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자의 말
내게 한 권의 책을 읽는 행위는 해명되지 않는 삶의 비밀을 풀어가기 위한 질문이었다. 질문거리가 많았으므로, 자연스럽게 나의 독서는 난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낄낄거리며 만화책을 읽다가도, '존재자' 운운하는 하이데거를 읽는 일이 내게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책읽기란 '나'와 '세상'에 대한 물음 던지기의 일부였고, 그런 방식으로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의 물음은 해소되기보다는 더욱 충만해졌다. 그런 일을 나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내 생각에 좋은 책이란 '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물음'을 키워주는 책이다.
...
그래도 산다는 일이 때때로 팍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쓰린 마음에 소금이 뿌려져 그야말로 소금밭이 되는 일도 종종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움큼의 투명한 소금이야말로 가혹한 비바람과 격렬한 태양 아래서 마술적으로 응결된 것, 아니 단련된 것. 사각형의 책들을 순례하면서, 나는 사는 일을 경쾌하게 긍정하는 연습을 했으며, 더 나은 삶에 대한 질문을 거듭 던졌다.

2. 19
책읽기라는 것이 그렇다. 눈썹에 힘을 주고 책을 읽다가도, 페이지는 넘어가는데 생각은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널뛰기를 하는 것이다. '몽상의 시학'이란 말도 있다 하니, 이걸 '몽상의 독서'라고 명명하자.

3. 24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서가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을 보면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오래된 책들에서 나는 서늘한 냄새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제법 '오래된 인간'이 되어버린 나, 별 수 없이 '무화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그런 향기 없는 젊음의 대피소가 기껏 도서관의 지하서고였다. 습기와 책 먼지로 가득한, 어두운 지하2층의 서고에서 허균의 산문집을 읽었다. 과거에 이미 다 읽어보았던 것인데, 그게 그렇게 새롭게 읽혔다.

4. 78
책을 읽는 일이 직업이 되다 보니, 종종 책읽기가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이를테면 의무감이 나를 불러 책상에 앉게 할 때라든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책을 읽었으나, 그 책이 도대체가 내게 아무런 지적, 정서적 자극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그러하다. 그럴 때, 제법 품위 있게 우리가 '독서'라고 명명하는 그 행위는 여타의 '소외된 노동'과 궤를 같이하는 불편한 시간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의 체험에 빠져들 때가 있다. 아주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어떤 책의 페이지를 무심히 들추는데, 거기서 자기의 마음과 딱, 공명(共鳴: 남의 사상이나 의견 따위에 동감함)하는 문장들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이 그렇다. 책읽기에도 어떤 '계시의 체험'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5. 85
2001년 11월 3일 '이문열 책 반환행사'가 있었다. 이문열 소설의 독자들이 몇 달간 작가가 보여준 문학과 행태에 실망한 나머지, 그들이 소장해왔던 작품을 저자에게 되돌려주는 행사였다. 이문열 씨의 독자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책 반환행사의 단초를 제공했던 이문열 씨의 발언이다.
"독자님, 얼른 반송해주세요. 책값은 현행법상 최고 이율은 붙여 반환하겠습니다. 아울러 부탁하는 바는 어디 가서 내 책을 읽었다고 하지 마십시오. 내가 직접 사람 골라가며 팔지 못하다보니 고객을 잘못 고른것 같습니다."

6. 108
많은 문인들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글쓰기에 집중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몇 년 전에 타계한 비평가 고 김병걸은 병상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내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그 순간까지, 기를 쓰고 글써야지. 피를 토하다 쓰러지는 그 찰나까지. 기를 쓰고 글써야지. 글은 내가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의 핏자국" 그가 죽은 후 한 문예지에 발표된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극심한 '전율감'에 빠졌었다.

7. 109
쓰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럴 수 없다는 데에 글쓰기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몇몇 운 좋은 예외를 제외하면, '쓴다'는 행위는 작가들에게 먹을 것이 공기밖에 없을 정도의 가난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쓴다'는 행위의 '마력'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고통 속에 밀어넣으면서, 역설적이게도 이로부터 행복을 추구한다. 냉정한 세속인의 시작에서 볼 때, 문인들은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하도 이해가 안 되니까, 서구의 어느 심리학자는 문인들의 존재를 '광기'와 관련하여 연구해보기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광인들의 심리상태와 문인들의 그것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광기가 창조의 원천이래나 뭐래나.

8. 156

9. 164
방현석은 '아름다운 저항'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시간이 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은 언제일까. 사람답게 살기 위해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싸운 흔적, 그 흔적 앞에서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시간과 인간의 풍경을 목격한다."

