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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과 냉소의 카르텔
-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김광준(부산대 경제학과 4학년)

 

김규항의 틈

먼저 분명히 할 점이 있다. 이 글은 김규항의 글 중에서도 ‘비실명 지식인 비판’ 의 글들에 대한 의문이며 김규항의 주장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씨네21』이라는 잡지에 묶여 나갈 때의 ‘상황’에 대한 의문이다. 부디 개인적인 체험이기를 바라지만, 내가 대학에서 경험해야 했던 김규항에 대한 완벽한 오독(誤讀)들을 아무래도 그에게 들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본능적인 감수성이 집약된 칼럼 모음집이 『B급 좌파』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대학가에서 소리 소문 없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규항의 그 보석 같은 글쓰기의 틈새를 메워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대학 사회에서 김규항이라는 필자의 인기는 상당하다. 그는 99년 연세대 총학생회에서 선정한 ‘가장 만나고 싶은 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뽑혔고, 여러 대학에서 강연 초청을 받는가 하면, 대학 인터넷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논쟁들 속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어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물론, 김규항이 지식인 사회에 쏟아붓는 독설들은 건달만이 내뱉을 수 있는 위력적인 일격이다. 김규항은 참으로 ‘위선에 대한 혐오에 관한 한 제일(강준만)’이며, ‘진지한 주제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비장미의 소유자(고종석)’ 이며, ‘언어의 여의봉을 휘두르는 불가사의하고 흥미진진한 캐릭터(최보은)’ 인 것 같다.

건달과 똘마니

나의 의문은 조금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적인 사랑의 두께가 없다면 태평양 같이 넓은 세계관의 차이로 서로 친하게 지낼 이유가 없는 나의 오랜 친구가 난데없이 김규항 예찬론을 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1997년 대선 당시 부산의 한나라당 이회창 선거운동캠프에서 유니폼을 입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회창! 이회창!”을 연호한 경험이 있다. 즉 자신의 정치적 입장 따위는 일당 이만 원보다도 하찮게 생각하는 인간이다. 내가 보기엔 정치적 입장이 ‘없다’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지만 스스로는 언제나 정치를 ‘혐오한다’라는, 강한 정치색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친구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영화”라고 주장할 만큼 영화를 좋아하여 『씨네21』을 열독한다. 그런데 거기서 접한 김규항의 글에 취해 “이 사람 대학만 달랑 나와서 삼십대 중반에서야 글쓰기 시작했데. 글이 이렇게 통쾌하고 맛있을 수 있니”라며 감동 어린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이었다. 친구는 ‘B급 좌파’라는 말이 너무 멋있어서 “나도 오늘부터 B급 좌파라고 불러줘”라고 이야기했지만, 정작 그는 민주노총이 뭐 하는 단체인지도 알지 못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 강의실에서의 일이다. 학생들이 나름대로 정한 주제를 갖고 릴레이 발표를 하는 수업에서 나는 또 난데없이 김규항의 이름을 접하게 되었다. 한 학생이 “인상깊게 읽은 글입니다”라는 짧은 소감과 함께 글을 그대로 읽어내려 갔는데 내게도 낯익은 글이었다. 뒤에 확인해보니 그 글은 김규항이 부친에게 『태백산맥』을 읽어보길 권했다는 에피소드에서 시작해, 점차 지식인 비판으로 결론짓는 <리얼리즘은 리얼하다>라는 칼럼이었다. 곧 이어 “저는 아직 『태백산맥』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거 안 읽으면 교양인이 아닌 듯 무시하는 대학생들은 참 싫습니다”라는 발표자의 소감을 덧붙였다.

『태백산맥』을 안 읽어본 게 뭐 그리 나쁜 일이기야 하겠냐만, 『태백산맥』 안 읽었다고 ‘교양인이 아니다’라고 욕하는 저능한 대학생들이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이건 혹시 그 학생의 자격지심이 아닐까? 발표 학생은 자신 역시 김규항의 팬이라고 밝혔는데 웬 건달에게 팬이 이렇게 많은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이 팬들의 상당수는 ‘김규항식 비약’을 즐기며, “한국의 지식인들은 역겹다”라며 슬쩍 오버(over)하는 것에 재미를 들인 듯하니 이게 웬일인가?

