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족히 반년치의 영화는 될 네 편의 영화를 보았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둔다.

<rec>

김씨와 마씨와 함께 보았다. 공포영화는 질색이지만, 어쨌든 그 질색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으로서라도 공포영화와 직면해야 할 일. 마땅히 시간이 맞는 영화도 없었고, 이 영화를 안볼 경우 마씨가 너무나 실망할 것이 자명하여 반자발적으로 선택한 영화, rec.

<블레어 위치>나 <클로버필드> 따위의 영화를 내가 섭렵하면서 살 일은 전혀 없었기에 <rec>의 1인칭 카메라는 완전한 공포이자 새로운 충격이었다. 다만 다행이었던 것은 카메라를 정말 배우가 찍었을까 카메라 감독이 찍었을까에 대한 생각에 빠져 내용에 그닥 몰입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

세상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없으니 좀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비한테 물리면 금방 애비애미도 몰라보게 된다니 좀비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타인의 삶>

그것이 일이 되었건, 취미가 되었건 누군가를 지켜본다는 것.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 하는 것을 통해서 타인을 알아간다면, 즉 타인 스스로가 자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나의 관점으로 타인을 해석하다보면 '알고 보면 나쁜 사람 하나 없다'라는 말에 무릎을 턱 치게 되고야 마는 순간이 찾아오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타인을 해석하는 법을 조금씩은 알고 있다. 이를테면 짝사랑이던지 하는 것들. 관찰을 통해 얻어지는 과도한 이해나 과도한 동경. 그에 따르는 역시 과도한 자기 합리화. 이 영화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으나, 우리의 도청인도 별 다른 과정을 밟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찰을 통해 알게 되는 타인의 일상, 타인의 사고, 타인의 미래 같은 것들. 그리고 이어지는 자신만의 희곡, 자신만의 선행 같은 것들.

다행인 것은 시간이 흐른 후에 우리의 피도청인이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고, 그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않았다는 것일 거다. 이런 식으로 타인과 교감하며 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다행일까.

* 타인의 삶을 볼 때 사실 rec을 볼 때보다 훨씬 무서웠는데, 물리면 자기 정체성과는 끝장인 좀비보다 자기정체성을 끊임없이 검열해야 하는 공포정치가 훨씬 무서운 게 당연했기 때문.

<브로큰 플라워>

이런 식의 농담, 너무 좋다. 키득키득거리며 보았던 영화. 나도 여름휴가 기념으로 분홍색 꽃다발을 들고 옛날 애인들이나 순회방문해볼까. 그러나 헤어진지 최소 20년은 지나야 유효할 계획이라는 판단. 아직까진 인생에 너무나 변동이 많은 시기니까.

기대와 오해( 아니면 이해?)가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재밌는 보고서, <브로큰 플라워>.

* 돈이 옛 애인을 향한 여행을 떠날 때, 윈스턴이 챙겨주었던 여행용 음악 CD는 여행갈 때마다 나에게 CD를 챙겨주었던 마군을 떠올리게 했다. 새삼 마군아, 고맙군하. 

 

<무지개 여신>

나도 모르게 나만을 오랫동안 좋아해왔던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언젠가 내게 그 고백을 했으면 좋겠다, 뒤늦게 그걸 깨닫고 마음 아팠으면 좋겠다.... 와 같은 로망. 뭐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경험에 의하면 그렇게 애달프거나 하지도 않는다는 것. 그냥 청춘의 어떤 시기에 관한 드라마 정도, <무지개 여신>은.

