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꿈 속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마주치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을 수 없을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그리움을 해소해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서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이성의 검열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에서 정해진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2. 16
낭만적 운명론은 물론 신화이고 착각이다. 그러나 그것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릴 이유는 없다. ... 클로이가 내 삶에서 하게 된 역할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해낼 수 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눈이고,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거나 키스를 하는 방식이고, 그녀가 전화를 받거나 머리를 빗는 모습인데.
3. 22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신에 대한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4. 30
차라리 편지라면 좋았을 것을. 그녀가 일주일 뒤에 전화를 했을때 나는 연습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준비했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채 어슬렁거리다가, 면봉으로 귀를 후비며 욕조의 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기습을 당했다. 나는 침실에 있는 전화로 달려갔다. 목소리는 배우지 않는 한, 그래서 연기를 하지 않는 한, 밑바탕 스케치일 수밖에 없다. 내 목소리에는 긴장, 흥분, 분노가 담겨 있었는데, 만일 종이에 쓰는 글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능숙하게 지워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화기는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라서 말하는 사람에게 한 번의 기회밖에 주지 않았다.
5. 39
"두 당사자가 평등한 상태에서, 서로 똑같이 줄 준비가 된 상태에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거예요. 서로 똑같이 줄 준비가 된 상태에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거예요. 한쪽은 얼른 한번 즐기고 싶어하고 다른 쪽은 진정한 사랑을 원할 때에는 관계가 성립되면 안되죠. 거기서 모든 고민이 생기는것 같아요. 불균형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인생에서 뭘 원하는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6. 44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지 않고 그녀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내 타이가 어떤가? 하고 묻지 않고 그녀가 내 타이를 어떻게 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 그 질문의 재귀적인 운동 속에서 나의 자아는 점점 배반과 비진정성에 물들게 될 수밖에 없었다.
7. 80
어쩌면 우리가 찾는 것은 반드시 더 푸른 풀이 아니라,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풀일지도 모른다.
8. 82
마르크스주의자의 욕망의 대상이 된 사람은 불균형이 정산으로 보이는 영역에서 정확한 균형을 성취해야 한다. ... 클로이에게는 어려운 과제가 있었다. 나의 독립성을 위험에 빠뜨릴 만큼 연약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나의 연약성을 부인할 만큼 독립적이어서도 안 된다는 것.
9. 85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해지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전에 어디선가, 어쩌면 전생에서, 또는 꿈에서 만났던 것 같기도 하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원래 우리와 하나였다가 떨어져나간 우리의 "반쪽"이기 때문에 이런 익숙한 느낌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10. 89
나는 클로이가 내 눈에는 잘 봐주어야 별 매력 없는 구두에 황홀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클로이가 어떤 여자인지에 대한 내 생각, 나의 아리스토파네스적인 확신에는 이 구두에 대한 열광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그 구두를 살 때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을까를 생각하니 정신이 산란해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 여자는 이런 구두와 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클로이가 그 구두를 골랐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불편하게도 그녀가 그녀 나름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녀의 취향이 늘 나와 같을 수는 없다는 것, 우리가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모순이 없을지 몰라도 그런 조화의 상태가 무한히 뻗어나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어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이 늘 상식적인 생각처럼 유쾌한 과정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1. 137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따분해 보인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뜨거움을 친구들과 공유해보려고 했다. 영화, 책, 정치와 관련하여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친구들한테 세탁기 옆의 클로이, 영화관에서의 클로이와 나,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는 클로이와 나에 대해서 열 번쯤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플롯은 없고 액션조차도 거의 없는 이야기, 동작이 거의 없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기껏해야 다른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12. 160
7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 저녁 우리는 포토벨로 로드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날이어서 종일 하이드 파크에서 일광욕을 하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5시 무렵부터 나는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집으로 가서 이불 밑에 숨고 싶었다. 그러나 딱히 피해야 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충동에 저항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일요일 저녁이면 우울했다. 죽음, 끝내지 못한 일, 죄, 상실이 떠올랐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클로이는 신문을 읽었고, 나는 창 밖의 차량과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클로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너 또 길 잃은 고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네."