그러니까, 나는 김규항이 쓰는 대부분의 글들에 별다른 이견이 없으며 여타의 매체에 쓰는 글들이나 인터뷰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배우고 공감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의 진위여부를 가리기엔 경험이 일천하고, ‘그 바닥’의 생리를 김규항만큼 체감하지는 못하므로 그저 ‘매우 솔깃하게 들리는 정도’라고 말함이 옳겠다.

논의를 구체화시켜서,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씨네21』이라는 대중영화잡지에서 지식인 개인에 대한 실명 비판의 방법이 아닌 ‘지식인 집단’에 대한 김규항의 글들이 무정치적인 대중에게 흘러들어갈 때 이것이 어떤 오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998년 3월, 칼럼 집필 초기부터 집요하게 시작된 지식인 집단에 대한 김규항의 분노는 최근의 8월에 개재된 <진리는 쉽다>라는 칼럼에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나는 뭔가 조금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진리가 쉽나?

“……‘진리를 쉽게 전달하긴커녕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진리조차 최대한 알아먹기 어렵게 만드는 데 혈안이 된 듯한 지식인들의 희한한 행태는 실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1)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진리를 알아먹기 어렵게 전달하려 했다면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 김규항은 ‘혈안이 된 듯한’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생각이 (오랜 경험에 의한) 추측임을 슬쩍 드러내는데, 이것을 글쓰기상의 기술로 여유 있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김규항이 실명 비판을 하지 않음으로써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수사법으로 보는 게 더 올바른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실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라는 결론으로 넘어가는 건 웬일일까? 자신의 ‘추측’이 그것을 ‘방증’하고 있다니. 사실 이것이 일종의 ‘김규항식 비약’인데, 이와 같은 글쓰기의 수사는 김규항 칼럼의 많은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의사 사회를 비판하는 칼럼의 마지막 문장은 “돌팔이는 의사였고 나는 돌팔이 이후 돌팔이보다 나은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2) 이다. 이 칼럼이 나간 이후 김규항은 의사 집단으로부터 많은 항의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글쓰기의 묘를 이해하지 못한 의사들의 독해력 부족이라 가볍게 넘기는 것은 올바른 반박이 아닌 것 같다. 말하자면 김규항이 그의 글에서 자주 즐기는 비약의 효과는 독자들의 감동을 끌어내는 데는 유용하지만 해당 집단에 대해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과잉된 시각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쉽다>라는 칼럼이 나가자 바로 다음 호 『씨네21』에는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김규항 글에 대한 완곡한 반론이 실렸는데 나 역시 정윤수의 말처럼 “진리란 어려운 것이며 그것을 쉽게 전달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3)이라 생각한다. 정윤수에게서 힌트를 얻자면, 김규항은 종종 ‘진리’와 ‘상식’을 (고의로? 전략적으로?) 혼돈하거나 구분하려 하지 않는 듯하다. 이를테면, 『조선일보』와의 싸움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 아닌가. 『조선일보』 문제에 무감각한 지식인들은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이라 비판해야지, 진리연하며 으스대는 사람들이라 비아냥거리는 건 마땅한 비판마저도 오독하게 만드는, 논의의 층위가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말이다. 아닌 말로, 진리가 그렇게 쉬운 건데 우리는 왜 아직 진리는커녕, 상식도 통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을까?

