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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관순이라는 이름을 처음 본 건 몇 달 전 문산(내가 사는 교하와 함께 파주시의 일부인) 부근 어느 담벼락에 붙은 현수막에서다. “문산여고 3학년 지관순양 43대 골든벨!” 방송 날짜는 한 달 쯤 후라고 적혀 있었는데 챙겨보진 못했다. 지난 연말에 여기저기서 올해의 인물로 등장하는 걸 보고 그 후로 아주 많이 유명해진 걸 알았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까지 잘하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초등학교를 못 다닐 만큼 가난한 소녀가 이룬 작은 승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그로 인해 기쁨을 느끼는 이웃들의 자랑스러운 벗이 될 것인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그의 작은 승리는 이웃들을 추억으로 남기기 위한 출발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개천에서 난 용'의 행로는 대개 그렇다.

아버지 지씨는 지양이 골든벨을 울린 데 기뻐하면서도 “사람 되는 일보다는 공부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 같다.”며 걱정부터 했다. 공부를 잘 한다고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평소 소신 때문이다. 최근 부쩍 늘어난 주변의 관심도 부담스러운 듯했다. 지씨는 “관순이에게 한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학교 자율학습도 고3이 되어서야 담임 교사의 끈질긴 설득 끝에 저녁 7시까지만 시키고 있다. 지양은 대신 집에 돌아가 집안일은 물론 마을 이웃 일을 돕는다. 지병에 시달리는 이웃 어르신들을 위한 빨래도 관순이의 몫이다. 오리를 기르는 지씨는 자신도 생활보호대상자인데도 사육장에서 나오는 오리알은 몇년 전부터 인근 의료원과 요양소 등지에 수용된 오갈 곳 없는 환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지씨는 “관순이가 학자보다는 의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동안 살면서 공부 좀 했다 하는 사람 치고 곡학아세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세상에 대학생은 많지만 의인은 없습니다. 본인이 공부를 계속하겠다면 막지 않겠지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묵묵히 봉사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어제 우연찮게 읽은 지난 신문 기사에서 나는 지관순 양이 매우 반듯한 의식을 가진 청년이며 그 배경엔 그의 아버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에 가난한 아버지는 많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가난하면서도 자식에게서 존경받는 아버지는 없다. 영혼이나 사랑까지 사고파는 세상에서 가난한 아버지는 자식의 인생을 해치는 죄인에 가깝다. 그러니 지관순 양과 그 아버지의 경우는 참 특별하다. 딸을 초등학교에 못 보낼 만큼 가난한데다 “의인”이니 “곡학아세”니 하는 지사적 언어(요즘 젊은이들이 구리디 구려하는)를 사용하는 아버지와 2004년의 딸 사이에 흐르는 믿기 어려운 존중은 말이다. 한 가지만 짐작한다면 그 아버지는 제 딸을 단지 말로 가르친 게 아닐 것이다. 말로는 그렇게 되기 어렵다. 그는 제 딸에게 ‘살아 보인’ 게 틀림없다.

                                                                                                              -Gyuhang.net 에서 퍼왔습니다.

말이 아닌 살아보이기. 말은 쉽고 살아보이기는 어렵다. 반듯한 의식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할수 있도록 배경이 되는 어른이 되어야 할텐데 그 '살아보이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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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6 1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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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건달과 냉소의 카르텔
-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김광준(부산대 경제학과 4학년)

 

김규항의 틈

먼저 분명히 할 점이 있다. 이 글은 김규항의 글 중에서도 ‘비실명 지식인 비판’ 의 글들에 대한 의문이며 김규항의 주장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씨네21』이라는 잡지에 묶여 나갈 때의 ‘상황’에 대한 의문이다. 부디 개인적인 체험이기를 바라지만, 내가 대학에서 경험해야 했던 김규항에 대한 완벽한 오독(誤讀)들을 아무래도 그에게 들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본능적인 감수성이 집약된 칼럼 모음집이 『B급 좌파』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대학가에서 소리 소문 없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규항의 그 보석 같은 글쓰기의 틈새를 메워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대학 사회에서 김규항이라는 필자의 인기는 상당하다. 그는 99년 연세대 총학생회에서 선정한 ‘가장 만나고 싶은 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뽑혔고, 여러 대학에서 강연 초청을 받는가 하면, 대학 인터넷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논쟁들 속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어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물론, 김규항이 지식인 사회에 쏟아붓는 독설들은 건달만이 내뱉을 수 있는 위력적인 일격이다. 김규항은 참으로 ‘위선에 대한 혐오에 관한 한 제일(강준만)’이며, ‘진지한 주제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비장미의 소유자(고종석)’ 이며, ‘언어의 여의봉을 휘두르는 불가사의하고 흥미진진한 캐릭터(최보은)’ 인 것 같다.