10. 190
악화된 출판환경에도 불구하고 참신한 기획을 선보이고 있는 몇몇 책에 대해 논의를 펼쳐보기로 하자. 많은 현장 출판인들은 아무리 기획이 참신하다고 해도, 기획에 걸맞는 책을 쓸 수 있는 필자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출판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어쨌든 '대중독자' 또는 '중간독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목표독자층에 걸맞는 책을 쓸 수 있는 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주장이다. '컨텐츠'의 측면에서는 비교적 우수한 책들의 집필자들도 지식인 특유의 '엄숙주의'에 빠져 있는 나머지 대중들과의 생동감 있는 소통에 실패하고, 대중적으로 긴밀하게 접근하겠다는 의도에서 쓰여진 많은 책들은 반대로 '콘텐츠'의 빈약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11. 194
불면의 밤은 실존을 밝히는 등불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지금 나는 그 등불 앞의 생에 대해 가볍게 떨고 있다. 그 떨림을 가능케 하는 것은 쓴다는 행위다. 논리적으로 어떤 사유가 있고, 그것이 글쓰기로 연결되는 것이겠으나, 나에게는 쓴다는 행위가 있은 연후에야 사유가 가능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를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 쓴다는 행위조차도 컴퓨터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허언(虛言:실속이 없는 빈 말)이 아니다. 컴퓨터의 전원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나의 사유는 작동되며 자판 위로 열 개의 손가락을 올려놓는 순간 희미하게 존재했던 어떤 이미지들이 육체를 얻게 된다. 계시처럼 어떤 말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실제로 이러한 경험은 일상 속에서, 수풀 속에 숨어 있던 개구리가 예고도 없이 뛰쳐나오듯 그렇게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잠에서 막 깨어난 바로 그 순간, 내 입술은 때때로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을 뱉어낼 때가 있다. "음, 아주 먼길을 걸어왔군." 나는 이 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맥락에서 탈구(脫句:시문에서, 빠진 글귀)된 발언이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가끔 시의 몸을 갖추지 못한 전언이 나에게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노트에 성급하게 옮겨 적는다."

12. 274
독자들이 비평을 읽지 않는 이유

13. 282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에세이 '고통 속의 유미주의 체험'에 대한.
일상 속의 그가 완전한 '미적 결여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미적인 것이 구원처럼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 전체가 폐허나 야만상태에 처해지더라도 인간은 아름다움을 통해서 자신의 추락한 영혼을 구원하는 끈질긴 관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인간됨을 포기하지 않으며, 어처구니없게도 자꾸만 아름다움에 대해 상상하고 싶어한다.

14. 290
독일의 문예학자인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물신에 대한 현혹이 왕성하게 작동되는 곳이 동시에, 현실의 고통을 은폐하는 이미지의 스펙트럼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환영의 공간이기도 하다. 백화점에 진열된 찬란한 상품들을 음미하면서, 대중들은 그들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남루한 일상의 질서를 순간적으로 망각하게 되며 물신화된 상품의 유혹에 시선을 집중하게 되는데, 이것은 롯데 백화점이 배치되어 있는 공간적 구조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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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머리에
나는 글을 쓸 때 두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개인적인 이해타산이 포함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글을 써왔기 때문에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볼 때가 가끔 있다. 그리고 10년 전, 20년 전의 글을 읽으면서 지금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만약 그 당시 처해 있던 상황을 타개하고자 이해타산의 마음으로 글을 썼다면, 지금의 나는 떳떳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거창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글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써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은 죽어도 글은 남기 때문이다.

2. 21
어떤 일을 선택할 때는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 아무리 커다란 성공을 하였든 혹은 치명적인 실패를 하였든 간에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항상 현실에 중심을 두고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나 자신도 발전할 수 있고, 재미있게 일을 할 수 있으며,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재미있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직결된다. 아무리 성취감과 보람이 있는 일이더라도 열정을 가질 수 없다면 계속해서 그 일을 하기는 힘들며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는 더더욱 힘들다.
 
3. 21
처음 회사를 만들 때, 경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회사 설립을 권유한 사람에게 물었다.
"저는 사람을 만나고 외부 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혼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프로그래밍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회사를 만들어도 제가 좋아하는 일만 계속할 수 있을까요?"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사장 위에는 아무도 없잖습니까? 당연히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지만 그 한마디가 회사 설립에 대한 결심을 굳혀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회사를 세운 후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장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기보다는 회사의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사장이 해야 하는 일이다.

4. 29
2000년이 저물어갈 때쯤, 미국 출장 중에 짬을 내어 보게 된 <컨텐더(The Contender)>란 영화에서 기대하지 못한 감동을 받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미국 부통령이 갑작스럽게 죽자 한 여성 상원의원이 부통령 후보로 지목된다. 그러나 그녀는 대학교 때 섹스 파티를 열었다는 스캔들에 휘말리고 여론의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시종일관 노코멘트로 일관한다. 주변에선 부인하지 않으면 불리하다고 조언했으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스캔들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고, 부통령에 오른다. 대통령은 그녀에게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대답했다.
"부통령에게 중요한 것은 사생활이 아니라 능력이라는 게 제 소신입니다. 스캔들이 사실과 다르다고 제가 말하는 순간 부통령 자격 조건에 사생활이 포함된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정치 생명이 위협받는다고 해서 저의 원칙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5. 34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항상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단어가 있다. 바로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이다. '뜨거운 가슴'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결국은 잘될 것이라는 열정을 뜻하며, '차가운 머리'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뜻한다. 서로 모순되는 의미 같지만 열정과 냉철함이 동시에 갖추어질 때 올바른 선택과 좋은 결과가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6. 38,39

일이 잘못되었을 때, 이러한 절반의 책임과 함께 생각해야 할 문제가 바로 '내 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주는 폐해이다.
그러한 개인적인 사고 방식은 같이 일하는 사람이나 조직을 불행에 빠뜨린다. '내 일만 잘하면 되고, 우리 팀만 잘하면 되고, 우리 부서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은 곧 '내 일은 잘되는데, 우리 팀은 잘되는데, 우리 부서는 잘되는데'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잘못의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주변 환경에게 떠넘기는 결과를 낳고 그것은 결국 불신의 벽을 쌓게 된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기본적이며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만약 동료와의 상호 존중이나 고객 또는 외부와의 약속지키기로 이어지지 않고 자기가 맡은 부분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면, 결국 그 사람이나 그 조직은 외부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하는 일을 혼자서 열심히 하고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나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조직을 위해서나 '절반의 책임' 마인드를 가져야 하며, '나만 잘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인식을 버릴 때만이 진정으로 발전하는 개인, 발전하는 조직이 생겨날 것이다.