‘전투적 자유주의자’와 ‘B급 좌파’의 차이

강준만과 김규항. 그 외 몇몇 이름과 함께 이들은 한국 지식인 사회의 비판과 내재적 각성을 지속적으로 촉구해온 최전선의 필자들이다. 그러나 강준만과 김규항의 글쓰기 방법에서의 뚜렷한 차이는 실명 비판의 유무이다. 물론 김규항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를 통해 박노해, 김지하, 박광수, 조혜정, 박원순, 김영하 등에 대해 나름대로 실명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규항의 칼럼에서는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식인’이라는 집단명사의 주인공만 등장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며 내가 문제삼고자 하는 부분도 이것이다. 읽고 나면 속이 시원한 것 같긴 한데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혹은 실명이 없다보니 “그런 지식인이 과연 있을까?”하는 순진한 의문도 곁들여진다. 가끔은 이 사람들이 (김규항이 곧잘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김규항만의 가상세계에 등장하는 지식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는 김규항에게 강준만식의 글쓰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내가 김규항에게 원하는 것은 강준만이 당당하게 떠안으려는 ‘책임’이다.4)

『씨네21』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결국 이걸 문제삼는 가장 큰 이유는, 김규항의 ‘비실명 지식인 비판’은 『씨네21』이라는 배달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 칼럼이 좌파 정치조직의 기관지와 『씨네21』이라는 잡지에 실릴 때의 차이는 확연하지 않은가? 『씨네21』이 어떤 잡지인가? 1995년 창간 이후 국내 주간지 시장을 평정해버린 가장 유명한 대중문화잡지 중의 하나가 아닌가? 이 잡지는 특정한 정치색을 지닌 독자를 요구하지 않는다. 가장 넓은 세대와 가장 넓은 계층을 아우르고 있는 대표적인 잡지가 『씨네21』이다. 문제는, 과연 스스로 ‘B급 좌파’를 표방하는 김규항이 이와 같은 대중잡지에서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채 모종의 ‘지식인 집단’을 향해 독설을 퍼부어 댈 때, 그것이 『씨네21』의 독자들에게 걸러진 채 소화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정확한 통계를 알 수는 없지만 『씨네21』의 주요 독자들을 대학생 계층으로 본다면, 가뜩이나 근거 없는 정치혐오증과 ‘지성인 콤플렉스’에 싸여, 갈수록 세상에 대한 응석받이가 되어가고 있는 대학 사회의 독자들은 과연 김규항의 집필 동기와 무리 없이 만날 수 있을까? 물론 ‘1페이지’라는, 지면상의 한계도 있겠지만 그런 만큼 김규항의 일기장에나 등장할 만한 어떤 ‘집단’에 대한 짜증은 조금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란이 『씨네21』 속에 낀 독립된 ‘삐라’는 아니지 않은가.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이 비실명으로 이루어질 때, 김규항이 혐오했던 위선자들은 김규항의 글을 수신하지 않으며, 김규항의 정당한 분노는 그토록 사랑하는 민중들에게 ‘지식 그 자체에의 짜증’으로 변종-전이된다. 지난 봄, 일명 ‘월장사태’에서 한 예비역이 김규항의 글을 감탄해서 인용하며 진중권에게 “지식인 놈들이 다 그렇지 뭐”라고 비아냥거리던 풍경에서 나는 아찔해진다.

김규항과 대학 건달들의 이상한 동감

대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PC 통신의 시대에서 지금의 인터넷 시대까지, 지금의 20대는 글을 읽는 것보다는 글을 쓰는 것(정확히 말하자면 ‘활자로 말을 하는 것’)에 익숙하고 그것을 즐기는 세대이다. 내적으로 숙성된 논리를 풀어내기보다는 즉자적인 감정의 배설에 익숙하며 승패를 가리는 것을 즐기면서 극히 자기 보호적인, 한껏 냉소적인 세대들이다. 나는 여전히 이것은, 대학 도서관의 대여 리스트 10위권의 반 이상을 판타지 소설로 채우고, 도서관을 가상현실 공간으로 만들어버리는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평균 독서량과 독서수준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고급영화정보잡지’로 자신의 교양도 확인하고, 유행하는 정보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발버둥치면서 말이다. 일 년에 책 한 권 제대로 안 읽는 사람이 ‘책에는 진리가 없어’ 라고 말하는 건 참으로 넌센스가 아닌가? 물론 나는 괜한 숭문주의(崇文主義)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책이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어도 책만이 말해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쟎은가. 김규항이 자주 인용하는 좌파 선현들은 김규항이 책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닌가? 그람시가 김규항의 동지나 술친구는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김규항의 유려한 지식인 비판은 대학 사회의 지식혐오증에 좋은 면죄부가 되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직 젊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에 대한 충격적인 냉소가 아니라 충격적인 지식(인) 그 자체이다. 공연히 『씨네21』이라는 ‘젊은’ 잡지로 대중의 냉소를 부추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와중에 쌓여 가는, 대중들의 지식혐오와 인문학에 대한 달뜬 조롱에 대해 김규항은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김영민의 말처럼, 이제는 소수의 권력자나 지식인들을 가볍게 기명한 채 익명 속으로 숨어 버리는 다중의 타성을 혁파해야 할 때가 아닌가.