건달과 똘마니

나의 의문은 조금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적인 사랑의 두께가 없다면 태평양 같이 넓은 세계관의 차이로 서로 친하게 지낼 이유가 없는 나의 오랜 친구가 난데없이 김규항 예찬론을 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1997년 대선 당시 부산의 한나라당 이회창 선거운동캠프에서 유니폼을 입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회창! 이회창!”을 연호한 경험이 있다. 즉 자신의 정치적 입장 따위는 일당 이만 원보다도 하찮게 생각하는 인간이다. 내가 보기엔 정치적 입장이 ‘없다’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지만 스스로는 언제나 정치를 ‘혐오한다’라는, 강한 정치색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친구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영화”라고 주장할 만큼 영화를 좋아하여 『씨네21』을 열독한다. 그런데 거기서 접한 김규항의 글에 취해 “이 사람 대학만 달랑 나와서 삼십대 중반에서야 글쓰기 시작했데. 글이 이렇게 통쾌하고 맛있을 수 있니”라며 감동 어린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이었다. 친구는 ‘B급 좌파’라는 말이 너무 멋있어서 “나도 오늘부터 B급 좌파라고 불러줘”라고 이야기했지만, 정작 그는 민주노총이 뭐 하는 단체인지도 알지 못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 강의실에서의 일이다. 학생들이 나름대로 정한 주제를 갖고 릴레이 발표를 하는 수업에서 나는 또 난데없이 김규항의 이름을 접하게 되었다. 한 학생이 “인상깊게 읽은 글입니다”라는 짧은 소감과 함께 글을 그대로 읽어내려 갔는데 내게도 낯익은 글이었다. 뒤에 확인해보니 그 글은 김규항이 부친에게 『태백산맥』을 읽어보길 권했다는 에피소드에서 시작해, 점차 지식인 비판으로 결론짓는 <리얼리즘은 리얼하다>라는 칼럼이었다. 곧 이어 “저는 아직 『태백산맥』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거 안 읽으면 교양인이 아닌 듯 무시하는 대학생들은 참 싫습니다”라는 발표자의 소감을 덧붙였다.

『태백산맥』을 안 읽어본 게 뭐 그리 나쁜 일이기야 하겠냐만, 『태백산맥』 안 읽었다고 ‘교양인이 아니다’라고 욕하는 저능한 대학생들이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이건 혹시 그 학생의 자격지심이 아닐까? 발표 학생은 자신 역시 김규항의 팬이라고 밝혔는데 웬 건달에게 팬이 이렇게 많은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이 팬들의 상당수는 ‘김규항식 비약’을 즐기며, “한국의 지식인들은 역겹다”라며 슬쩍 오버(over)하는 것에 재미를 들인 듯하니 이게 웬일인가?

그러니까, 나는 김규항이 쓰는 대부분의 글들에 별다른 이견이 없으며 여타의 매체에 쓰는 글들이나 인터뷰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배우고 공감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의 진위여부를 가리기엔 경험이 일천하고, ‘그 바닥’의 생리를 김규항만큼 체감하지는 못하므로 그저 ‘매우 솔깃하게 들리는 정도’라고 말함이 옳겠다.

논의를 구체화시켜서,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씨네21』이라는 대중영화잡지에서 지식인 개인에 대한 실명 비판의 방법이 아닌 ‘지식인 집단’에 대한 김규항의 글들이 무정치적인 대중에게 흘러들어갈 때 이것이 어떤 오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998년 3월, 칼럼 집필 초기부터 집요하게 시작된 지식인 집단에 대한 김규항의 분노는 최근의 8월에 개재된 <진리는 쉽다>라는 칼럼에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나는 뭔가 조금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진리가 쉽나?

