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그러니까 3월 24일 저녁에 다큐멘터리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보았다. 과거의 어떤 사실은, 그만큼 혹은 그 이상 현재를 지배한다.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이가 말하듯이, 따라서 과거의 어떤 사실은 그때 느꼈던 나의 감정과 더불어 덧붙여지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하긴, '사실'이란 것이 얼만큼의 크기와 모양새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별도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해해온 나로서 이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라는 - 종종 '사실'과 '객관'으로 포장되지만, 실은 주관적인- 역사서술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리하여 이 감독은 그것을 어떻게 완성했는지 보고 싶었다. 

 

과거의 어떤 사건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사실'이라 믿고 있는 어떤 사건을 인터뷰이가 말할 필요는 없다. 요컨대, 조금 과장하자면 모든 이야기는 사실 '현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다큐가 단지, 이 과장된 명제를 스크린 위에 구현하고자 한 것이라면 나는 너무나 아쉽겠다. 그러나 더 아쉬운 것은 나의 이 가정이 아마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본인이 원한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아마도 거시적인 것에 한동안 지배당했을 감독은 참으로 미시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로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하려고 애를 쓴다. "버스에서 도시락 김치국물을 흘린 적이 없습니까?", "그 날 거리의 사람들의 표정은 어땠습니까?" 이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날의 날씨와 그날의 기분과 그날의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그 어떤 사건을 현재에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부분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어의 목소리에 이펙트를 넣어가며 마치 천상에서 울려퍼지는 조물주의 말씀처럼 그것들을 그렇게 물어야 했는가, 라는 부분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움직임이 없는 카메라와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한 인터뷰이까지는 괜찮다.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불편함. 그 사이에서 관객과 감독과 인터뷰이는 시나브로 각자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그래, 적당히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졸졸 시냇물이 흐르는 현장음이 고스란히 포함된 인터뷰이의 대답과  현장음을 제거하고 웅웅 이펙트를 넣은 감독의 질문, 그것은 대체 뭐냔 말이다. 그 어떤 대단한 역사를 재구성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방식은 절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어떤 '불편하게 하기'의 일환이었는지 굳이 캐고 싶지도 않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거절했을 인터뷰에 응한 인터뷰이의 증언(!)을 녹취하고 편집하면서 이렇게 해괴하게 금긋기를 할 수 있는 그 과감한 용기에 놀랄 뿐이다. 게다가 성찰인지 무엇인지 해석불가한 (혹은 해석따위 하고 싶지도 않은) 감독 스스로의 인터뷰를 마지막에 삽입하는 센스까지.

이러한 해괴망측한 불편함 사이에도 이 다큐에 미학이 있다면, 오직 하나, 무례하고 오만한 질문, 그것도 과거의 어떤 상처에 대한 질문에 취조당하듯 대답하는 인터뷰이의 얼굴 표정이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과거와 직면해야 하는 순간, 변하는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들. 차라리 <고통을 직면하는 인간의 표정에 관한 연구> 따위로 제목을 붙였다면 많은 부분,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미사여구와 현학적 단어들로 이 다큐를 포장한다 해도 내가 이 다큐멘터리를 욕할 수밖에 없는 건, 단 하나. 감독이 본인의 고통만큼 타인의 고통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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