7. 62
커뮤니케이션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한 몇 가지의 원칙들은 존재한다.
1. 상대와 나의 상식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상식이라 생각했던 부분이 상대방에게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서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상식만을 고집하고 알아듣지 못한다고 답답해 할 것이 아니라 나의 상식이 상대방에게는 상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2. 사용하는 말의 뜻이 사람마다 다를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같은 용어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정의를 달리 하거나 심지어 반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3.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지만, 특히 이야기를 할 때도 자기가 알고 있고 경험한 정도만큼만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4. 감정이나 체면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견을 개진하기 전까지는 매우 유연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일단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한 다음에는 어떤 경우에도 그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8. 106
자기 개발을 하는 데 조직의 도움이 없다거나 일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불평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런 외부의 도움이 없어도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스스로의 의지와 동기부여, 그리고 자기 관리를 통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조직에서 교육과 같은 발전의 기회를 제공해 주면 그 사람에게는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될 것이다. 반면에 의지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조직에서 아무리 많은 기회와 도움을 주어도 발전을 기대하기란 힘들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 여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인 것이다.

9. 118
다양한 일들을 해야 하는 관리자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자질은 무엇일까? 서로 생각과 경험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의 일을 이루어가기 위해 필요한 품성과 능력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으로는 전문 지식, 문제해결 및 개선 능력, 업무 파악 능력, 전략적 사고, 커뮤니케이션 능력, 그리고 정서에 대한 포용력 이렇게 여섯 가지를 들고 싶다.

10. 123
손자병법』'실패하는 장수의 다섯 가지 유형'
장수에는 다섯 가지 위험한 유형이 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장수(전략적인 사고 없이 무조건 열심히만 하는 관리자)라면 죽이기 쉽다. 자기만 살려고 애쓰는 장수(조직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관리자)는 포로로 잡으면 된다. 화를 잘 내는 장수(부하 직원에게 감정을 잘 드러내는 관리자)는 모욕을 주면 된다. 청렴결백한 장수(지나치게 자신만의 원리원칙에 집착하는 관리자 또는 고집 센 관리자)는 욕을 보이면 된다. 백성을 사랑하는 장수(마음 약한 인사 관리자)라면 백성을 괴롭히면 된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상대방 장수의 약점을 잘 살펴서 이를 역이용하면 된다."

11. 141
경쟁력 없는 기업이 쉽게 퇴출되기 힘든 산업 구조도 상황을 악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기업이 잘 망하지 않는 나라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있다. 기업도 어려워지면 망하는 것이 정상이며, 어려워진 기업이 적절한 시기에 정리되는 것이 이해 관계자 모두에게 그리고 국가 전체적으로도 바람직한데 현실을 그렇지 않다.
국내 기업이 망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금융권에서 기업에 대출할 때 대표이사의 연대 보증을 요구하는 관행이다. 기업의 신용도를 평가하기 힘드니 대출 회수율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기업이 망하면 기업의 빚이 전부 대표이사 개인의 빚이 되어버리고 만다. 기업을 정리할 적절한 시기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대표이사인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리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업을 계속 끌고 갈 수밖에 없다.
속된 표현이지만 '눈먼 돈'도 망할 기업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여러 가지 공공 자금 덕분에 수명을 연장한 기업은 손해가 나는 사업이라도 당장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참여한다. 부실한 업체가 오히려 덤핑에 적극적인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건실하던 업체도 계속 가격 경쟁에서 밀려 계약을 따내지 못하게 되고 결국 부실한 업체로 전락하여 전체적인 하향 평준화로 이어진다. 공공 프로젝트의 가격이 아무리 낮더라도 손해가 안 나니까 참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공공 기관의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12. 176
유비쿼터스(ubiquitous) 환경이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지능형 기기들이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환경을 말한다.
유비쿼터스 환경이 도래하여 가전제품들까지도 인터넷에 연결된다면 더 희안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맞벌이 부부를 위해서 전기밥솥이 인터넷에 연결되어 밥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밥을 태우는 바이러스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미래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류를 위해서 전기밥솥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이다'라는 이야기를 독수리 오형제인 양 말하곤 한다.

13. 201
♣내가 전공한 분야는 의학 연구 분야였는데,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길은 유명한 외국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잠자리에 들어 하루를 정리하는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내 경쟁 상대들은 세계 각국의 실험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이다. 내가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도 미국에 있는 내 경쟁자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초조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밤중에 일어나서 책을 뒤적이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잠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위기감과 함께 느꼈던 것은 공부가 단순히 지식을 덛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것이 많은지를 절감하게 된다. 또한 세상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으며, 또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해가는지를 느끼게 한다.
이와 정반대의 경험도 해보았다. 군대에 들어가 장교 훈련을 석 달간 받고 나서 부대에 배치되었는데, 그러다보니 훈련 기간은 물론이고 부대에 배치된 처음 얼마간은 공부와는 담을 쌓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점점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그렇게 급박하게 변해가던 세상이 마치 지구가 자전을 멈춘 것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마음도 아주 편안해지고 세상에는 걱정할 것이 없는 것 같아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해가는지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하지 않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느끼지 못하고 마음 편하게 있다가, 어느 순간에 경쟁에서 밀리고 결국 도태되고 마는 것이다.