“……‘진리를 쉽게 전달하긴커녕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진리조차 최대한 알아먹기 어렵게 만드는 데 혈안이 된 듯한 지식인들의 희한한 행태는 실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1)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진리를 알아먹기 어렵게 전달하려 했다면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 김규항은 ‘혈안이 된 듯한’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생각이 (오랜 경험에 의한) 추측임을 슬쩍 드러내는데, 이것을 글쓰기상의 기술로 여유 있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김규항이 실명 비판을 하지 않음으로써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수사법으로 보는 게 더 올바른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실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라는 결론으로 넘어가는 건 웬일일까? 자신의 ‘추측’이 그것을 ‘방증’하고 있다니. 사실 이것이 일종의 ‘김규항식 비약’인데, 이와 같은 글쓰기의 수사는 김규항 칼럼의 많은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의사 사회를 비판하는 칼럼의 마지막 문장은 “돌팔이는 의사였고 나는 돌팔이 이후 돌팔이보다 나은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2) 이다. 이 칼럼이 나간 이후 김규항은 의사 집단으로부터 많은 항의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글쓰기의 묘를 이해하지 못한 의사들의 독해력 부족이라 가볍게 넘기는 것은 올바른 반박이 아닌 것 같다. 말하자면 김규항이 그의 글에서 자주 즐기는 비약의 효과는 독자들의 감동을 끌어내는 데는 유용하지만 해당 집단에 대해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과잉된 시각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쉽다>라는 칼럼이 나가자 바로 다음 호 『씨네21』에는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김규항 글에 대한 완곡한 반론이 실렸는데 나 역시 정윤수의 말처럼 “진리란 어려운 것이며 그것을 쉽게 전달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3)이라 생각한다. 정윤수에게서 힌트를 얻자면, 김규항은 종종 ‘진리’와 ‘상식’을 (고의로? 전략적으로?) 혼돈하거나 구분하려 하지 않는 듯하다. 이를테면, 『조선일보』와의 싸움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 아닌가. 『조선일보』 문제에 무감각한 지식인들은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이라 비판해야지, 진리연하며 으스대는 사람들이라 비아냥거리는 건 마땅한 비판마저도 오독하게 만드는, 논의의 층위가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말이다. 아닌 말로, 진리가 그렇게 쉬운 건데 우리는 왜 아직 진리는커녕, 상식도 통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을까?

‘전투적 자유주의자’와 ‘B급 좌파’의 차이

강준만과 김규항. 그 외 몇몇 이름과 함께 이들은 한국 지식인 사회의 비판과 내재적 각성을 지속적으로 촉구해온 최전선의 필자들이다. 그러나 강준만과 김규항의 글쓰기 방법에서의 뚜렷한 차이는 실명 비판의 유무이다. 물론 김규항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를 통해 박노해, 김지하, 박광수, 조혜정, 박원순, 김영하 등에 대해 나름대로 실명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규항의 칼럼에서는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식인’이라는 집단명사의 주인공만 등장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며 내가 문제삼고자 하는 부분도 이것이다. 읽고 나면 속이 시원한 것 같긴 한데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혹은 실명이 없다보니 “그런 지식인이 과연 있을까?”하는 순진한 의문도 곁들여진다. 가끔은 이 사람들이 (김규항이 곧잘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김규항만의 가상세계에 등장하는 지식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는 김규항에게 강준만식의 글쓰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내가 김규항에게 원하는 것은 강준만이 당당하게 떠안으려는 ‘책임’이다.4)

『씨네21』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결국 이걸 문제삼는 가장 큰 이유는, 김규항의 ‘비실명 지식인 비판’은 『씨네21』이라는 배달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 칼럼이 좌파 정치조직의 기관지와 『씨네21』이라는 잡지에 실릴 때의 차이는 확연하지 않은가? 『씨네21』이 어떤 잡지인가? 1995년 창간 이후 국내 주간지 시장을 평정해버린 가장 유명한 대중문화잡지 중의 하나가 아닌가? 이 잡지는 특정한 정치색을 지닌 독자를 요구하지 않는다. 가장 넓은 세대와 가장 넓은 계층을 아우르고 있는 대표적인 잡지가 『씨네21』이다. 문제는, 과연 스스로 ‘B급 좌파’를 표방하는 김규항이 이와 같은 대중잡지에서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채 모종의 ‘지식인 집단’을 향해 독설을 퍼부어 댈 때, 그것이 『씨네21』의 독자들에게 걸러진 채 소화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정확한 통계를 알 수는 없지만 『씨네21』의 주요 독자들을 대학생 계층으로 본다면, 가뜩이나 근거 없는 정치혐오증과 ‘지성인 콤플렉스’에 싸여, 갈수록 세상에 대한 응석받이가 되어가고 있는 대학 사회의 독자들은 과연 김규항의 집필 동기와 무리 없이 만날 수 있을까? 물론 ‘1페이지’라는, 지면상의 한계도 있겠지만 그런 만큼 김규항의 일기장에나 등장할 만한 어떤 ‘집단’에 대한 짜증은 조금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란이 『씨네21』 속에 낀 독립된 ‘삐라’는 아니지 않은가.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이 비실명으로 이루어질 때, 김규항이 혐오했던 위선자들은 김규항의 글을 수신하지 않으며, 김규항의 정당한 분노는 그토록 사랑하는 민중들에게 ‘지식 그 자체에의 짜증’으로 변종-전이된다. 지난 봄, 일명 ‘월장사태’에서 한 예비역이 김규항의 글을 감탄해서 인용하며 진중권에게 “지식인 놈들이 다 그렇지 뭐”라고 비아냥거리던 풍경에서 나는 아찔해진다.

