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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1월달부터 노동지수가 엄청 높았다. 아니, 언제 안그런 적이 있었나만은.
어쨌든, 가공할 노동에 심신이 지쳐갈 때 쯤, 정이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야금야금 읽으며 약을 올렸드랬다. 프리랜서인 정은 외근이 잦았던 11월, 가끔 나를 찾아와 함께 돌아다녔던 것인데, 나는 일을 하는 동안에 정이 읽는 <여행의 기술>이 그렇게 읽고 싶을 수가 없었다. 정은 가끔 책을 읽다가 괜찮은 구절을 낭독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정이 그 책을 다 읽자마자 뺏어 들어 읽어내렸다.
여행.
혼자 여행을 떠난 것을 여행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내 여행의 역사는 고작 6년에 불과하다. 발신금지의 핸드폰과 보름치의 짐이 들어있던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떠난 2000년의 2박 3일 해남여행이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후로 기회만 되면 여기 저리 떠나곤 했다. 혼자 다닌 여행이 5년.
올해 베트남 여행을 끝으로 나는 왜 여행을 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그리고 나서는 주위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보았다. 함께 떠나는 여행은 사람 수만큼 깊어지기도 하였다. 그게 10월의 일. 그 후로 함께 떠나는 여행에 재미가 들려 틈만 나면 여행 번개를 쳤다. 11월까지 그것만 세 번이다. 그리고 이제, 올해의 마지막 여행, 남해여행 계획을 마치고 한참을 설레고 있는 중이다.
숙소를 예약하고, 무엇을 먹을 지, 무엇을 볼 지, 무슨 책을 가져갈 것인지, 무슨 음악을 들을 것인지, 남해의 날씨는 어떤지, 어떤 길로 가야 운치가 있을 지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을 세운다. 물론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속상할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떠나면 즐거울 거니까.
보통은 여행의 기쁨 중 첫번 째로 "기대"를 꼽았다. 천 표고, 만 표고 다 던진다, 그 말에. 떠남에 대한 기대, 떠남을 위한 준비,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점철되는 여행가기 전의 순간들. 그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있으랴. 지금 나는 기대의 단계에 있다. 이 단계를 충분히 즐기고 싶다.
보통은 얄미울 정도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끄집어 내어 기록했다. 여행에의 기대, 여행지에서의 실망, 여행지에로도 여전히 따라오고만 현실의 고민들, 그리고 여행하면서 느끼는 숭고함, 아름다움과 같은 것들. 마지막으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내 방안에서의 여행에 이르기까지.
보통의 책을 읽으면서 나만의 기쁨을 뺏긴 것 같은 상실감에 잠깐 빠졌다. 비행기, 기차, 버스와 같은 탈 것과 모텔, 유스호스텔, 민박집, 호텔처럼 잠시 머물 곳과 그 보다 더 잠시 머무르는 휴게소에 대한 나의 애정들을 그가 가져가 버린 것같은 생각이 들어버렸으니까.
하지만, 또 다시 여행을 기대하는 지금. 그런 사소한 얄미움은 잊고, 이 기쁨조차 보통과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대범한 생각이 든다. 하하, 여행은 이런 것이다.
* 보통은 얄미웁기 때문에 별 한 개 덜 주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