14. 220,221

'Perception is Reality'라는 말이 있다. 인식되는 것이 진실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이라 해도, 주위에서 모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실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사회생활에서 나를 규정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내가 아닌, 상대방이 인식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자신에 대해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에는, 아무리 조목조목 사실을 나열하고 설명을 하더라도 일단 자리잡은 인식은 바뀌기 힘들다. 인식은 말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자리잡은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며,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상대방이 잘못 알고 있다고 해서 억울해 하고 상대방에게 불평을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15. 242
청소년이나 학생이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조언 여섯 가지
1. 자신에게는 엄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라
2.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살지 말라
3.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라
4. 매순간을 열심히 살아라
5. 미래의 계획을 세우라
6. 각자 자신에게 맞는 삶의 철학, 즉 원칙을 가져라

16. 249
주어진 일이 하기 싫은 것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은 학생 때 싹튼 것이다. 2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학생으로 지내다보니 인생의 대부분이 시험의 연속이었다. 근데 이상한 것은 영어 시험 때가 되면 수학책이 재미있어 보이고 수학 시험을 쳐야 할 때가 되면 반대로 영어가 재미있어 보이는 게 아닌가.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자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 재미있는 일이나 더 좋은 환경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또 다른 핑게를 댈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반면에 아무리 하기 싫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상황이 좋아질 때는 더 잘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7. 251,255,257

의과대학 예과 2학년 때, 본업이 아닌 취미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바둑을 배웠다.
일단 바둑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점에 가는 일이었다. 나는 인류가 쌓아놓은 세상의 모든 지혜는 책 속에 있다고 믿으며, 사람이 세상에 남기는 유일한 흔적이 글이라고 믿는다. 책 속에는 그 책을 쓰기까지 저자가 고민한 세월과 시행착오의 노력이 담겨 있다. 종류별로 50권 정도의 바둑 관련 책을 사서 무턱대고 읽기 시작했다.

나는 좋은 책을 만나면 밤을 새워가며 읽는다. 언젠가부터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때엔 항상 책을 통해서 먼저 그 세계를 간접 경험하는 원칙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독일의 유명한 문호 마틴 발저의 말처럼, 책은 우리 인간이 '어떤' 것을 이루고 '무엇'인가가 되는 데 가장 유익한 길잡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는 그동안 자신이 살아오면서 고민하고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바로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말의 진정한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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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5-05-06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TV, 책을 말하다에서 이 책을 다뤘는데요. 방송이 끝나고 나니, 마치 강의를 들은 것 같더군요. 제 자신이 안철수연구소의 백신 프로그램 구매자면서도 안철수의 책에 관심을 가진 적이 한번도 없는데, 어제 다뤘던 부분들이 모해짐님의 밑줄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군요. 책이 괜찮으셨나 봐요. 밑줄이 꽤 긴 걸 보니... ^^

진진 2005-05-07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보고 싶은 프로그램인데 아직 한번도... 기대했던것보다는 설렁설렁한 책이었답니다. ^^
 

1. 20
 『뇌 연구 최전선』을 예로 들면, 이 글을 쓰기 위해 대략 대형 책꽂이 1개 반 정도의 책을 읽었습니다. 다른 테마의 글을 쓸 때도, 큰 주제라면 대개 이 정도의 책을 읽습니다. 제 작업실에 있는 책꽂이는 한 단에 40권 정도의 책이 들어가는데, 이런 단이 7개 있으니 책꽂이 하나에 약 300권 정도의 책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책꽂이 1개 반 정도의 분량이라면 테마 하나에 약 500권 정도의 책을 읽고 있는 셈입니다.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은 아니고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읽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여기에 잡지의 기사나 논문, 인터뷰 등의 자료도 활용하므로 입력과 출력의 비율은 낮게 잡아도 100대 1 정도 되지 않을까요?

2. 41
하나는 독서 그 자체가 목적인 독서, 또 하나는 독서를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독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목적으로서의 독서란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자 즐거움인 책읽기인데, 대표적인 예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단으로서의 독서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독서를 통해 책 속에 담겨 있는 지식이라든가 정보 혹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책을 읽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요리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어 요리책을 보는 것을 들 수 있으며, 비즈니스 관련 서적, 자연과학 서적 등의 독서도 이 범주에 포함됩니다.

