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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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 퀵서비스


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빌리 엘리어트> 시작합니다.


소설 <빌리 엘리어트>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만든 같은 제목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기반해 영국의 소설가 멜빈 버지스가 재창작한 소설입니다. 주인공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촌에서 광부인 아버지 재키 그리고 역시 광부이면서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형 토니와 함께 사는 12세 청소년입니다. 권투 수업 중에도 우아한 동작을 생각하며 옆에서 진행되는 발레 수업에 눈길을 계속 주던 빌리. 혼자서 몰래 발레 동작을 따라하다가 발레 교사인 윌킨슨 선생님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마는데, 선생님은 빌리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발레를 가르치기 시작하죠. 하지만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는 여성들이나 하는 발레를 빌리가 배우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탄광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 때문에 벌어진 파업으로 인해 학원비를 지원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빌리의 강한 의지와 윌킨슨 선생님의 설득에 아버지 재키는 마음을 바꾸었고, 빌리는 왕립 발레 학교 입학을 위한 지역 오디션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오디션 직전, 형 토니는 파업 시위 도중 경찰을 다치게 한 죄로 재판에 넘겨지고, 가족의 재판에 참석해야 했던 빌리는 지역 오디션에 불참하고 맙니다. 윌킨슨 선생님은 크게 실망했지만 아직 런던에 직접 가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겨울에 난방조차 할 수 없어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인 피아노마저 부숴 땔감으로 사용한 빌리의 가족을 포함해, 탄광촌의 모든 사람들이 오늘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는 마을회의에서 빌리를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특히 방금 재판을 받아 마을 사람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토니의 연설 덕분에 빌리는 가족들과 함께 런던으로 가 오디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빌리는 오디션에 합격했을까요? 탄광촌 사람들은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산업구조의 급변에 직면해 쇠퇴해가는 1970~80년대 영국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계급 격차, 젠더 갈등, 가족과 공동체의 역할, 성장기 청소년의 성정체성 고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가로지르는 명작 소설, <빌리 엘리어트>입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단어는 <지역문화>입니다. 영국에서 석탄은 산업혁명 시기부터 가장 중요한 자원 중 하나였습니다. 전세계 다른 모든 지역에서 점진적인 경제적 발달이 이뤄져 산업혁명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영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이유가 가까운 곳에서 석탄을 캐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역사학자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탄광지역은 가장 빨리 공업화된 지역입니다. 일자리가 생기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모여들면 문화가 생겨나죠. 이렇게 이른바 “노동자 문화”가 최초로 생긴 지역에서 발생한 소설 속 사건들이 보여주는 문화적 단면을 통해, 우리나라의 공업화된 지역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주인공 빌리를 갈등으로 몰아넣는 것은 권투와 발레라는, 성별에 따라 이분화된 아이들의 선택지입니다. 나는 발레가 더 좋아보이는데 아버지와 형은 내게 권투를 배우라고 하고, 권투를 할 때에도 “요리조리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현대적으로 하고 싶은데 이 사회는 “정정당당하게” “남자다운” 옛날식 복싱을 선호합니다. 이런 이분법은 성장하고 난 뒤에 아이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면 좋은지 판단하는 사회의 선호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권투를 배우는 이유는 권투 선수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버지 재키가 반복하는 말처럼 “빌리 또한, 내가 했고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했던” 광부 일에 적합한 강인한 체력과 태도를 갖기 위해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광부에게 “요리조리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일은 거의 필요하지 않을테니까요.


반면에 여자 아이들이 발레를 배우는 이유는, 적어도 제가 읽은 경험으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윌킨슨 선생님이 “중산층” 가정의 구성원으로 등장한다든가, 런던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배우는 게 발레라는 식으로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가 생각하고 있었고 발레 학교 입학과 교육에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드는 등의 설정을 보면, 권투와 발레라는 소재는 계급과 경제적 격차에 관한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상력을 약간만 더 발휘해보자면, 이 탄광촌 공동체의 남성들에겐 중산층이 가져야 할 여러 특성이 불필요하거나 낮게 평가받는 데 반해, 여성들에겐 탄광촌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 못지 않게 중산층이 가져야 할 우아함 같은 덕목 또한 가져야한다는 문화적 압력이 존재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발레를 하는 빌리 그리고 빌리의 친구이자 여장을 좋아하는 크로스 드레서인 마이클은 이런 지역/노동자 문화의 경계에 위치한 캐릭터입니다. 이 둘은 "호모"라는, 남성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정도로 탄광촌 사회의 성역할과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인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좋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빌리는 발레 학교 오디션을 받겠다는 소원을 마을 사람들로부터 공인받은 반면, 마이클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처지라는 점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요.


