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이 위험에 민감한 시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세계에서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매일 병에 걸리고, 죽어가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내게 병을 옮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요.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대체로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인간의 특성 때문에 이런 도덕적인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을 자신에 대한 잠재적인 위험 요소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이처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시기는, 제가 기억하는 가까운 과거에는 없었던 것도 같아요.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운명을 건 도박을 제안합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면, 네 운명을 판돈삼아 계산해보라고요. 신이 있다에 걸거나, 없다에 걸거나. 있다에 걸었는데 신이 실제로 있다면, 내 영혼은 종말의 그 날에 구원을 받습니다. 반대로 없다에 걸었다면, 불경죄로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불에서 고통받겠죠. 신이 있다에 걸었는데 실제로는 신이 없다면, 잘못된 믿음을 지니긴 하겠지만 구원도 없고 지옥불도 없고 천벌도 받지 않을테니 사는데 그닥 불편한 것은 없을 겁니다.


반대로 없다에 걸었다면, 나는 참된 믿음을 갖겠지만 신이 없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곤 <팡세>를 읽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어느 쪽에 네 운명을 걸 것이냐?“신 존재 증명에 관한 도박사 논증”이라고 부르는, 파스칼 식의 신 존재 옹호론입니다.


사상의 역사의 맥락에서 이 주장은, 선택과 기댓값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제시해 현대적인 확률 이론의 선구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바이러스라는 잠재적 위협과 불신의 공개적 표현이라는 현실이 뜨겁게 타오르는 지옥불처럼 도래한 이런 때엔, 수학이라기보단 심리학처럼 읽힙니다. 사람들이 위협을 대면하고 대처하는 방안을 평가하는 방식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도면으로서도 아주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파스칼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축복을 내리는 대신 협박의 칼날을 휘둘렀습니다.


한때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지 않아서 지금처럼 이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르며 중국인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바이러스가 창궐했으니 중국인들이 바이러스를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죠.


중국인을 막았는데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았다면, 그건 중국인을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중국인을 막았어도 바이러스가 퍼졌다면, 그건 중국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바이러스를 퍼뜨렸기 때문일 것이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밖에 있어 어쩔 수 없는 사건이었겠죠. 반대로 중국인을 막지 않았는데도 바이러스가 퍼졌다면, 그건 중국인을 막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중국인을 막지 않았어도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았다면, 그저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일 뿐인 것이죠.


이렇게 이야기하곤, 입국 금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느 쪽에 네 목숨을 걸 것이냐? 파스칼 이후에 훨씬 더 발전된 확률과 통계 이론에 기반을 둔 연구들에서 “입국금지보다는 검역강화가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확률이 xx% 더 높다”고 말해도, 그들은 항상 불투명한 백분율보단 확실한 도박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점을 칠 줄 알지만 점쟁이를 무척 싫어합니다. 불투명한 위험을 말하며 자신들의 안정을 보장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잘 된다고 말했는데 잘 되면 그건 점쟁이의 신통력이 아니라 내가 잘 해서 그런 것인데, 잘 안되면 신통함이 없는 가짜의 말로 남겨지겠죠. 반대로 위험을 경고한다면 상황이 반대로 펼쳐집니다.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점쟁이의 조언 덕분에 위험을 피한 것이고,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면 영험한 점쟁이가 되고요.


