리가 근대의 폭력으로 인식하는 많은 면모들은, 20세기가 중반을 넘어가고 나서야 사람들이 충격으로서 받아들이는 경험일 뿐, 이 당시에는 그런 면모를 발견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만큼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숨이 가빴고, 유럽-미국의 열강에 대해 다각도로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대였다.

침략자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 나를 해하려는 사람에게서 배울 점을 찾는 것. 이것이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서양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이것에 대해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 누구도 초월적인 기준에서 올바르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서술방식과 편집에서, 당시에 그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시선을 유지하려 애썼는지는 읽을 수 있다. 그를 통해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그 고민과 시선, 그리고 그것을 당대에 보여주려 했던 그의 노력이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한국적인 가치관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럽-미국의 사유방식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유길준이 안고 있었던 문제를 여전히 우리도 껴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책이 기행문이면서도 단순한 기행문으로 쓰일 수 없었으며, 또한 우리가 기행문으로 읽을 수도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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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마르크스주의와 현대사회 숙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손꼽힐만한 논쟁의 중심에 있다. 사상사적으로 여러 조류를 방법론적으로 복잡하게 원용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겠지만, 이것을 넘어선 부분들 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그의 사상의 대담성과 독특함보다는, 생존 당시 모호한 정치적 개입1과 개인의 비극 등 사상외적인 여러가지 요소들이 뒤엉킨 모습이다.

   하지만 현재는 여간해서는 알튀세르를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알튀세르가 차용한 여러가지 철학적 방법론과 담론 역시, 알튀세를 통해서 연구된다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이미 충분한 연구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알튀세르와 비슷한 모습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과학이다.’라는 알튀세르의 주장 아래, 주류 경제학과 다른 독창적인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다른 면에서보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독해방식은 데리다의 철학책 읽기 방식에 비판적으로 계승되어 현재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참신한 접근은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또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변형하거나 창조적인 유지를 꾀하려는 사람들 역시, 알튀세르의 전략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여 알튀세르에 기대고 있다.

   그렇다면, 알튀세르에 대해 한번쯤 들여다봄으로써 그의 자취를 밟아나가는 것이, 알튀세르가 죽은 지금의 시점에서도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해 요약해보고, 그에 대한 여러 입장과 비판적인 시선을 적어볼 것이다. 특히 알튀세르의 초기 저서에 속하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론을 읽는다』를 알튀세르의 사상으로 간주하고 접근할 것이다.

   우선 알튀세르가 생존했던 당시의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알튀세르의 이론적인 작업은, 그 자신이 홀로 체계를 세우는 방법보다는, 당시 정세에 대한 글을 때에 맞게 써내는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바로 이런 글을 한데 모아 엮어놓은 책이기도 하다. 알튀세르 스스로도 서문에서 이런 점을 밝히고 있다.

   알튀세르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면, 당시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었다: 프랑스는 다른 나라와 다르게, 부르주아 계급이 혁명적이라는 특징을 띈다. 그래서인지, 사회개혁적인 성향을 띈 지식인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의존해 이론을 만들기보다는, 혁명적인 부르주아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왔다. 그 결과, 과학적인 마르크스가 자리잡지 못하고 계몽주의적 인본주의, 프루동식 무정부주의, 노동조합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이 가운데서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공산주의는 설 자리를 잃었고, 과학을 잃은 프랑스의 혁명 사상은 무질서하고 무체계한 행동중심주의에 빠져있다.