“탄광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하지만, <빌리 엘리어트>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광부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그 동네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광부라면, 광부들의 모임은 경제활동을 하는 마을사람 전체의 모임과 차이가 거의 없겠죠? 그래서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가 거의 일치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한국의 주요 도시에선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기도 합니다. 한 동네 사는 사람이 모두 광부이거나, 한 회사의 회사원이거나, 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거나 하는 경우 말이죠. 이렇게 한국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한 커뮤니티 안에 살아가는 것을 소셜 믹스, 사회적 계층 혼합이라고 하는데요.


돈이 없는 빌리네 가족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주는 장면이 제 눈에 띈 이유는 이 사실과 이어집니다. 마을회관에서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를 심사하고 의결하는 풍경 자체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지만, 이 회의에서 "누구누구네 집 아들 유학비용을 모으자"는 내용을 논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낯선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듯 사람들의 모임이 사실상 노동조합의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파업에 참여하는 광부 노동조합이 소설의 중요한 배경인 이유는,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가 조합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부 노동조합 자체가 이 소설의 문화/정치/경제/사회적 요소가 유지되도록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노동조합는 대기업 공장 노동자들이 결성한 이익집단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유럽에서 상당수의 노동조합은 보험이나 연금 업무도 자체적으로 집행하는 등 동업자 공동체의 기능도 같이 수행합니다.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로, 중세 길드의 전통을 노동조합이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길드란 중세에 있었던 같은 종류의 제품을 생산하는 장인들의 공동체입니다. 흔히 역사나 경제학에서 길드는 공급을 독점해 가격을 통제하고 기술을 공개하지 않는 등 경제의 발전을 방해한 집단으로서, 자본주의, 공장에서의 대량생산, 시장경제의 발달과 함께 그 힘을 잃어 사라진 경제주체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길드가 관리하는 영역은 생산과 판매에 국한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넓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생활밀착형 보험과 연금입니다. 길드 구성원들은 길드에 소속된 댓가로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판매가격을 보장받으며 다른 곳에서 개발된 선진 기술에 대한 정보를 거의 댓가없이 받을 수 있었는데, 이에 대한 보상으로 길드에 회비를 냅니다. 길드는 이 회비를 이용해 부상을 당해 일을 할 수 없게 된 길드원에게 생계비를 지급하거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은퇴한 장인에게도 돈을 주었습니다. 일종의 상호부조라고 할 수 있는데요. 노조 장학금이라거나 노조 연금보험, 노조 상조회 같은 이름이 낯설지 않고, 탄광촌에서 빌리의 일을 처리하는 게 감동을 주는 일회성 이벤트처럼 보이기보다는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빌리의 안건이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애드온 서비스,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빌리 엘리어트>를 재미있게 보신 분들에게 무엇을 추천해드릴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영화 두 편이 생각났어요. 두 개 모두 영국을 배경으로 할 뿐만 아니라 영국의 사회상을 통해 계급갈등과 문화격차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인데요. 한 개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영화이기 때문에 아이랑 같이 보는 걸 권해드릴 수 없어요. 나머지 하나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좌파 성향 감독이라고 평가받는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15세 등급이고, 복잡한 상징 해석이 필요없는 아주 직관적인 영화라 아이와 함께 보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늙은 목수 다니엘와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케이티의 일상을 비춰줍니다. 여러 측면에서 <빌리 엘리어트>와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요. 다니엘을 통해서 산업구조, 경제정책, 사회문화의 변화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지 보여주고, 케이티를 통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 시선이 얼마나 뿌리깊고 심각한지를 보여줍니다. 이 둘의 삶을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하는 영국 사회와 국가 행정 체계에 대한 비판도 함께 담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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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이 위험에 민감한 시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세계에서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매일 병에 걸리고, 죽어가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내게 병을 옮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요.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대체로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인간의 특성 때문에 이런 도덕적인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을 자신에 대한 잠재적인 위험 요소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이처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시기는, 제가 기억하는 가까운 과거에는 없었던 것도 같아요.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운명을 건 도박을 제안합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면, 네 운명을 판돈삼아 계산해보라고요. 신이 있다에 걸거나, 없다에 걸거나. 있다에 걸었는데 신이 실제로 있다면, 내 영혼은 종말의 그 날에 구원을 받습니다. 반대로 없다에 걸었다면, 불경죄로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불에서 고통받겠죠. 신이 있다에 걸었는데 실제로는 신이 없다면, 잘못된 믿음을 지니긴 하겠지만 구원도 없고 지옥불도 없고 천벌도 받지 않을테니 사는데 그닥 불편한 것은 없을 겁니다.


반대로 없다에 걸었다면, 나는 참된 믿음을 갖겠지만 신이 없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곤 <팡세>를 읽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어느 쪽에 네 운명을 걸 것이냐?“신 존재 증명에 관한 도박사 논증”이라고 부르는, 파스칼 식의 신 존재 옹호론입니다.


