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친절은 어떤 순간에 사람을 무장해제시킨다.
곰곰히 떠올려보면 그런 순간이 한 두 번은 아니겠지만, 지금 내가 기억하는 "어떤 친절"의 순간은 딱 두 번이다. 한 번은 어제 우리은행에서였고, 한 번은 종로경찰서에서였다.
어제 엄청난 통장을 들고 은행문턱에 들어섰다. 공과금수납하기와 계좌이체하기 같은 간단한 업무가 사실은 나에게 좀 어렵다. 이런 지경에 통장 10개를 간수하기란.
한참을 기다려 창구직원을 만날 수 있었다. 나보다 앞섰던 할머니는 업무가 끝나고 나서도 자리를 비켜줄 생각은 않고 창구직원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신다. 요지는 창구직원이 친절하다는 것. 은행에서 고객서비스를 강화하려고 별별 이벤트를 다 하는 와중에 뭐 저 정도의 친절을 가지고 칭찬을 하시나, 하는 까탈스런 고객의 정체성을 가지고 나는 직원을 만났다. '이렇게, 저렇게 이 일이 참 복잡하거든요?'라고 나는 말을 건냈고, 그녀는 미소로서 화답했다.
그 업무를 처리하는 데 족히 30분은 걸렸다.
그녀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고, 깍듯하게 나에게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그런데 망측스럽게도 나는 그 와중에 눈물이 살짝 고이고 말았다. 그냥 그녀가 웃으면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보았을 뿐인데도 마치 나의 큰 짐을 덜어주는 것만 같아 고마웠다.
몇 년 전 종로경찰서에 갔을 때는 더 망측스러웠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업무 때문에 경찰서를 찾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안된다는 경찰관을 붙들고 이야기하기를 한 시간. 자기 권한이 아니라며 송구스러워하던 경찰관이 너무나 안타까워하면서 "다 잘 될 거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터졌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경찰서를 나와 인사동 거리를 헤메고 다니면서도 멈추질 않았다.
어제 은행문을 나서면서 생각해 보았다. 나와 타인이 만나는 어떤 순간. 의도하지 않아도, 그것이 일방적이라고 할 지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소통의 순간. 낯선 타인이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들.
한참 지났지만,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을 보았을 때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햄버거 껍질을 보고 미술작품이라고 추켜세웠다가 망신을 당하는 갤러리 직원 낸시. 쓰레기와 작품 사이의 모호한(모호해져버린)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듯,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불안정한 낸시. 그 여자는 밤에 음란한 채팅을 하면서 성적인 욕구든, 관계의 욕구든 채워나간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채팅의 상대를 만나러 간 낸시는 채팅 상대가 꼬마 아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낸시는 어이가 없었을까? 슬펐을까?
그때 꼬마 로비는 낸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머리칼을 살짝 넘겨준다. 낸시는 로비에게 입맞춤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헤어진다.
하지만, 그 후로 낸시는 로비에게서 영감을 받은 전시회를 열게 되고, 그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일상을 살아간다.
그래, 그런 거다. 어떤 친절은 어떤 순간에 사람을 무장해제시킨다.
눈물을 쏟게 만들기도 하도, 웃게 만들기도 하고. 어쨌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게 되는 신체의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의식적 변화에 의해 사는 게 잠시나마 한결 나아지기도 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어떤 순간에 친절한 타인으로부터 내 감정의 영역을 침범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때에는 은행에서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라는 간단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