김규항과 대학 건달들의 이상한 동감

대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PC 통신의 시대에서 지금의 인터넷 시대까지, 지금의 20대는 글을 읽는 것보다는 글을 쓰는 것(정확히 말하자면 ‘활자로 말을 하는 것’)에 익숙하고 그것을 즐기는 세대이다. 내적으로 숙성된 논리를 풀어내기보다는 즉자적인 감정의 배설에 익숙하며 승패를 가리는 것을 즐기면서 극히 자기 보호적인, 한껏 냉소적인 세대들이다. 나는 여전히 이것은, 대학 도서관의 대여 리스트 10위권의 반 이상을 판타지 소설로 채우고, 도서관을 가상현실 공간으로 만들어버리는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평균 독서량과 독서수준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고급영화정보잡지’로 자신의 교양도 확인하고, 유행하는 정보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발버둥치면서 말이다. 일 년에 책 한 권 제대로 안 읽는 사람이 ‘책에는 진리가 없어’ 라고 말하는 건 참으로 넌센스가 아닌가? 물론 나는 괜한 숭문주의(崇文主義)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책이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어도 책만이 말해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쟎은가. 김규항이 자주 인용하는 좌파 선현들은 김규항이 책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닌가? 그람시가 김규항의 동지나 술친구는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김규항의 유려한 지식인 비판은 대학 사회의 지식혐오증에 좋은 면죄부가 되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직 젊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에 대한 충격적인 냉소가 아니라 충격적인 지식(인) 그 자체이다. 공연히 『씨네21』이라는 ‘젊은’ 잡지로 대중의 냉소를 부추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와중에 쌓여 가는, 대중들의 지식혐오와 인문학에 대한 달뜬 조롱에 대해 김규항은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김영민의 말처럼, 이제는 소수의 권력자나 지식인들을 가볍게 기명한 채 익명 속으로 숨어 버리는 다중의 타성을 혁파해야 할 때가 아닌가.

건달의 도(道)

너무 작은 부분을 너무 크게 부풀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김규항의 독설이 『씨네21』이라는 잡지로 배달될 때 그것은 엉뚱한 오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며 ‘김규항식 비약’을 글쓰기의 묘로 여유 있게 받아넘기기엔 한국 대중의 유머감각이 다소 부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연 김규항의 칼럼만 읽은 독자들은 김규항의 ‘깊은 뜻’을 그대로 수신하고 있을까? 김규항의 칼럼엔 왜 종종 주인공이 빠져버려 ‘한놈만 패며 맞짱뜨는’ 건달의 도(道)가 지켜지지 않을까. 지식인 사회 전반에 걸친 김규항의 ‘짜증’에 도매금으로 처리되는 우리의 몇몇 가난하고 진지한 지식인들은 어떻게 책임져야 할까. 『씨네21』이라는 고급영화정보잡지 독자들의 강퍅한 문화교양의 욕구에 김규항의 소중한 독설은 제대로 접합되고 있는가.

평범한 사람에게는 아무도 욕하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다. 김규항은 스스로 ‘건달’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우지만, 세상의 모든 건달이 『씨네21』이라는 대중잡지에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건달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건달이다. 건달이든 먹물이든, 평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대 사회적 지면을 획득한 건달이 책임을 지는 방법은, 적극적인 실명 비판을 통해 논쟁의 한 가운데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그는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왕따’가 될 것이다. 아니면 실명 비판이 아닌 글은 최소한 『씨네21』이라는 대중‘교양’잡지에서는 조금 삼가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썩었다”라는 주장 자체가 다중의 ‘교양’이 되어버린다면 좀 끔찍하지 않나?