이 영화를 본 날, 한밤에 음울한 음악을 들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이렇게 단언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절정으로 우울에 탐닉하는 시절은 지나갔다는 것. 우울한 일이 생기면 우울해지겠지만, 그건 실제로 그러해서 그런 것일 뿐, 우울의 정서를 내가 더 이상 즐기지는 못할 것 같다는 것. 뭔가를 상실한 것 같은, 하지만 꼭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

*** 한 줄 요약

<무지개 여신>이 <타인의 삶>의 <브로큰 플라워>를 <rec>하다. 한때 기이한 무지개와 같았던 청춘이 우연히 타인의 삶을 만나고 스스로 일정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상실한 어떤 것, 이를테면 분홍색 꽃다발 같은 것들을 기록하거나 기억해내지만 결국 스스로도 시간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정도로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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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그러니까 3월 24일 저녁에 다큐멘터리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보았다. 과거의 어떤 사실은, 그만큼 혹은 그 이상 현재를 지배한다.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이가 말하듯이, 따라서 과거의 어떤 사실은 그때 느꼈던 나의 감정과 더불어 덧붙여지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하긴, '사실'이란 것이 얼만큼의 크기와 모양새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별도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해해온 나로서 이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라는 - 종종 '사실'과 '객관'으로 포장되지만, 실은 주관적인- 역사서술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리하여 이 감독은 그것을 어떻게 완성했는지 보고 싶었다. 

 

과거의 어떤 사건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사실'이라 믿고 있는 어떤 사건을 인터뷰이가 말할 필요는 없다. 요컨대, 조금 과장하자면 모든 이야기는 사실 '현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다큐가 단지, 이 과장된 명제를 스크린 위에 구현하고자 한 것이라면 나는 너무나 아쉽겠다. 그러나 더 아쉬운 것은 나의 이 가정이 아마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본인이 원한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아마도 거시적인 것에 한동안 지배당했을 감독은 참으로 미시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로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하려고 애를 쓴다. "버스에서 도시락 김치국물을 흘린 적이 없습니까?", "그 날 거리의 사람들의 표정은 어땠습니까?" 이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날의 날씨와 그날의 기분과 그날의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그 어떤 사건을 현재에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부분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어의 목소리에 이펙트를 넣어가며 마치 천상에서 울려퍼지는 조물주의 말씀처럼 그것들을 그렇게 물어야 했는가, 라는 부분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움직임이 없는 카메라와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한 인터뷰이까지는 괜찮다.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불편함. 그 사이에서 관객과 감독과 인터뷰이는 시나브로 각자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그래, 적당히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졸졸 시냇물이 흐르는 현장음이 고스란히 포함된 인터뷰이의 대답과  현장음을 제거하고 웅웅 이펙트를 넣은 감독의 질문, 그것은 대체 뭐냔 말이다. 그 어떤 대단한 역사를 재구성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방식은 절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어떤 '불편하게 하기'의 일환이었는지 굳이 캐고 싶지도 않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거절했을 인터뷰에 응한 인터뷰이의 증언(!)을 녹취하고 편집하면서 이렇게 해괴하게 금긋기를 할 수 있는 그 과감한 용기에 놀랄 뿐이다. 게다가 성찰인지 무엇인지 해석불가한 (혹은 해석따위 하고 싶지도 않은) 감독 스스로의 인터뷰를 마지막에 삽입하는 센스까지.

이러한 해괴망측한 불편함 사이에도 이 다큐에 미학이 있다면, 오직 하나, 무례하고 오만한 질문, 그것도 과거의 어떤 상처에 대한 질문에 취조당하듯 대답하는 인터뷰이의 얼굴 표정이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과거와 직면해야 하는 순간, 변하는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들. 차라리 <고통을 직면하는 인간의 표정에 관한 연구> 따위로 제목을 붙였다면 많은 부분,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미사여구와 현학적 단어들로 이 다큐를 포장한다 해도 내가 이 다큐멘터리를 욕할 수밖에 없는 건, 단 하나. 감독이 본인의 고통만큼 타인의 고통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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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일 아침. 집을 나서는데 "아, 겨울이 끝났구나"라고 저절로 느꼈다. 왠지 모를 아쉬움에 출근길이 허전했다. 오들오들 떨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추운 날씨가 그리웠다. 추운 걸 못견뎌 했으면서도 막상 봄이 된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건 대체 무슨 바보같은 생각일까. 항상 이런 식으로 계절의 변화를 맞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남산에 올랐다. 수요일의 바보같은 아쉬움을 놀리기라도 하는듯 뺨이 얼얼하게 바람이 매웠다. 그래도 또 며칠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폭한 날씨가 되겠지. 나뭇가지는 기다렸다는 듯 꽃망울을 펑펑 터뜨리겠지. 낙엽이 덮힌 땅 사이 사이로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겠지. 이렇게 또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그러다 어느날 아침 갑자기 후덥지근해진 공기를 느끼고는 지난 봄을 그리워하겠지.