3. 42
젊은 시절에는 오직 목적으로서의 독서가 중심이어서 대학 시절에 수업도 빠지고 아침부터 잠까지 하루 종일 원하는 책만 읽었습니다. 당시 읽었던 책들 중 대부분은 문학 서적, 교양 서적이었습니다. 특히 문학 서적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구미 문학에 관해서는 당시 일본 독서광 100명 중 한 사람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독서는 학창 시절에 한정된 것이었고, 이후에는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한두 권 읽기도 하였습니다만, 학창 시절에 읽던 양에 비하면 아마 4%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4. 44
그래서 월급의 대부분을 책 사는 데 쓰면서, 학창 시절에 문학 서적이나 교양 서적을 열심히 읽었던 것처럼 엄청난 양의 논픽션 서적을 탐독하였습니다. 이처럼 논픽션 서적을 탐독하면서 문학가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살아 있는 현실과 비교할 때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학창 시절에 왜 그렇게 쓸데없는 책을 읽는 데 열중하였는지 도리어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
구체적이고 생생한 사건 한가운데로 직접 뛰어들어가 그 사건을 내 눈으로 직접 복, 생생하게 사건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직접 이야기를 나눌 때면, 활자화된 논픽션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빈약한 상상력의 산물인 픽션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전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눈앞에 살아 있는 생생한 현실의 거대함에 거의 압도당하여, 결국 저는 문학 작품을 읽지 않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가끔 문학 서적을 구입하기는 하지만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이것이 반복되니까 생쥐가 조건반사 하듯이 점점 문학 작품을 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날의 문학 부진 현상의 근본 원인들, 독자가 문학 작품에서 멀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을 현대 문학 속에서 찾아 볼 수 없다는 데서 찾고 싶습니다. 이런 점을 무시하고 독자가 문학 작품을 읽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이는 상황을 전혀 엉뚱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5. 58
'중앙공론'에 연재하고 있는『뇌사』를 쓰기 위해서 구입한 의학서는 금액으로 환산하면 50만 엔을 가볍게 넘어 버리고, 한 권 한 권 쌓아 올리면 높이가 3~4m 정도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테마가 큰 일을 맡게 되면, 쌓아올렸을 때 보통 높이 3~4m 정도 되는 관련 자료를 읽는 습관을 가져왔습니다.
...
이처럼 큰 테마의 일뿐만 아니라 작은 테마의 일을 맡게 되더라도 서점에 가서 신간 서적을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전부 사 와서 읽어봅니다. 쌓아 올린 높이로 치면 1m 정도이며, 구입비로 6만엔 정도의 비용이 듭니다.

6. 59
어떤 분야든 최첨단 정보를 얻고 싶을 때, 예를 들어 원수이학에 관한 것일 경우 대략 높이 1m에 구입비 5만 엔 정도의 자료를 읽으면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과정을 반복해 가는 가운데 커다란 재미와 즐거움을 느낍니다. 소설 종류는 읽을 틈도 없고 읽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어떤 영역에 좀더 깊이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지면, 그 일이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맡아서, 그것을 구실로 관심이 가는 영역을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합니다.

7. 65,66
어학을 배우려면 직접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학을 배우려면 집중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 1년 동안 하는것보다 매일 매일 한 달 동안 하는 편이 낫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체로 어학은 어학 이외의 다른 것을 모두 잊고, 오직 어학에만 정신을 집중하여 매달리는 방법을 택한다면 한 달 동안만 공부해도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을 수 있다.

8. 69,71
대부분의 분야에는 교과서적인 입문서로 정평이 나 있는 책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경제학 분야에서는 사무엘슨의 『경제학』을 들 수 있다.
이런 교과서적인 입문서를 세 권 정도 골라 구입하는 것이 좋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경향이 서로 다른 책을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9. 98
그토록 기대하던 서고 겸 작업실이 마침내 만들어졌다. 집에서 가까운 10평 정도의 토지에 철근 4층 건물(지상3층,지하1층)의 빌딩을 신축하여 지하 1층은 서고로 꾸미고, 지상 1층과 3층은 작업실, 2층은 사무실로 꾸몄다. 각 방들은 약 7평 정도로 좁다. 그러나 공간을 철저하게 활용하였기 때문에 서가의 총 길이를 합치면 700m에 이르며, 약 35,000권 정도의 책을 꽂을수 있다.

10. 105,117,119,120

나의 비서 공모기
'연령,학력 불문,주부도 가능'

사람 됨됨이는 면접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 보는 TV 프로그램. 최근 본 TV 프로그램 중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 것.
*지금 두 시간과 2만 엔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잘 웃는가?
*최근 옆구리가 아플 정도로 웃은 일. 최근 정말 화났던 일.
*최근 운 일.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

처음 자기 소개를 하는 프리젠테이션에서 가장 돋보였다. 다른 지원자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이력서에 A4 용지 한 장 정도의 자기 소개서를 첨부하는 정도였는데, 사사키 씨는 자신이 직접 독자적인 서식을 만들어 8쪽에 이르는 경력 사항을 적어 보내왔다. 이런 독자적인 서식을 만들어 보내 온 사람이 몇 명 더 있었으나, 사사키 씨의 경우에는 내용이 아주 훌륭하였다. 간결하면서도 요점이 분명하여 읽으면서 재미가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모집 요강에 '연령,학력 불문'이라고 기재하였던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조건을 붙였다면 (고졸이었던) 사사키 씨는 분명 면접 대상에서 밀렸을 것이다.

11. 122,132,134,137,158,162,169

이 곳 다치바나 씨의 작업실, 일명 '고양이 빌딩'은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까지 말 그대로 책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3만 권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처럼 방대한 책을 읽음으로써 다치바나 씨는 폭 넓으면서도 철저하게 일을 하실 수 있는것 같습니다.

Q: '대문학'을 읽은 것이 나중에 다치바나 씨가 하시는 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A: 여러 가지 의미에서 영향을 주었습니다. 첫째, 글을 써서 생계를 꾸려 가는 직업을 선택한 것 자체가 이미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글을 읽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으니 말입니다. 우선 제대로 된 소비자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생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문학을 통해 정신 세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래도 사물을 보는 눈이 사려 깊지 못합니다. 사물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식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문학이라는 세계는 처음 겉으로 나타난 것을 한 번 뒤집어 보면 다르게 보이고, 다시 그것을 뒤집어 보면 또 다르게 보이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표면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문학인 것입니다.