사상의 역사의 맥락에서 이 주장은, 선택과 기댓값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제시해 현대적인 확률 이론의 선구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바이러스라는 잠재적 위협과 불신의 공개적 표현이라는 현실이 뜨겁게 타오르는 지옥불처럼 도래한 이런 때엔, 수학이라기보단 심리학처럼 읽힙니다. 사람들이 위협을 대면하고 대처하는 방안을 평가하는 방식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도면으로서도 아주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파스칼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축복을 내리는 대신 협박의 칼날을 휘둘렀습니다.


한때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지 않아서 지금처럼 이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르며 중국인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바이러스가 창궐했으니 중국인들이 바이러스를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죠.


중국인을 막았는데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았다면, 그건 중국인을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중국인을 막았어도 바이러스가 퍼졌다면, 그건 중국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바이러스를 퍼뜨렸기 때문일 것이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밖에 있어 어쩔 수 없는 사건이었겠죠. 반대로 중국인을 막지 않았는데도 바이러스가 퍼졌다면, 그건 중국인을 막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중국인을 막지 않았어도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았다면, 그저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일 뿐인 것이죠.


이렇게 이야기하곤, 입국 금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느 쪽에 네 목숨을 걸 것이냐? 파스칼 이후에 훨씬 더 발전된 확률과 통계 이론에 기반을 둔 연구들에서 “입국금지보다는 검역강화가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확률이 xx% 더 높다”고 말해도, 그들은 항상 불투명한 백분율보단 확실한 도박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점을 칠 줄 알지만 점쟁이를 무척 싫어합니다. 불투명한 위험을 말하며 자신들의 안정을 보장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잘 된다고 말했는데 잘 되면 그건 점쟁이의 신통력이 아니라 내가 잘 해서 그런 것인데, 잘 안되면 신통함이 없는 가짜의 말로 남겨지겠죠. 반대로 위험을 경고한다면 상황이 반대로 펼쳐집니다.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점쟁이의 조언 덕분에 위험을 피한 것이고,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면 영험한 점쟁이가 되고요.


점쟁이는 파스칼처럼 우리의 지적 능력만 마비시키지 않습니다. 액땜을, 부적을, 굿판을 제시하며 우리의 지갑을 노립니다. 나에게 돈을 내면 화를 피할 수 있다는 점쟁이의 말을 따른 덕분에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점쟁이의 능력이고, 위험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으로 둔갑합니다. 그 말을 거역해서 위험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내 책임이 되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언젠가 예언되었던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지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파스칼적 상황 때문에 언제나 점쟁이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패배한 대한민국의 모든 번화가 위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모르겠는데 돈을 받고 있는 역술인의 단칸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가장 오래된 점술책인 <주역>은, 고대 사회에서 제사장이자 왕인 사람들이 점을 치고 해석하는 방법, 점술의 결과와 그에 따른 사건의 발생 추이를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주역> 또한 점술책이기에 조심해라, 삼가라,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라 등등 무언가를 금지하는 메시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심스러움은 파스칼 식의 내기와는 맥락이 다릅니다. <주역>이 만들어진 시기, 왕은 형식적으로는 개인의 운명을 내다보려 점을 치지만, 제정일치 군주제 사회에서 왕의 운명이란 곧 그 공동체 전체의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위대한 선조들은 왕 개인의 사적인 목표보다 왕으로 대표되는 공동체 전체의 안정이 훨씬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주역>의 조심스러움은 그 결과물입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개인이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 뭔가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의 왕 만큼이나 운명을 건 도박을 생각보다 많이 하고, 그때마다 위험의 심리학의 손짓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는 아들에게 백신을 놓아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에세이입니다. 걸릴지 안 걸릴지 모르는 불확실한 병을 예방하기 위해 확실히 아픈 주사를 내 아들에게 꽂아야 하는 것인가, 만약 꽂았다가 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의학적 확률은 100만분의 1이라고 하지만 그 1에 내 아들이 속하면 그 확률에서 “100만분의”는 지워지는데, 인체가 갖고 있는 면역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면 백신 없이도 병을 퇴치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에세이스트는 주변에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을 충실히 활용해 심리에서 과학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의 그리고 우리의 주변엔 여전히 까다로운 임상을 통과한 약은 비싸다고 말하면서 “면역력”을 늘려준다는 건강기능식품은 꼬박꼬박 사서 챙겨먹는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 치료할 수 없다고 알려진 병에 대한 절망을 담보로 소용없는 약과 근거없는 자연의 힘을 강요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습니다. 결국 진단명 미상이 되어버린 이름모를 병에 걸려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병상 머리맡에 놓인 것은, 약 복용 지도서도 입원환자 주의사항도 아닌 온갖 스님들과 무당들의 전화번호였습니다.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문장은 오래된 격언입니다. 이번 사태 초기에 울려퍼졌던 “방역 영역에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위험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더 늘렸을 뿐만 아니라 허용되는 행동의 폭을 비과학적인 영역까지 포괄하게끔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입에다 소금물을 뿌리는 파국을 불러오는 것을 보았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어버린 비밀 사교단체에 대한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응보에 걸맞다는 생각은 들지만) 끊임없는 비난도 이어졌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요.