우리에게는 참으로 스승이 필요하다. 물론 쉬운 말로 세상을 설명해주는 스승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능력이 없어서’ 어렵게 말할 수밖에 없는 진지한 스승이라도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정말 강단이라도 좋다. 좌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아직도 강의 첫 시간에 “빨갱이들은 내 수업 듣지마”라며 고함지르는 노쇠한 극우반동 지식인들에게 학점을 구걸하고 미래를 저당 잡힌, 젊은 건달들의 희망이다.


<각주>
1) 김규항,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진리는 쉽다>, {씨네21}, 2001년 7월 31일, 100면.
2) 김규항, {B급 좌파}(야간비행, 2001), 220쪽.
3) 정윤수, <진리는 어렵다>, {씨네21}, 2001년 8월 7일, 100면.
4) 『B급 좌파』 출간 이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김규항 자신이 밝혔듯,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 칼럼에서 이진경이라는 '영재아'를 추측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나 역시 온갖 개념과 추상으로 도배된 글들을 읽는 것은 현기증 나는 일이다. 그러나 김규항이 1쪽 짜리 싸늘한 냉소로, 그것도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유려한 짜증'을 내는 것은 아무래도 소심해 보인다. 나는 정말로 김규항이 이진경을 실명으로 자극하게 될 수 있길 바라며, 이 건달과 영재아의 논쟁은 지식인의 사회참여 방법이라는 해묵은 문제에 대한 작은 실타래를 풀어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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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간달프 > [박노자] '왕따', 획일을 강요하는 자본의 몬스터

'왕따' 획일을 강요하는 자본의 몬스터
인권 특강은 국가인권위가 직원들을 대상으로 매월 실시하는 특강으로, 박 교수의 강의는 지난 7월 6일 진행됐다. 박노자 교수는 오슬로 국립대 한국학 교수를 맡고 있으며, <당신들의 대한민국> 등의 저서를 낸 바 있다.

정리: 월간 <인권> 편집부

▲ 강의하는 박노자 교수
ⓒ2004 인권위 김윤섭
먼저 제가 왜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집단 따돌림이라는 주제를 택했는가에 대한 ‘변명’의 성격이 짙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소련이 망할 때까지 소련 사회의 가장 큰 인권 문제로 생각한 것이 이른바 양심수였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체제가 망하고 나서, 옐친 체제로 접어든 후 체첸 독립운동 투사를 잡아 둔 것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양심수는 거의 없어지게 된 겁니다.

러시아 사회의 일상적 인권 유린

그런데도 시민들이 몸으로 겪는 인권 상황은 대단히 악화되었습니다. 사회가 빈곤해지는 과정에서 과거의 중산층 대부분이 빈곤층으로 추락하고, 인간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혔기 때문입니다. 즉, 연금 생활자들이 연금으로는 연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집에 있던 책이나 잡동사니를 지하철역에서 파는 그런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현재 러시아의 상황입니다.

노점상들은 경찰한테도 괴롭힘을 당하고, 뒷골목 깡패들에게도 갈취를 당합니다. 자릿세를 내지 않으면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기업 입사 과정에서는 여성이 입사를 원하는 경우, 이른바 성상납은 불문율입니다. 대다수의 여성들이 취업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성상납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 언론에서 이를 다룰 때는 일종의 낭만적인 에피소드로 거론하지 인권 침해 문제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사회가 폭력화되면서 가장 나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중산층 가정의 아동과 청소년들입니다. 집단싸움이 일반화되었고, 빈민 거주지역의 공교육 기관들은 집단싸움과 마약밀매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에도 국가적 인권 보호 기관이 존재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을 갖지 않고 실제로는 사회의 극단적인 폭력화를 방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가에 의한 인권 탄압을 지적해도, 국가의 경제실책이나 언론의 오도(誤導)로 인해 황폐화된 사회의 인권 유린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국제 인권단체들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대단히 아쉽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일반인에 의한 인권 유린의 한 형태를 말씀드리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집단 따돌림이란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길어진 변명이지만 이제 조금씩 본론으로 들어갈까 합니다.

한국에서 집단 따돌림을 다루는 석·박사 논문들이 꽤 있는데, 대개는 집단 따돌림 현상을 개인적인 문제로 다루려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경향이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문제를 더욱 더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갖고 있습니다.