Q: '주간 문춘'에서 2년 반 정도 근무하신 뒤,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대학에 들어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A: 당시 여러 가지 이유로 일이 싫어졌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바쁘다는 것이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 놓고 읽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제 자신이 점점 바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대개의 경우 즐기면서 책을 읽을 때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일 때문에 필요해서 읽을 때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읽어 갑니다. 그러나 일만을 위해 책을 읽게 되면 좀처럼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렵부터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있는데, 작업하던 일의 테마를 잠시 비켜 놓고 일을 핑계삼아 읽고 싶은 책을 읽는 방법입니다. 어떤 분야의 책이 읽고 싶어지면, 그 분야의 일을 맡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일거리를 맡게 되면 그와 관련된 책을 빠짐없이 구입하여 꼼꼼히 읽습니다.

Q: 다치바나 씨는 밑줄 친 부분을 전부 외워 버린다는 전설을 들었습니다만.
A: 그렇습니까?(웃음) 젊었을 때는 어느 책 몇 쪽에 어떤 내용이 있다는 것쯤은 잘 기억했죠.
Q: 다치바나 씨와 독서에 대해 함꼐 생각해 볼 때, 가장 큰 특징은 그 방대한 독서량이 현실 속의 힘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서가로 불리는 사람은 많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 속 지식만 커져 현실에 대한 적응력을 잃고 마는 사람도 많으니까 말입니다.
A: 일반적으로 독서가들은 대개 인문 계열의 교양 서적은 많이 읽지만 과학 서적, 기술 서적 등은 거의 읽지 않습니다. 한편, 과학 기술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반 교양 서적을 거의 읽지 않습니다. C.P. 스노우가 말한 두 문화의 괴리는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의 소양을 가진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Q: 다치바나 씨의 책에는 매우 인상적인 수사법이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만.
A: 바로 거기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습니다. 어떤 부분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떠오를 때까지가 정말 힘듭니다. 저의 책을 막힘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궁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입니다. 원고를 집필하는 에너지의 3분의 1은 이처럼 좋은 표현을 찾는 데 소비하고 있습니다. 단 1,2분을 위해 몇 시간을 소비하는 셈입니다.

Q: 다치바나 다카시의 '마지막 한 권'은 과연 어떤 책이 될까요?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A: 오히려 심플한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은 어떤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것이 옳다는 논증을 전개하면서 집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책에는 그런 논증 없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단순한 제 생각만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같은 스타일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플라톤의 『대화편』같은 스타일도 좋을 것 같고요. 하지만 아직 먼이야기입니다.

12. 183
퇴사의 변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간은 할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내 경우, 하고 싶은 일이란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보는 것뿐이다. "그 정도라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
학창 시절부터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고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책을 사는 데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을 책상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그 산을 점령해 갔고, 산을 다 점령하고 나면 또다시 서점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책을 구입하여 책상에 산을 만드는 일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13. 217
이렇게 글을 쓰는 목표는 책을 읽는 사람에게 그 책을 읽고 싶다는 기분이 들게 하여, 서점의 판매대에서 그 책을 반견하였을때 펼쳐 보도록 하는 데 있다. 또한 그 책을 사야겠다는 기분까지는 들게 하지 못하더라도 그 책이 어떤 책인가를 알려 주어, 그 안에 실려 있는 정보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작은 지식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고,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도 지적 우주를 확대해 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책을 읽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오호라'하며 마음속에서 놀라움의 탄성을 지를 수 있게 하는 한 구절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14. 220
일반적으로 읽는 것 자체를 즐기기 위한 책은 속독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천천히 읽어야 책 읽기를 좀더 오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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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이였지만, 어쩐지 이제부터는 미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싶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이루어 낸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에는 차츰차츰 무일푼으로 전락해 아파트마저 잃고 길바닥으로 나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만일 키티 우라는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내가 그녀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지만, 나는 마침내 그 기회를 내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의 한 형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나 자신을 구하는 방법으로 보게 되었다. 그녀를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휠체어에 의지한 노인에게서 일자리를 얻었고,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타 주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주까지 걸어서 사막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그것은 물론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 삶의 출발점으로서.

2. 6
그 아파트에서 나는 1천 권이 넘는 책들과 함께 살았다. 그 책들은 원래 빅터 외삼촌 소유로, 그가 근 30년에 걸쳐 한 권 두 권 사 모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대학으로 떠나오기 바로 전, 그는 무슨 충동에서인지 헤어지는 선물로 내게 그 책들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사양을 하려고 별의별 애를 다 썼지만, 외삼촌은 다정다감하고 아낌없이 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 수중에는 너한테 줄 만한 돈이 없다. 또 충고도 한 마디 해줄 수 없고. 그러니 네가 이 책을 받아 준다면 기쁘겠구나."
나는 그 책들을 받기는 했지만 그 뒤로 1년 반 동안은 그 책들이 담겨 있는 상자를 하나도 풀지 않았다. 내 속생각은 그를 설득해서 책들을 다시 가져 가도록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때까지는 책들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3. 26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생겨 먹었던가를 알 수 있다. 말라빠진 몸집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하고 분명히 세상에서 비켜 선 과격한 젊은미. 그러나 사실 나는 세상에 적응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내 동료 학생들이 나를 괴짜로 여기더라도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보기 드물게 지성적이고 다투기 좋아하고 자기 주장이 센 미래의 천재,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악의 화신이었다. 그 당시에 내가 취했던 우스꽝스런 태도를 떠올리면 지금까지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때 나는 소심함과 자만심이 기괴하게 뒤섞인 상태에서 길고 어색한 침묵과 격력하고 제멋대로인 발작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내킬 때면 밤새도록 술집들을 돌아다니며 담배를 피우고, 죽기로 작심한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16세기 무명 시인들의 시를 인용하고, 중세 철학자들에 대해 라틴 어로 뜻 모를 말을 하고,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하려고 들었다. 열여덟은 끔찍한 나이여서 나는 내가 다른 급우들보다 어쨌든 더 어른이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다녔지만, 실제로는 단지 더 어려지는 다른 방법을 찾았을 뿐이었다.