점쟁이는 파스칼처럼 우리의 지적 능력만 마비시키지 않습니다. 액땜을, 부적을, 굿판을 제시하며 우리의 지갑을 노립니다. 나에게 돈을 내면 화를 피할 수 있다는 점쟁이의 말을 따른 덕분에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점쟁이의 능력이고, 위험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으로 둔갑합니다. 그 말을 거역해서 위험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내 책임이 되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언젠가 예언되었던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지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파스칼적 상황 때문에 언제나 점쟁이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패배한 대한민국의 모든 번화가 위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모르겠는데 돈을 받고 있는 역술인의 단칸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가장 오래된 점술책인 <주역>은, 고대 사회에서 제사장이자 왕인 사람들이 점을 치고 해석하는 방법, 점술의 결과와 그에 따른 사건의 발생 추이를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주역> 또한 점술책이기에 조심해라, 삼가라,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라 등등 무언가를 금지하는 메시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심스러움은 파스칼 식의 내기와는 맥락이 다릅니다. <주역>이 만들어진 시기, 왕은 형식적으로는 개인의 운명을 내다보려 점을 치지만, 제정일치 군주제 사회에서 왕의 운명이란 곧 그 공동체 전체의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위대한 선조들은 왕 개인의 사적인 목표보다 왕으로 대표되는 공동체 전체의 안정이 훨씬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주역>의 조심스러움은 그 결과물입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개인이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 뭔가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의 왕 만큼이나 운명을 건 도박을 생각보다 많이 하고, 그때마다 위험의 심리학의 손짓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는 아들에게 백신을 놓아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에세이입니다. 걸릴지 안 걸릴지 모르는 불확실한 병을 예방하기 위해 확실히 아픈 주사를 내 아들에게 꽂아야 하는 것인가, 만약 꽂았다가 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의학적 확률은 100만분의 1이라고 하지만 그 1에 내 아들이 속하면 그 확률에서 “100만분의”는 지워지는데, 인체가 갖고 있는 면역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면 백신 없이도 병을 퇴치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에세이스트는 주변에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을 충실히 활용해 심리에서 과학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의 그리고 우리의 주변엔 여전히 까다로운 임상을 통과한 약은 비싸다고 말하면서 “면역력”을 늘려준다는 건강기능식품은 꼬박꼬박 사서 챙겨먹는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 치료할 수 없다고 알려진 병에 대한 절망을 담보로 소용없는 약과 근거없는 자연의 힘을 강요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습니다. 결국 진단명 미상이 되어버린 이름모를 병에 걸려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병상 머리맡에 놓인 것은, 약 복용 지도서도 입원환자 주의사항도 아닌 온갖 스님들과 무당들의 전화번호였습니다.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문장은 오래된 격언입니다. 이번 사태 초기에 울려퍼졌던 “방역 영역에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위험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더 늘렸을 뿐만 아니라 허용되는 행동의 폭을 비과학적인 영역까지 포괄하게끔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입에다 소금물을 뿌리는 파국을 불러오는 것을 보았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어버린 비밀 사교단체에 대한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응보에 걸맞다는 생각은 들지만) 끊임없는 비난도 이어졌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요.


물론 우리는 노력과 행운으로 상황을 잘 넘긴 편에 속하지만, 이제는 다른 나라들이 공포에 전염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바이러스의 특성 때문에, 여전히 우리나라에 병이 또 들어와 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짧은 몇 달 간의 경험으로 위험의 정도를 알게 되었으며, 과하다 싶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인 조치만 취할 수 있을 정도로 알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능력이 허용하는만큼 이 병과 바이러스를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완연한 봄기운에도 마스크를 써야 해서 숨 쉴 때마다 땀이 차는 입술과 볼에 약간 짜증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위험에 대한 공포가 아닌 과학과 지식이 알려주는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보여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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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강의
가토 신로 지음, 장윤선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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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말해주듯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관한 해설서이고, 일본 카톨릭 방송이 평신도를 대상으로 마련한 강의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술술 읽히는 것은 아닌데, 깊이있는 독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견해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고백록>의 서사를 선형이 아닌 원형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즉, 불신자가 신자로 변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태어난(즉 존재하게 된) 내가 하나님을 떠났다가(존재를 망각하고) 다시 돌아가며 진정한 나로 존재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고백록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존재증명의 과정이 되며, 입으로 신앙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뼈로" 실존을 말하는 책이 된다.


두번째는 "장소로서의 신"이라는 개념과 신이 머무르는 장소로서의 기억(메모리아)이라는 발상이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 본질을 밝히는 것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신이 어디에 있는지 밝힘으로써 존재와의 관계를 밝힐 수 있다. 신이 어딘가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것은, 머무르는 존재와 머무름을 알아채는 존재 모두를 가정함으로써 존재는 관계를 전제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드러나는 장소가 기억이다. 기억은 나의 존재의 흔적이다. 즉, 내 존재의 이유인 신의 역사하심의 증거다.