전에는 아무도 내 표정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지만, 클로이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그 말이 그때까지 내가 느끼던 혼란스러운 슬픔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되면서, 내 우울도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 말 때무에, 내가 스스로 정리할 수 없었던 느낌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녀가 기꺼이 내 세계로 들어와 나 대신 그것을 객관화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강렬한[그리고 어쩌면 균형이 잡히지 않은] 사랑을 느꼈다. 고아에게 고아라고 말해줌으로써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13. 164
♣그녀는 질식할 것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길 떄문에 움직임이 뻣뻣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시골에서, 창문은 크고 가구는 거의 없는 널찍한 하얀 집에서 혼자 사는 꿈을 꾸었다. 억압적인 눈길로 그녀의 진을 다 빼버리는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열아홉이 되었을 떄 그녀는 애리조나로 감으로써 그 욕망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녀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작은 도시 변두리의 오두막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어린 시절에 살던 집으로부터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는 젊음의 낭만주의에 흠뻑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고전들이 가득 든 가방을 가지고 갔다. 그녀는 달의 표면 같은 사막 너머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며 그 책들을 읽고 주석을 달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 주가 지나지 않아 그녀는 평생 갈망했던 고독 때문에 방향감각이 흐트러지고, 겁이 나고, 현실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주 조그만 시장에 가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소리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존재감, 자신의 경계들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마침내 겨우 한 달 만에 그녀는 그 소도시를 떠나 피닉스의 한 레스토랑에 웨이트리스로 취직했다. 그녀를 내리누르는 "비현실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닉스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사회적 접촉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기본적인 질문에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라는 것에 대한 모든 느낌을 잃었다. 그녀가 겪은 경험들은 언어로 정리될 수 없을 것 같았다.
14. 177
언어는 그 안정성으로 우리의 우유부단함에 아첨한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언어 덕분에 우리는 지속과 고정이라는 착각속에 숨을 수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모든 것이 흘러가버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임을 지적하고 있지만, 강이라는 단어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나의 감정들의 유동성과 변덕스러움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전달해줄까? 그 말 속에 이 사랑과 얽혀 있는 그 모든 배신, 권태, 짜증, 무관심이 들어설 공간이 있을까? 내 감정은 양면 공존의 운명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는데, 도대체 어떤 말이 그 상태를 조금이나마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을까?
15. 204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불안은 부분적으로는 내 행복의 원인이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오는 불안이었다. 클로이는 갑자기 나에게 흥미를 잃을 수도 있었고, 죽을 수도 있었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관계를 일찌감치 끝내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나 습관이나 익숙함이 관계를 끝내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클로이나 나 둘 중의 하나가 끝을 내버리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연애가 자연스러운 종말에 이르기 전에 끝내버리고 싶은 충동[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말다툼을 하는 것에서 표현되었다]을 느꼈다. 증오에서 나온 살인이 아니라 지나친 사랑에서 나온, 아니 지나친 사랑이 가져올 공포에서 나온 살인이었다. 연인들은 그들의 행복의 실험에 수반되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견딜 수 없을 때에만 자신들의 사랑의 이야기를 끝낼 수 있다.
16. 267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우리는 시간표가 꽉 짜인 현재의 무자비한 역학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지만, 마음의 자리인 영혼은 기억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만일 모든 연애가 낙타에게 짐을 더 얹는 것이라면, 사랑의 짐의 의미에 따라서 영혼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낙타가 마침내 클로이의 기억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떨쳐버렸을 때, 낙타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17. 270
그러다가, 불가피하게, 나는 잊기 시작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몇 달 뒤, 나는 런던의 그녀가 살던 동네에 갔다가, 그녀에 대한 생각이 전처럼 괴롭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내가 그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바로 그녀가 살던 동네였음에도], 근처 레스토랑에 잡아놓은 약속을 먼저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클로이에 대한 기억은 중립화되면서 역사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런 망각에는 죄책감이 뒤따랐다.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의 부재가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망각은 내가 한때 그렇게 귀중하게 여겼던 것의 죽음, 상실, 그것에 대한 배신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18. 272
낙타는 시간을 따라 걸어가면서 짐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계속 등에 실린 기억과 사진들을 흔들어 사막에 떨어뜨렸고, 바람이 그것들을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낙타는 점점 더 가벼워져서 나중에는 그 독특한 모습으로 뛰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현재라고 부르는 조그만 오아시스에서 이 지친 짐승은 나의 나머지를 따라잡게 되었다.