4. 136
빅터 삼촌이 오래 전에 얘기했듯이, 대화는 누군가와 함께 공던지기 놀이를 하는 것이나 같다. 쓸 만한 상대방은 공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짐으로써 여간해서는 놓치지 않게 하고 그가 받는 쪽일 때에는 자기에게로 던져진 모든 공을, 아무리 서툴게 잘못 던져진 것일지라도, 능숙하게 다 잡아낸다. 키티가 바로 그랬다.

5. 160
나로서는 그 눈이 볼 수 있는지 아닌지 알기가 어려웠다. 어느 순간에는 그것이 모두 속임수이며 그는 나처럼 잘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순간에는 그가 완전히 앞을 못 본다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바로 에핑이 원했던 방식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신호들을 발한 다음 사실을 절대로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을 한껏 즐겼다.

6. 184
마침내 그(토머스 에핑)가 말했다.
"나는 그걸 해 봤고 지금은 그게 모두 내 머리 속에 있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황무지 한가운데서 혼자 몇 달 몇 년씩 살아 봤지...... 일단 그러고 나면 평생 동안 그걸 절대로 잊지 못해. 나는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어.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로 돌아가 있으니까. 거기가 요즘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야. 아무도 없는 곳 한가운데로 돌아가서......"

7. 298
"어르신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낯선 사람들에게 50달러짜리 지폐를 건네 주자는 건가요? 그런다면 폭동이 일어날 텐데요. 사람들은 미칠 거고 우리를 잡아 찢을 겁니다."

8. 316
그(토머스 에핑)가 말했다.
"자네는 몽상가야. 자네 마음은 달에 가 있어.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걸로 봐서는 그래 가지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자네는 야망도 없고 돈에도 전혀 관심이 없고 예술을 느끼기에는 너무 철학적이야. 내가 자네를 어떻게 해야 하지? 자네한테는 뒤를 봐 주고 뱃속에 음식이 들어 있는지, 호주머니에는 돈이 좀 있는지 보살펴 줄 사람이 있어야 해. 내가 죽고 나면 자네는 곧장 시작했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말 거야."

9. 328
-유골을 뿌리는 장면을 보며-
찰리가 자기의 누이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나한테도 저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리타. 내가 죽은 뒤에 나를 태워서 공중에다 던져 줬으면 좋겠어. 멋진 장면이야.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춤을 추며 흩어지다니.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야."

10. 350
그(솔로몬 바버)를 보고 웃거나 그 자리에 얼어붙는 사람들 사이를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풍선처럼 부푼 청년이었다. 그렇기에 책은 일찍부터 그를 위한 피난처, 그가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생각으로부터도 그랬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기가 그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누구 책임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자기 앞에 있는 책장의 글자들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는 자신의 몸을 잊을 수 있었고, 그것이 자신에ㅣ 대한 비난을 한옆으로 제쳐놓는 데 무엇보다도 더 도움이 되었다. 책은 그에게 떠오를 기회, 마음속에서 자신을 띄워 올릴 기회를 제공했고, 책에 완전히 몰두하는 한 그는 자기가 자유롭게 풀려났다고, 그를 끔찍한 닻에 묶어 놓고 있는 밧줄이 끊어졌다고 자신을 속일 수 있었다.

11. 353
매일 아침마다 그는 러시아워의 유클리드 가를 따라 걸어가면서 자신을 시험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반드시 웨이예 공원으로 나가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입을 쩍 벌리고서 쳐다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자기에게 쏟아지는 눈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외톨이, 자신의 비틀거리는 의식을 헤치고 터벅터벅 걷는 둥근 달걀 모양의 단세포 생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효과가 있어서 그는 더 이상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혼돈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그는 마침내 솔로몬 바버, 내노라 하는 중요한 인물, 자신을 극복하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가 되었다.

12. 412
나에게 현실로 존재하는 사람은 키티 하나뿐이었는데, 그녀가 없다는 것이 너무도 절실하고 뼈저리게 와 닿아서 다른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매일 밤이 똑같은 고통, 똑같은 숨막힘, 그녀의 손길을 다시 느끼려는 가슴 저밀 듯한 욕구로 시작되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처 알아차릴 틈도 없이 나는 온몸의 피부 밑에서 나를 지탱하고 있는 조직들이 이제 막 폭발하려는 것 같은 동통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가장 갑작스럽고 가장 절대적인 형태의 박탈감이었다. 키티의 몸은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있어서 그녀의 몸이 내 곁에 있지 안고는 내가 나 자신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마치 내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13. 434
"나는 매순간마다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도 그건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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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 2005-02-10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처음으로 읽은 폴 오스터의 책이지요. 음, 딴지는 아니지만 '내노라'는 '내로라하는'이 맞는 거 아닌가요....