   알튀세르는 이런 행동중심주의에 이론적으로 개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즉, 행동중심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과학적이고 엄밀한 마르크스주의를 프랑스에 뿌리내리게 하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나아가서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를 휩쓸고 있는 행동중심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면과 동시에 고려해야하는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각국의공산당을 지배하고 있던 스탈린의 노선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어쨌든) 공산주의 국가의 현실화에 환영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살아가던 시기에는, 감추어졌던 극심한 관료주의적 폐해와 비인간적 폭력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결함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입장에도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에 이는 ‘교조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받고 있었고, 알튀세르 역시 여기에 충분한 공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는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다. 알튀세르가 비판하는 행동중심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사실 이런 교조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교조주의자들이 설명하는 공산주의를 향한 기계적 진행, 생산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인간관, 맹목적으로 발전을 추종하는 태도 등에 대해, 행동중심주의자들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 주체적인 속성, 윤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 등의 개념을 들어 반박하였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실제로 당시 사회변혁을 주도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서 알튀세르는, 그 모두가 마르크스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과학’으로 격상시키고, 나머지 다른 조류를 ‘이데올로기’로 격하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는 당시에 성행하던 마르크스주의의 조류들이 왜 ‘이데올로기’인지, 나머지 하나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어떤 면에서 다르며 왜 과학일 수 있는지. 이 두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알튀세르에게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반대개념으로서,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이데올로기 또한 정의되기 때문이다. 과학의 요소를 마르크스 안에서 찾아낸다면, ‘이데올로기적인’ 마르크스 독해는 분명한 오독이 된다. 알튀세르는 이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마르크스가 직접 쓴 책인 『자본론』으로 돌아간다. 이 책이 바로 『자본론 강독』이다.

   알튀세르는 ‘진짜 마르크스’를 읽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세 가지 도구를 제시한다 : 첫째는 문답구조problematique, 둘째는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reak, 셋째는 증후적인 해석symptomic
reading.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문에서 첫째 도구는 자크 마르탱에게, 둘째 도구는 가스통 바슐라르에게 빌려왔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셋째 도구는 라캉의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았거나, 적어도 매우 유사하다고 알려져있다. 이 세 도구가 어떻게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확보하는지 살펴보자.

   문답구조는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문답구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려내주는 조건, 즉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이 이런 문답구조를 텍스트 안에 지니고 있고, 그 안에서 이론적인 개념의 조작을 통해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갖추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서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문제틀 없이 주체가 대상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암암리에 가정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런 관점을 주체의 경험주의 내지는 본질의 관념론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이런 근거없는 가정은 비과학적인 것이고, 따라서 이데올로기로 격하될 수 밖에 없다.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즉, 인간의 인식을 결정하는 구조가 경험적 세계와는 상관없이 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오히려 경험적 세계를 가정하는 것이 비과학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따라서 주체의 의지에서 발현된 행동을 사회(경험적 세계)변혁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는 사람들은 ‘주체’를 비과학적으로 가정하고 있고, 기계적으로 이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험적 세계가 주체에 온전히 반영된다고 비과학적으로 가정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중요한 점은, 알튀세르는 이것을 자신의 해석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인식론적 단절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비과학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하였다.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세계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단순히 경험적인 자료와 연구의 축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틀(알튀세르의 ‘문답구조’)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버리는 불연속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이 개념의 핵심이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을 빌려, 마르크스 역시 이런 불연속적인 과정을 거쳐 마르크스가 과학을 확립하였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에는 이런 단절이 나타나는 부분을 네 시기로 나누어서 서술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단절은, 다름아닌 이데올로기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단절이다. 마르크스 역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개념으로 학습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규정된다. 알튀세르에게 이 때 마르크스의 사상은 칸트와 피히테의 합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인간주의, 유적 본질을 가정하는 포이에르바하의 공동체적 인간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근거없는 가정을 자신의 학문에서 배제시켜나감으로써 마르크스는 자신의 과학을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바로 마르크스가 사용하는 언어와 표현의 한계에 대한 문제이다. 새로운 과학을 정립하고, 그것에 대해 기술하긴 하지만 여전히 마르크스는 당시에 자신이 학습한 철학적인 단어들을 사용해 새로운 과학을 정립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헤겔에 기반한 이데올로기와 마르크스의 새로운 과학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동시에 띌 수 밖에 없다. 바로 이 단계에서 알튀세르는 헤겔에 기반한 요소를 제거하고, 과학만을 읽어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증후적 해석을시도한다.