19. 273
우리는 사는 방법을 알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사는 것도 자전거 타기나 피아노 치기처럼 하나의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고나면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지 시작한다. 그러나 지혜가 우리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까? 지혜는 우리에게 평정과 내적 평화를 목표로 삼으라고 말한다. 불안, 두려움, 우상 숭배, 해로운 정열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의 첫 충동이 꼭 진실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이성을 훈련시켜서 무익한 요구와 진정한 요구를 분리하지 않으면 욕심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통제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그것이 현실을 왜곡하여 산을 흙둔덕으로, 개구리를 공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제어하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해를 주는 것은 두려워하되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말라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고 가르친다.
20. 274
♣성숙한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으로 나눌 수도 있다. 성숙한 사랑의 철학은 거의 모든 면에서 미성숙한 사랑보다 바람직하며, 그 특징은 각 개인의 선과 악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다. 성숙한 사랑은 절제로 가득하며, 이상화에 저항하며, 질투, 매저키즘, 강박에서 자유로우며, 성적 차원을 갖춘 우정의 한 형태이며, 유쾌하고, 평화롭고, 상호적이다[어쩌면 이래서 욕망이 무엇인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고통 없는 상태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미성숙한 사랑은 [나이와는 거의 관계가 없기는 하지만] 이상화와 실망 사이의 혼란스러운 비틀거림이며, 환희나 행복의 감정이 익사나 섬뜩한 구토의 인상과 결합되어 있는 불안정한 상태이며, 마침내 답을 찾았다는 느낌이 이렇게 헤맨 적이 없다는 느낌과 공존하는 상태이다. [절대적이기 때문에] 미성숙한 사랑의 논리적 절정은 상징적이든 현실적이든 죽음이다. 성숙한 사랑의 절정은 결혼이며, 일상[일요일 신문, 다리미, 리모컨이 달린 장치들]을 통해서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이다. 미성숙한 사랑은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다. 일단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으로 가는 길에 올라설 수밖에 없다. 미성숙한 정열의 정점을 안 사람은 결혼으로 정착하는 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차라리 절벽 너머로 차를 몰아 끝장을 내고 만다.
21. 277
페기 니얼리 박사의 '괴로운 마음'은 무엇에 대한 책일까? 이 책은 어울리지 않는 짝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와 여자, 상대를 잔인하게 대하거나 감정적 불만족 상태에 빠뜨리는 사람들, 술이나 폭력에 의존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행하지만 낙관적인 이야기이다. 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사랑과 고통을 연결시키며, 그들이 사랑하게 된 어울리지 않는 유형의 짝이 변화를 일으켜서 그들을 제대로 사랑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그들의 감정적 요구에 응답할 수 없는 사람들을 바꿀 수 있다는 미망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게 된다. 니얼리 박사는 제3장에서 문제의 근원이 결함 있는 부모라고 밝힌다. 부모는 이 불행한 낭만주의자들이 감정의 과정을 왜곡되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주 어린 시절의 감정적 애착 경험을 통해서 사랑이 보답받지 못하는 것이며 잔인한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들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을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치료과정에 들어가 유년시절을 다시 짚어보면 자신의 매저키즘의 뿌리를 이해하게 되고, 어울리지 않는 짝을 변화시키려는 욕망이 사실은 문제 있는 부모를 제대로 된 부모로 바꾸던 어린 시절의 공상의 잔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22. 286
- 역자후기 -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은 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의 눈으로, 또는 굳이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생각이 깊고 많은 사람의 눈으로 일상을 해석하는 데에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런 재주를 통찰력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이 책에서 드 보통의 통찰력은 우리가 여러번 무릎을 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