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마르크스주의와 현대사회 숙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손꼽힐만한 논쟁의 중심에 있다. 사상사적으로 여러 조류를 방법론적으로 복잡하게 원용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겠지만, 이것을 넘어선 부분들 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그의 사상의 대담성과 독특함보다는, 생존 당시 모호한 정치적 개입1과 개인의 비극 등 사상외적인 여러가지 요소들이 뒤엉킨 모습이다.
하지만 현재는 여간해서는 알튀세르를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알튀세르가 차용한 여러가지 철학적 방법론과 담론 역시, 알튀세를 통해서 연구된다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이미 충분한 연구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알튀세르와 비슷한 모습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과학이다.’라는 알튀세르의 주장 아래, 주류 경제학과 다른 독창적인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다른 면에서보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독해방식은 데리다의 철학책 읽기 방식에 비판적으로 계승되어 현재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참신한 접근은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또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변형하거나 창조적인 유지를 꾀하려는 사람들 역시, 알튀세르의 전략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여 알튀세르에 기대고 있다.
그렇다면, 알튀세르에 대해 한번쯤 들여다봄으로써 그의 자취를 밟아나가는 것이, 알튀세르가 죽은 지금의 시점에서도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해 요약해보고, 그에 대한 여러 입장과 비판적인 시선을 적어볼 것이다. 특히 알튀세르의 초기 저서에 속하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론을 읽는다』를 알튀세르의 사상으로 간주하고 접근할 것이다.
우선 알튀세르가 생존했던 당시의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알튀세르의 이론적인 작업은, 그 자신이 홀로 체계를 세우는 방법보다는, 당시 정세에 대한 글을 때에 맞게 써내는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바로 이런 글을 한데 모아 엮어놓은 책이기도 하다. 알튀세르 스스로도 서문에서 이런 점을 밝히고 있다.
알튀세르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면, 당시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었다: 프랑스는 다른 나라와 다르게, 부르주아 계급이 혁명적이라는 특징을 띈다. 그래서인지, 사회개혁적인 성향을 띈 지식인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의존해 이론을 만들기보다는, 혁명적인 부르주아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왔다. 그 결과, 과학적인 마르크스가 자리잡지 못하고 계몽주의적 인본주의, 프루동식 무정부주의, 노동조합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이 가운데서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공산주의는 설 자리를 잃었고, 과학을 잃은 프랑스의 혁명 사상은 무질서하고 무체계한 행동중심주의에 빠져있다.
알튀세르는 이런 행동중심주의에 이론적으로 개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즉, 행동중심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과학적이고 엄밀한 마르크스주의를 프랑스에 뿌리내리게 하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나아가서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를 휩쓸고 있는 행동중심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면과 동시에 고려해야하는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각국의공산당을 지배하고 있던 스탈린의 노선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어쨌든) 공산주의 국가의 현실화에 환영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살아가던 시기에는, 감추어졌던 극심한 관료주의적 폐해와 비인간적 폭력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결함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입장에도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에 이는 ‘교조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받고 있었고, 알튀세르 역시 여기에 충분한 공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는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다. 알튀세르가 비판하는 행동중심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사실 이런 교조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교조주의자들이 설명하는 공산주의를 향한 기계적 진행, 생산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인간관, 맹목적으로 발전을 추종하는 태도 등에 대해, 행동중심주의자들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 주체적인 속성, 윤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 등의 개념을 들어 반박하였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실제로 당시 사회변혁을 주도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서 알튀세르는, 그 모두가 마르크스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과학’으로 격상시키고, 나머지 다른 조류를 ‘이데올로기’로 격하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는 당시에 성행하던 마르크스주의의 조류들이 왜 ‘이데올로기’인지, 나머지 하나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어떤 면에서 다르며 왜 과학일 수 있는지. 이 두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알튀세르에게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반대개념으로서,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이데올로기 또한 정의되기 때문이다. 과학의 요소를 마르크스 안에서 찾아낸다면, ‘이데올로기적인’ 마르크스 독해는 분명한 오독이 된다. 알튀세르는 이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마르크스가 직접 쓴 책인 『자본론』으로 돌아간다. 이 책이 바로 『자본론 강독』이다.
알튀세르는 ‘진짜 마르크스’를 읽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세 가지 도구를 제시한다 : 첫째는 문답구조problematique, 둘째는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reak, 셋째는 증후적인 해석symptomic
reading.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문에서 첫째 도구는 자크 마르탱에게, 둘째 도구는 가스통 바슐라르에게 빌려왔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셋째 도구는 라캉의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았거나, 적어도 매우 유사하다고 알려져있다. 이 세 도구가 어떻게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확보하는지 살펴보자.