   알튀세르가 쓴 『자본론 강독』에서 이 증후적 해석은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무결한 해석innocent reading이다. 마치 경험적 세계를 인간이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이, 텍스트가 의미하는 본질적인 내용이 있고 인간은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독해라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무결한 해석에 반대되는 해석으로서의 불결한 해석guilty reading이다. 이는 텍스트를 기호로 파악하고, 이런 기호에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심층적 구조를 파악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구조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려내고, 직접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불투명한 이 구조를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증후적 해석은 이 가운데 불결한 해석에 초점을 두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불결하게 읽어냄으로써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청년 마르크스로부터 떨어뜨리고, 동시에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을 증후적으로 해석하는 독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제시한다.

   알튀세르의 위와 같은 마르크스읽기 시도는, 여는 글에서도 거론했듯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을 일으킨 만큼, 알튀세르에 대한 평가 또한 다양하다. 그 가운데는 모순되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이런 여러가지 평가 가운데, 알튀세르에게 가장 강력한 비판으로 자리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알튀세르 스스로가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라고 치부한 주체 개념에 대한 문제이다. 둘째는 이런 주체에 대한 관점과 관련한 사회변혁에 대한 문제이다.

   알튀세르는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수행하는 주체라는 개념을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결함이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이런 내용을 마르크스가 직접 쓴 책을 읽어내려가는 작업을 통해 ‘마르크스가 말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그는 이론적인 반인간주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기계적인 체제 이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체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론적인 체계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18 단지 예전에는 ‘경제’가 들어가있던 자리에 ‘(복잡한) 구조’가 들어갈 뿐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간에 인간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음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현실정치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혁에 관련된 사건들은 바로 알튀세르가 비판한 이론적 인간주의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그는 실천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적 인간주의에는 어느 정도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 인간주의는 결국에 이론적 인간주의를 토대로 실천을 실행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처해있다. 이론적으로 인간을 부각시키고,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해야지만 논리적으로 현실에서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인간을 꺼내는 움직임을 시행해야한다는 당위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같은 과정이 없다면 그저 사실에만 매달려 현실을 정당화하는 길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이론적인 인간주의가 표방하는 당위나 본질은, 이론 그 자체로서 실천적인 의미를 배태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무게가 있다.

   이것과 연관되게, 주체는 인식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행동의 주체이기도 하다. 또한 정치적인 인식과 정치적인 행동은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을만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인식의 주체를 이론적으로 없애버리는 작업은, 정치적 행동의 주체를 이론적으로 없애버리는 것과 대개 일치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최종적인 목표가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형식으로의 이행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이행할 인격이 논리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이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독해는, 다른 철학자들의 도구를 끌어들여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이끌어낸,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었다. 알튀세르의 이런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마르크스의 면모, 다른 철학자와 마르크스의 결합, 혹은 헤겔로부터 떨어진 마르크스 등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과학이라는 이름을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기계적 유물론과 동치시켜 수많은 폐해를 불러온 공산주의의 모습을, 이론적으로나마 다시 과학의 이름으로 세우고 정당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택한 댓가는 역시 이론적으로 혹독했다. 인간은 정치적 변혁으로부터 거세당하였다. 그리고 세계를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또한 그것이 과연 마르크스의 진짜 의도와 같았을까 역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치는 그 정의상 주체성을 지닌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배려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강력한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차 자료

Louis Althusser, 『맑스를 위하여』(이종영 옮김), 서울 ; 백의, 1997
Louis Althusser and Etienne Balibar, Reading Capital, London ; NLB, 1970

 


 

 

 

 

 

 

 

 

 

 

 


 

논문

류승무, 「구조주의 맑시즘에 대한 비판적 검토」, 《중앙승가대학 교수논문집》, 1993
양종근, 「알튀세르의 맑스주의와 주체」, 《문예미학》, 2002.10



단행본

Miriam Glucksmann, 『구조주의와 현대마르크시즘』(정수복 옮김), 서울 ; 한울, 1984
Edith Kurzweil, 『구조주의의 시대』(이광래 옮김), 서울 ; 종로서적, 1983



기타

200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 주최 윤소영 교수 『자본』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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