1998년에 교육개발연구원에서 학생들에게 집단 따돌림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87%가 “튀는 행동을 해서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얘기입니까. 똑똑한 척한다, 남보다 아는 척한다 등을 지목한 것 같은데, 남과 다르게 행동한다면 집단 따돌림당하기 쉽다는 얘기입니다. 최근엔 직장인들의 집단 따돌림 현상에 대한 여론조사도 있었는데, 역시 튀는 행동이 집단 따돌림의 한 원인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집단 따돌림당하는 이유가 이와 같다면, 집단 따돌림은 사회문제라는 견해를 지울 수 없습니다. 한국의 집단 문화를 문제삼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국의 집단 문화는 남과 다른 행동, 남과 다른 외모까지도 포용하지 않습니다. 집단 차원에서 상처를 주는 폭력이라는 것이 군사주의적인 집단 문화와 상당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한국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근대 지상주의적 집단 통합의식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근대 지상주의란 ‘서구 표준’과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불인정, 괄시를 말합니다.

한국 사회, ‘서구 표준’과 다른 것을 불인정

예를 들면 한국 직장인 가운데 턱수염이나 콧수염을 기르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면도 문화가 생긴 개화기 초에는 면도를 한 사람은 근대적인 문명인이었고 수염을 기르는 사람을 전근대적인 야만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지금도 수염을 기른다는 게 너무 ‘튀는 행동’이라고 취급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비교적 자율적이라는 교수집단에서도, 한복을 입거나 수염 기른 사람을 이상하게 대한다는 것이 제가 감지한 분위기였습니다.

결국 ‘다름’에 대한 근대 지상주의적인, 군사주의적인 불인정 등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반영돼 집단 따돌림 현상을 유발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겁니다.

한국은 그렇다 치고, 군사주의·집단주의가 만연되지 않은 유럽에서 집단 따돌림은 어떤 요인으로 발생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집단 따돌림은 가장 잘 알려진 사회문제 중 하나입니다. 유럽 역시 한국과 같은 정도로 집단 따돌림이 만연되었고, 구타 등은 한국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집단 따돌림을 경험한 사람이 40%에 이르고, 피해를 많이 보는 학생들이 거의 20%에 달해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노르웨이에서 폭력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이 학교입니다. 학교에 이른바 모빙(mobbing) 문화라는 게 있는데 모빙은 원래 무리로 하는 악행으로 지금은 주로 왕따 현상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불링(bullying)인데 이는 학교 안에서의 이른바 왕따 현상, 특히 집단구타와 같은 형태를 지칭합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 집단 따돌림이 시작되는 곳은 유치원입니다. 대개 15~25%가 상습 피해자로 나오고, 20~25%의 학생들이 상습적인 가해자로 나타납니다. 유치원에서의 집단 따돌림은 무척 가혹해졌고, 이때 고립된 아이들은 심각한 성장 장해를 갖게 돼 문제가 큽니다.

특히 중학교에서는 피해 형태들이 고약하고 악질적이며, 한국보다 구타의 비율이 약간 높습니다. 한국은 주로 학생을 고립시키는 방식인데, 스칸디나비아는 인격 모독이 주를 이뤄 침 뱉기, 분비물 가방에 넣기, 이름 대신 좋지 않은 별명 부르기 등입니다. 이로 인해 학교마다 1년에 적어도 거의 한두 명씩 전학을 갑니다.

따돌림 방지는 ‘국가적 과업’

▲ 박노자 교수가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2004 인권위 김윤섭
조사 결과 스칸디나비아의 집단 따돌림은 신자유주의 분위기가 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는 납세자의 납세액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으로 공개됩니다. 부동산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 납세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주민들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민주의 국가는 세금 징수에 완전히 의존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동네 학교에서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인터넷에 접속해 학부모들의 납세액이 얼마인지를 조사해, 납세액이 가장 적은 10%의 부모 아이들을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인 집단 따돌림을 예방·근절하기 위해서 노르웨이 등의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국가·지자체·개별 학교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따돌림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책임을 해당 학교의 교장 및 담임들에게 묻는 등 따돌림 방지를 의무화시키고 폭력방지요원(대개 대체복무를 하는 병역 거부자들)을 학교마다 상주시켜 가해자·피해자들의 상담, 갈등 조절 등을 하게 합니다.

교육부 당국자들이 관련 연구자와 협력하여 따돌림 현황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벌이고 피해가 가장 심각한 학교에서 특수 프로그램을 운영케 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따돌림 근절에 실적이 가장 우수한 학교를 국무총리가 직접 방문해 그 성과를 축하하는 등 따돌림 방지는 ‘국가적 과업’의 위상을 가집니다.