그 기억 속 사건들이(즉 역사하심이) 현재의 나를 만들고, 또 지금의 내가 기억이(즉 역시 역사하심이) 되어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기억은 과거이며 현재인 동시에 미래다. 그게 하나님이 세계를 관장하는, 시간이 아닌 시간적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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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지음, 이세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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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철학 전체를 "수양"이라고 하는, 실천의 관점으로 일관되게 정리하는 관점을 보여준다. 이런 시도는, 신화적/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얽혀있는 고대철학의 특성상 신비주의와 영성이라는 (아주 왜곡된) 시선을 드러낼 수 있어서 매우 위험하다. 하지만 이 책은 그 함정을 아주 절묘하게 피해가면서, 고대철학자들의 말이 어떤 실천적 지침을 제공할 의도로 쓰였는지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이 책의 수양 개념은, 글로 쓰고 보면 대단할 것은 없다. 말과 행동을 같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선대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말로 내뱉고, 그 가르침에 일치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렇게 조금 더 고양된 자신의 몸 전체로써 세계에 스스로를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스토아 철학자들도, 에피쿠로스학파도, 회의주의자들도, 나아가 이 세계에 "철학자"로서 존재했던 모든 개인들도 바로 이런 "수양"을 목표로 살았기에 철학자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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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박승찬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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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신학자에 관한 책을 읽어보았다. 마음같아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직접 읽어보고 싶...었으나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아 개설서를 읽어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카톨릭 방송에서 진행된 평신도 대상 강연을 옮긴 책으로, 큰 어려움 없이 술술 읽히는 게 장점이다.


철학의 눈으로 신앙에 접근하다보면 벽에 부딪힌다. 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 이 단계에서 믿음의 논증을 비철학적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대체로 무신론자들이고, 나도 한때 그랬다). 하지만 나는 이런 태도가 "철학적으로" 무례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있다거나 없다는 믿음은 철학적 문제가 아니다. 있다면 왜 있는지, 없다면 왜 없는지 주장하는 과정과 그 안에 담긴 발상이 진짜 철학적 문제다. 신학을 공부하는 건 그래서 신앙인에게도, 비신앙인에게도 의미있는 일이다.


신이라는 무게와 더불어,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건질 수 있는 주제와 신기한 발상은 다음의 개념들과 연관된다: 존재, 자아, 시간, 자연재해를 수용하는 태도, 도덕적 악의 기원, 자유의지의 본질, 전쟁의 정당성, 역사의 의미.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이기도 하다. 이들 개념에 관한 그의 생각이 당연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가 우리에게 준 영향력 때문이고, 독창적으로 느껴진다면 그의 사상의 위대함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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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 미국의 뉴딜 연합 (1928~36년) 정당론 클래식 3
크리스티 앤더슨 지음, 이철희 옮김 / 후마니타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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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부터 1970년까지 미국 선거와 관련된 장기 데이터를 바탕으로, 1930년대 뉴딜 시기 민주당의 우위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 분석하는 책이다.


제1당이 되려면 표를 많이 얻어야 한다. 표를 많이 얻는 방법은 두 가지다. 다른 당 표를 빼앗아오거나(전향), 새롭게 유권자가 되거나 투표를 안하던 사람이 우리 당을 찍게 만드는 것이다(동원). 이 책은 이전까지 공화당이 쥐고 있던 미국 정치의 주도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간 이유가 동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기 선거제도의 변경으로 유권자의 숫자가 기존의 선거 구도를 흔들 만큼 충분히 폭증했고, 첫 투표의 성향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데 바로 이 "폭증한 유권자"들이 첫 투표에서 민주당을 찍었기 때문이다. 즉, 승리하는 정당이 되려면 동원에 중점을 두고 선거 전략을 짜야한다는 주장이다.


재미있는 책이었다. 다만 선거 데이터 분석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어떤 선거전략과 어떤 이슈가 사람들이 민주당을 찍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분석엔 다소 소홀한 측면이 있다. 또한, 유권자의 숫자가 더 이상 폭증하지 않고 또한 적극적으로 동원 전략에 포섭되길 거부하는 유권자층이 상당히 두터운 2019년 우리나라에서 유효한 이론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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