문답구조는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문답구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려내주는 조건, 즉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이 이런 문답구조를 텍스트 안에 지니고 있고, 그 안에서 이론적인 개념의 조작을 통해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갖추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서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문제틀 없이 주체가 대상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암암리에 가정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런 관점을 주체의 경험주의 내지는 본질의 관념론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이런 근거없는 가정은 비과학적인 것이고, 따라서 이데올로기로 격하될 수 밖에 없다.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즉, 인간의 인식을 결정하는 구조가 경험적 세계와는 상관없이 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오히려 경험적 세계를 가정하는 것이 비과학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따라서 주체의 의지에서 발현된 행동을 사회(경험적 세계)변혁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는 사람들은 ‘주체’를 비과학적으로 가정하고 있고, 기계적으로 이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험적 세계가 주체에 온전히 반영된다고 비과학적으로 가정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중요한 점은, 알튀세르는 이것을 자신의 해석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인식론적 단절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비과학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하였다.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세계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단순히 경험적인 자료와 연구의 축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틀(알튀세르의 ‘문답구조’)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버리는 불연속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이 개념의 핵심이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을 빌려, 마르크스 역시 이런 불연속적인 과정을 거쳐 마르크스가 과학을 확립하였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에는 이런 단절이 나타나는 부분을 네 시기로 나누어서 서술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단절은, 다름아닌 이데올로기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단절이다. 마르크스 역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개념으로 학습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규정된다. 알튀세르에게 이 때 마르크스의 사상은 칸트와 피히테의 합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인간주의, 유적 본질을 가정하는 포이에르바하의 공동체적 인간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근거없는 가정을 자신의 학문에서 배제시켜나감으로써 마르크스는 자신의 과학을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바로 마르크스가 사용하는 언어와 표현의 한계에 대한 문제이다. 새로운 과학을 정립하고, 그것에 대해 기술하긴 하지만 여전히 마르크스는 당시에 자신이 학습한 철학적인 단어들을 사용해 새로운 과학을 정립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헤겔에 기반한 이데올로기와 마르크스의 새로운 과학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동시에 띌 수 밖에 없다. 바로 이 단계에서 알튀세르는 헤겔에 기반한 요소를 제거하고, 과학만을 읽어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증후적 해석을시도한다.
알튀세르가 쓴 『자본론 강독』에서 이 증후적 해석은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무결한 해석innocent reading이다. 마치 경험적 세계를 인간이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이, 텍스트가 의미하는 본질적인 내용이 있고 인간은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독해라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무결한 해석에 반대되는 해석으로서의 불결한 해석guilty reading이다. 이는 텍스트를 기호로 파악하고, 이런 기호에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심층적 구조를 파악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구조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려내고, 직접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불투명한 이 구조를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증후적 해석은 이 가운데 불결한 해석에 초점을 두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불결하게 읽어냄으로써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청년 마르크스로부터 떨어뜨리고, 동시에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을 증후적으로 해석하는 독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제시한다.
알튀세르의 위와 같은 마르크스읽기 시도는, 여는 글에서도 거론했듯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을 일으킨 만큼, 알튀세르에 대한 평가 또한 다양하다. 그 가운데는 모순되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이런 여러가지 평가 가운데, 알튀세르에게 가장 강력한 비판으로 자리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알튀세르 스스로가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라고 치부한 주체 개념에 대한 문제이다. 둘째는 이런 주체에 대한 관점과 관련한 사회변혁에 대한 문제이다.
알튀세르는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수행하는 주체라는 개념을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결함이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이런 내용을 마르크스가 직접 쓴 책을 읽어내려가는 작업을 통해 ‘마르크스가 말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그는 이론적인 반인간주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기계적인 체제 이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체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론적인 체계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18 단지 예전에는 ‘경제’가 들어가있던 자리에 ‘(복잡한) 구조’가 들어갈 뿐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간에 인간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음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현실정치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혁에 관련된 사건들은 바로 알튀세르가 비판한 이론적 인간주의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그는 실천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적 인간주의에는 어느 정도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 인간주의는 결국에 이론적 인간주의를 토대로 실천을 실행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처해있다. 이론적으로 인간을 부각시키고,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해야지만 논리적으로 현실에서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인간을 꺼내는 움직임을 시행해야한다는 당위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같은 과정이 없다면 그저 사실에만 매달려 현실을 정당화하는 길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이론적인 인간주의가 표방하는 당위나 본질은, 이론 그 자체로서 실천적인 의미를 배태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무게가 있다.
이것과 연관되게, 주체는 인식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행동의 주체이기도 하다. 또한 정치적인 인식과 정치적인 행동은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을만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인식의 주체를 이론적으로 없애버리는 작업은, 정치적 행동의 주체를 이론적으로 없애버리는 것과 대개 일치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최종적인 목표가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형식으로의 이행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이행할 인격이 논리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이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독해는, 다른 철학자들의 도구를 끌어들여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이끌어낸,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었다. 알튀세르의 이런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마르크스의 면모, 다른 철학자와 마르크스의 결합, 혹은 헤겔로부터 떨어진 마르크스 등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과학이라는 이름을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기계적 유물론과 동치시켜 수많은 폐해를 불러온 공산주의의 모습을, 이론적으로나마 다시 과학의 이름으로 세우고 정당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택한 댓가는 역시 이론적으로 혹독했다. 인간은 정치적 변혁으로부터 거세당하였다. 그리고 세계를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또한 그것이 과연 마르크스의 진짜 의도와 같았을까 역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치는 그 정의상 주체성을 지닌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배려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강력한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차 자료
Louis Althusser, 『맑스를 위하여』(이종영 옮김), 서울 ; 백의, 1997
Louis Althusser and Etienne Balibar, Reading Capital, London ; NLB, 1970
논문
류승무, 「구조주의 맑시즘에 대한 비판적 검토」, 《중앙승가대학 교수논문집》, 1993
양종근, 「알튀세르의 맑스주의와 주체」, 《문예미학》, 2002.10
단행본
Miriam Glucksmann, 『구조주의와 현대마르크시즘』(정수복 옮김), 서울 ; 한울, 1984
Edith Kurzweil, 『구조주의의 시대』(이광래 옮김), 서울 ; 종로서적, 1983
기타
200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 주최 윤소영 교수 『자본』 강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