건달의 도(道)

너무 작은 부분을 너무 크게 부풀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김규항의 독설이 『씨네21』이라는 잡지로 배달될 때 그것은 엉뚱한 오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며 ‘김규항식 비약’을 글쓰기의 묘로 여유 있게 받아넘기기엔 한국 대중의 유머감각이 다소 부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연 김규항의 칼럼만 읽은 독자들은 김규항의 ‘깊은 뜻’을 그대로 수신하고 있을까? 김규항의 칼럼엔 왜 종종 주인공이 빠져버려 ‘한놈만 패며 맞짱뜨는’ 건달의 도(道)가 지켜지지 않을까. 지식인 사회 전반에 걸친 김규항의 ‘짜증’에 도매금으로 처리되는 우리의 몇몇 가난하고 진지한 지식인들은 어떻게 책임져야 할까. 『씨네21』이라는 고급영화정보잡지 독자들의 강퍅한 문화교양의 욕구에 김규항의 소중한 독설은 제대로 접합되고 있는가.

평범한 사람에게는 아무도 욕하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다. 김규항은 스스로 ‘건달’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우지만, 세상의 모든 건달이 『씨네21』이라는 대중잡지에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건달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건달이다. 건달이든 먹물이든, 평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대 사회적 지면을 획득한 건달이 책임을 지는 방법은, 적극적인 실명 비판을 통해 논쟁의 한 가운데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그는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왕따’가 될 것이다. 아니면 실명 비판이 아닌 글은 최소한 『씨네21』이라는 대중‘교양’잡지에서는 조금 삼가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썩었다”라는 주장 자체가 다중의 ‘교양’이 되어버린다면 좀 끔찍하지 않나?

우리에게는 참으로 스승이 필요하다. 물론 쉬운 말로 세상을 설명해주는 스승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능력이 없어서’ 어렵게 말할 수밖에 없는 진지한 스승이라도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정말 강단이라도 좋다. 좌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아직도 강의 첫 시간에 “빨갱이들은 내 수업 듣지마”라며 고함지르는 노쇠한 극우반동 지식인들에게 학점을 구걸하고 미래를 저당 잡힌, 젊은 건달들의 희망이다.


<각주>
1) 김규항,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진리는 쉽다>, {씨네21}, 2001년 7월 31일, 100면.
2) 김규항, {B급 좌파}(야간비행, 2001), 220쪽.
3) 정윤수, <진리는 어렵다>, {씨네21}, 2001년 8월 7일, 100면.
4) 『B급 좌파』 출간 이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김규항 자신이 밝혔듯,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 칼럼에서 이진경이라는 '영재아'를 추측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나 역시 온갖 개념과 추상으로 도배된 글들을 읽는 것은 현기증 나는 일이다. 그러나 김규항이 1쪽 짜리 싸늘한 냉소로, 그것도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유려한 짜증'을 내는 것은 아무래도 소심해 보인다. 나는 정말로 김규항이 이진경을 실명으로 자극하게 될 수 있길 바라며, 이 건달과 영재아의 논쟁은 지식인의 사회참여 방법이라는 해묵은 문제에 대한 작은 실타래를 풀어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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