- 불규칙했던 나의 일상이 조금씩 규칙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드는 가벼운 불안감. 그것들도 계절이 변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누군가는 규칙적으로 변해가는 나의 일상을 보며 어른의 세계로 가버린 것 같다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좀 담담해지려고 한다. 이번에는 좀 담담하게 이런 시간들을 가져보려고 한다.

- 열에 들뜬 밤처럼 뜨겁던 날들이 지나고,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날들이 남았다. 그리고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이 평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 계절이 바뀌는 이상한 기운, 불규칙 속에 자리를 트는 새로운 규칙들, 평온함을 가장한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마음. 이 시간이 지나면 뭔가 다른 시간들이 온다는 걸 이제 알겠다. 이 야릇한 시간이 지나면 나는 또 달라져 있을 거다. 어떻게 달라져 있을 것인가가 두렵긴 하지만, 정체되어 있지 않다는 안도감이 더 크다.

- 엄마는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고, 나는 대체로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룸메이트는 내 삶이 너무 날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고, 나는 대체로는 그렇지가 않아서 괴롭다. 

- 이 모든 것들이 2008년의 봄을 기다리는 나의 상태이다.  대개의 경우에 나는, 아직도 잘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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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프트를 원했건만, 쉬프트를 위한 그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미천한 인간을 위해 신은 시간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술을 마시고, 샤워를 하고, 청소나 설거지를 하는 동안 시간은 흘렀다.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들을 하는 데에만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물론 최소한의 것들을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결심을 해야하긴 했지만, 결국 그 시간들은 용기따윈 없는 생활인에게 쉬프트보다는 훨씬 감당할만한 노멀한 프로세스를 따르게 하였고, 마침내 더 이상 스스로를 볶아치지 않아도 되는 어떤 상태에 이르게 했다. 이 수동태와 싸구려 단어로 점철되는 형편없는 문장. 실은 이것이 현재 나의 상태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러나 다행인 일인 것이다.

금연이 아닌 휴연, 식생활의 정상화를 찾기 보다는 그저 개수대에 설거지를 쌓아놓지 않겠다는 것, 벗어 놓은 옷은 바로 제자리에 걸어놓겠다는 것, 매일이 아닌 이삼일에 한 번 공부하겠다는 것과 같은 대단치도 않은 계획들. 이 사소한 계획들을 지키는 데에도 끙끙거릴 정도로 일상생활의 질서를 잃은 성인이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는 변태적 쾌감.

시간이 만들어 준 평범한 과정을 따라갔던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얻은 것은 현재 나의 모습에 대한 3D맵. 그리고 마음의 평화. 쫓기듯 떠났던 2박 3일의 여행보다 값진 결과. 이건 결코 나쁘지 않다,에 체크할 문제는 아니라고 자족하는 수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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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에 내려 앉았다. 그리고도 더 가라앉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나 바보같다. 마치 1997년의 초여름날처럼 초라하고 볼품없다. 결코 그런 일은 없겠지만, 누군가 건들면 바삭 부서져 내릴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고 가만히 누워있다가 베개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있었다. 바람이라도 쌩쌩 불거나, 햇빛이라도 쨍쨍 내려쬐이거나, 폭우가 쏟아져 내리거나. 다른 지구 사람들 생각할 것 없이, 내게만. 너무 덥거나, 너무 춥거나, 너무 졸립거나, 너무 피곤하거나, 너무 더럽거나 그래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내가 괴롭다.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꽉 감고,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면 될 거라고, 그렇게 바보같은 낙관을 하고 있는 게 바보같다. 지금의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바보, 바보상태. 이 바보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또 이 바보밖에 없다는 최고의 바보 아이러니. 이 바보가 바라는 건 쉬프트쉬프트쉬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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