물론 우리는 노력과 행운으로 상황을 잘 넘긴 편에 속하지만, 이제는 다른 나라들이 공포에 전염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바이러스의 특성 때문에, 여전히 우리나라에 병이 또 들어와 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짧은 몇 달 간의 경험으로 위험의 정도를 알게 되었으며, 과하다 싶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인 조치만 취할 수 있을 정도로 알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능력이 허용하는만큼 이 병과 바이러스를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완연한 봄기운에도 마스크를 써야 해서 숨 쉴 때마다 땀이 차는 입술과 볼에 약간 짜증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위험에 대한 공포가 아닌 과학과 지식이 알려주는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보여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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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강의
가토 신로 지음, 장윤선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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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말해주듯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관한 해설서이고, 일본 카톨릭 방송이 평신도를 대상으로 마련한 강의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술술 읽히는 것은 아닌데, 깊이있는 독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견해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고백록>의 서사를 선형이 아닌 원형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즉, 불신자가 신자로 변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태어난(즉 존재하게 된) 내가 하나님을 떠났다가(존재를 망각하고) 다시 돌아가며 진정한 나로 존재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고백록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존재증명의 과정이 되며, 입으로 신앙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뼈로" 실존을 말하는 책이 된다.


두번째는 "장소로서의 신"이라는 개념과 신이 머무르는 장소로서의 기억(메모리아)이라는 발상이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 본질을 밝히는 것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신이 어디에 있는지 밝힘으로써 존재와의 관계를 밝힐 수 있다. 신이 어딘가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것은, 머무르는 존재와 머무름을 알아채는 존재 모두를 가정함으로써 존재는 관계를 전제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드러나는 장소가 기억이다. 기억은 나의 존재의 흔적이다. 즉, 내 존재의 이유인 신의 역사하심의 증거다.


그 기억 속 사건들이(즉 역사하심이) 현재의 나를 만들고, 또 지금의 내가 기억이(즉 역시 역사하심이) 되어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기억은 과거이며 현재인 동시에 미래다. 그게 하나님이 세계를 관장하는, 시간이 아닌 시간적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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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지음, 이세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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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철학 전체를 "수양"이라고 하는, 실천의 관점으로 일관되게 정리하는 관점을 보여준다. 이런 시도는, 신화적/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얽혀있는 고대철학의 특성상 신비주의와 영성이라는 (아주 왜곡된) 시선을 드러낼 수 있어서 매우 위험하다. 하지만 이 책은 그 함정을 아주 절묘하게 피해가면서, 고대철학자들의 말이 어떤 실천적 지침을 제공할 의도로 쓰였는지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이 책의 수양 개념은, 글로 쓰고 보면 대단할 것은 없다. 말과 행동을 같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선대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말로 내뱉고, 그 가르침에 일치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렇게 조금 더 고양된 자신의 몸 전체로써 세계에 스스로를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스토아 철학자들도, 에피쿠로스학파도, 회의주의자들도, 나아가 이 세계에 "철학자"로서 존재했던 모든 개인들도 바로 이런 "수양"을 목표로 살았기에 철학자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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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박승찬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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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신학자에 관한 책을 읽어보았다. 마음같아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직접 읽어보고 싶...었으나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아 개설서를 읽어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카톨릭 방송에서 진행된 평신도 대상 강연을 옮긴 책으로, 큰 어려움 없이 술술 읽히는 게 장점이다.


철학의 눈으로 신앙에 접근하다보면 벽에 부딪힌다. 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 이 단계에서 믿음의 논증을 비철학적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대체로 무신론자들이고, 나도 한때 그랬다). 하지만 나는 이런 태도가 "철학적으로" 무례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있다거나 없다는 믿음은 철학적 문제가 아니다. 있다면 왜 있는지, 없다면 왜 없는지 주장하는 과정과 그 안에 담긴 발상이 진짜 철학적 문제다. 신학을 공부하는 건 그래서 신앙인에게도, 비신앙인에게도 의미있는 일이다.


신이라는 무게와 더불어,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건질 수 있는 주제와 신기한 발상은 다음의 개념들과 연관된다: 존재, 자아, 시간, 자연재해를 수용하는 태도, 도덕적 악의 기원, 자유의지의 본질, 전쟁의 정당성, 역사의 의미.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이기도 하다. 이들 개념에 관한 그의 생각이 당연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가 우리에게 준 영향력 때문이고, 독창적으로 느껴진다면 그의 사상의 위대함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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