중앙·지역 일간지에서 피해자의 편지들을 공개하여 그들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가해자 및 그 부모들의 양심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사실, 많은 일간지들이 따돌림 근절의 당위성에 대한 의식이 높아 피해 사례가 있으면 꼭 편지로 써 달라고 공고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따돌림 방지 차원에서 역극극(role-play)을 진행해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의 일단이라도 ‘놀이’를 통해서 맛보게 합니다. 그리고 많은 학교들이 따돌림 방지 웹사이트를 운영하면서 피해자·가해자의 고백을 인터넷으로 공개합니다.

피해자의 솔직한 심정이 만인에게 알려지면 그 피해자를 보는 가해자의 눈은 달라지게 돼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한국의 관련 기관들도 참고해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일중독’에 빠진 부모들

그러나 이와 같은 전 사회적인 노력과 일련의 국지적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따돌림이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 건수가 증가하고 그 수법들이 더 악질적이 되고 있습니다. 즉, 각종 방지 프로그램들이 그 확산을 어느 정도 견제하는지 모르지만 병근(病根) 제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단 따돌림을 유발시키는 사회·문화적 심층적 요인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이 원인인 듯합니다.

예컨대 많은 학생들이 저지르는 가해 행각의 직접적인 원인이 부모로부터의 애정 결핍, 가정에서 느끼는 소외감, 부모의 무관심 등으로 밝혀져 있는데, ‘일중독’과 ‘소비중독’에 빠져 아이를 ‘2순위’로 인식하는 상당수 부모들의 사유 형태는, 생산·소비를 물신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 않는 한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가혹 행위의 당위성을 가르쳐 주는 것은 텔레비전에서 매일같이 보는 싸움·죽임의 장면인데, 역시 이윤 추구적 대중문화는 폭력이라는 ‘눈요기’의 주된 요소를 폐기 처분할 것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두 살 된 아이들이 하루에 두세 시간씩 텔레비전으로 보는 만화에서마저도 추격·충돌·격투 등의 이미지들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폭력을 당연지사로 여기게 되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현실’과 ‘연출’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이 연출된 영상물에서 본 폭력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본받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입증한 결과인데, 이윤 추구에 몰두하는 대중문화 생산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신문에서 텔레비전까지 모든 매체들이 늘 주목해 부각시키는 것은 프로 스포츠나 연예계 소식 등인데, 의식·무의식적으로 남학생들이 강인하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스포츠 스타들을, 여학생들이 요즘 시쳇말로 ‘몸짱’·‘얼짱’으로 인식되는 연예계 스타들을 인간의 ‘표준 모델’로 각각 삼게 돼 있습니다.

그 ‘표준 모델’의 틀에 맞지 않은 - 즉, 허약해 보이거나 사교 능력이 없어 보이거나 너무 ‘빈티’ 나거나 ‘외모에 문제가 있는’ - 남녀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왕따 후보’가 되고 맙니다.

‘자유’를 표방하는 자본주의는 놀라울 정도의 일상적 사고의 획일화를 가져다 주는데, 그 획일적인 규범에 맞지 않은 자는 곧잘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게 됩니다. 인권 이상(理想)에 완전히 상반되는 현실이지요.

그러나 이윤 추구적 시스템이 이 지구를 계속 괴롭히는 이상 이 시스템이 고쳐질 것 같지도 않고 인권의 이념이 제대로 실현될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인권 신장을 위한 투쟁은 바로 반(反)자본주의적 투쟁과 둘이 아닌 하나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긴 시간 동안 부족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노자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 8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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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세계 최초의 레인지파인더식 디지털 카메라 RD-1


 

 

 

 

 

 

 

 

 

 

 

나는 아직 디지털 카메라가 없다. 디지털 카메라의 편리성과 점차 향상되는 성능에 감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몇 가지 이유, 가령 돈이 없다거나 기타등등의 이유로 아직까지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생각처럼 내 몸에 착착 붙는 느낌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필름 카메라보다 디지털 카메라가 화질이 훨씬 떨어지네 어쩌네 하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카메라로는 크게 확대해보지 않는 한 그다지 차이를 실감하기 어려울 만큼 디지털 카메라의 수준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이유로 디지털 카메라보다는 아직까지 필름 카메라에 보다 더 매력을 느낀다. 걔중에는 EOS나 니콘의 F시리즈 같이 전자식 카메라조차 거들떠 보지 않는 수동 카메라 매니아들도 있다. 만약 이것을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디지털 카메라는 첨단 기술이 적용된 전자동분사방식의 엔진을 갖춘 오토매틱 자동차라면, 전자식 카메라는 그보다는 덜 첨단(디지털이 아니라는 점에서)일지는 기술적으로는 역시 놀라운 성능의 오토매틱 자동차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경주용 자동차들은 여전히 수동 기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수동기어변속의 치고 나가는 힘이나 운전자의 의지대로 작동한다는 그 느낌은 아무리 편리한 오토매틱 자동변속 장치를 장착한 신형 자동차라도 따라가기 힘든 매력을 준다. 클러치를 깊게 밟고, 수동기어를 조작한 뒤 엑셀레이터를 힘주어 밟는 순간 가속의 쾌감을 아는 드라이버는 오토매틱 자동차의 매끄러우나 몸에 착착 붙지 않는 그 느낌을 사랑하긴 힘들다. 마찬가지로 수동 카메라 혹은 필름 카메라에서 느껴지는 그런 작동감을 디지털 카메라에서 느끼기란 이미 수동의 억센 쾌감에 길들여진 이들에겐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디지털 카메라 자체의 단점들도 적지 않게 노출되고 있다. 가령, 기술의 발전에 따라 신형 물건들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어제의 고가 디지털 카메라가 하루아침에 퇴물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한다는 건, 마치 신형 자동차가 연신 앞장서 추월하며 달리는 고속도로를 느린 속도로 달리는 기분이 든다.


 

 

 

 

 

 

 

 

 

 

 

 

 

 

 

 

그런 점에서 수동카메라는 더이상 개량될 수 없고, 더이상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 라이카 M6를 사용하는 이라면 더이상 기기 변동의 유혹 없이 차분하게 필요한 렌즈와 액세서리들을 장만하는데 힘을 기울일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이 이미 최고의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디지털 카메라와 필름 카메라 사이에는 아직까지 메워지기 힘든 영역들이 있다. CD로 음악을 듣는 것보다는 LP로 듣는 음악에서 인간은 더욱 편안함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이 음악을 연주한다는 느낌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톤암을 조정하고, 음반을 매만지고, 바늘을 올리는 순간의 쾌감이란 CD를 트레이에 올리고 덜렁 스위치 조작 한 번에 흘러나오는 1010101010101010의 비트가 주는 음악과는 다르다.

그런 까닭에 디지털 카메라의 미래는 여전히 수동카메라이다. 엡손은 광학기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업체, 그 중에서도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에 관해 노하우가 쌓인 기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엡손은 HP와 함께 이 분야에서 단연 톱을 달리는 기업이다. 그런 엡손에서 Cosina의 렌즈를 사용하여 빈티지 느낌이 나는 6백만 화소급의 디지털 카메라를 발표했다. 이전에도 라이카에서 파나소닉과 손잡고 M6의 느낌이 나는 디지털 카메라를 발표한 적이 있으나 외관만 카피되었을 뿐 수동 카메라의 조작감, 질감과는 현격한 차이를 주었는데, 이번엔 다르다.


 

 

 

 

 

 

 

 

 

 

 

 

우선 사용자의 리뷰를 살펴보니, 세계 최초의 레인지 파인더 방식 디지털 카메라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토포커스 시스템과 이 레인지 파인더 방식을 비교하자면 레인지 파인더를 통한 포커싱은 렌즈의 교환에 따른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 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빠른 포커싱이 가능한 동시에 정확하며 광량 또한 실제 눈으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싱글렌즈의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처럼 셔터액션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지 않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는 막강한 장점이 있다." 레인지 파인더식 카메라는 일안리플렉스 카메라의 단점을 곧 장점으로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촬영된다는... 게다가 이 카메라는 셔터음이나 기타 조작 다이얼들의 느낌부터 게이지의 표시에 이르는 모든 것이 수동카메라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코시나 렌즈 자체도 수준급이라는데, 이 R-D1의 가장 큰 특징은 고가이지만 성능좋기로 악명높은 라이카의 L, M 마운트의 렌즈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얘기는 이 카메라가 무척 고가가 될 것이라는 걸 미리 예견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디가 300만원에 렌즈 하나 끼워주는데 그것의 겂이 50만원 정도 한다고 하니 말이다.(참고로 라이카에서도 새로 레인지 파인더 방식의 디지털 카메라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디지털 카메라의 진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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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aomi > 눈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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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2004-08-02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여름은 언제 끝날건지..
잠시동안이지만 보는 내 눈과 내 마음이나마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로드무비 2004-08-02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시원하네요!^^

로자 2004-08-03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저에게 말걸어 주시는 로드무비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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