진진 2005-02-10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내노라로 알고 있었다는..--;;; 도망가야게따 ㅋㅋ 감사해용 저도 처음 읽은 폴 오스터..
 

1. 5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꿈 속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마주치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을 수 없을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그리움을 해소해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서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이성의 검열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에서 정해진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2. 16
낭만적 운명론은 물론 신화이고 착각이다. 그러나 그것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릴 이유는 없다. ... 클로이가 내 삶에서 하게 된 역할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해낼 수 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눈이고,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거나 키스를 하는 방식이고, 그녀가 전화를 받거나 머리를 빗는 모습인데.

3. 22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신에 대한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4. 30
차라리 편지라면 좋았을 것을. 그녀가 일주일 뒤에 전화를 했을때 나는 연습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준비했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채 어슬렁거리다가, 면봉으로 귀를 후비며 욕조의 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기습을 당했다. 나는 침실에 있는 전화로 달려갔다. 목소리는 배우지 않는 한, 그래서 연기를 하지 않는 한, 밑바탕 스케치일 수밖에 없다. 내 목소리에는 긴장, 흥분, 분노가 담겨 있었는데, 만일 종이에 쓰는 글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능숙하게 지워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화기는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라서 말하는 사람에게 한 번의 기회밖에 주지 않았다.

5. 39
"두 당사자가 평등한 상태에서, 서로 똑같이 줄 준비가 된 상태에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거예요. 서로 똑같이 줄 준비가 된 상태에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거예요. 한쪽은 얼른 한번 즐기고 싶어하고 다른 쪽은 진정한 사랑을 원할 때에는 관계가 성립되면 안되죠. 거기서 모든 고민이 생기는것 같아요. 불균형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인생에서 뭘 원하는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6. 44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지 않고 그녀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내 타이가 어떤가? 하고 묻지 않고 그녀가 내 타이를 어떻게 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 그 질문의 재귀적인 운동 속에서 나의 자아는 점점 배반과 비진정성에 물들게 될 수밖에 없었다.

7. 80
어쩌면 우리가 찾는 것은 반드시 더 푸른 풀이 아니라,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풀일지도 모른다.

8. 82
마르크스주의자의 욕망의 대상이 된 사람은 불균형이 정산으로 보이는 영역에서 정확한 균형을 성취해야 한다. ... 클로이에게는 어려운 과제가 있었다. 나의 독립성을 위험에 빠뜨릴 만큼 연약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나의 연약성을 부인할 만큼 독립적이어서도 안 된다는 것.

9. 85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해지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전에 어디선가, 어쩌면 전생에서, 또는 꿈에서 만났던 것 같기도 하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원래 우리와 하나였다가 떨어져나간 우리의 "반쪽"이기 때문에 이런 익숙한 느낌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10. 89
 나는 클로이가 내 눈에는 잘 봐주어야 별 매력 없는 구두에 황홀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클로이가 어떤 여자인지에 대한 내 생각, 나의 아리스토파네스적인 확신에는 이 구두에 대한 열광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그 구두를 살 때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을까를 생각하니 정신이 산란해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 여자는 이런 구두와 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클로이가 그 구두를 골랐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불편하게도 그녀가 그녀 나름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녀의 취향이 늘 나와 같을 수는 없다는 것, 우리가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모순이 없을지 몰라도 그런 조화의 상태가 무한히 뻗어나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어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이 늘 상식적인 생각처럼 유쾌한 과정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1. 137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따분해 보인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뜨거움을 친구들과 공유해보려고 했다. 영화, 책, 정치와 관련하여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친구들한테 세탁기 옆의 클로이, 영화관에서의 클로이와 나,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는 클로이와 나에 대해서 열 번쯤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플롯은 없고 액션조차도 거의 없는 이야기, 동작이 거의 없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기껏해야 다른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12. 160
 7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 저녁 우리는 포토벨로 로드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날이어서 종일 하이드 파크에서 일광욕을 하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5시 무렵부터 나는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집으로 가서 이불 밑에 숨고 싶었다. 그러나 딱히 피해야 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충동에 저항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일요일 저녁이면 우울했다. 죽음, 끝내지 못한 일, 죄, 상실이 떠올랐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클로이는 신문을 읽었고, 나는 창 밖의 차량과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클로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너 또 길 잃은 고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네."
 전에는 아무도 내 표정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지만, 클로이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그 말이 그때까지 내가 느끼던 혼란스러운 슬픔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되면서, 내 우울도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 말 때무에, 내가 스스로 정리할 수 없었던 느낌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녀가 기꺼이 내 세계로 들어와 나 대신 그것을 객관화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강렬한[그리고 어쩌면 균형이 잡히지 않은] 사랑을 느꼈다. 고아에게 고아라고 말해줌으로써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13. 164
♣그녀는 질식할 것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길 떄문에 움직임이 뻣뻣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시골에서, 창문은 크고 가구는 거의 없는 널찍한 하얀 집에서 혼자 사는 꿈을 꾸었다. 억압적인 눈길로 그녀의 진을 다 빼버리는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열아홉이 되었을 떄 그녀는 애리조나로 감으로써 그 욕망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녀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작은 도시 변두리의 오두막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어린 시절에 살던 집으로부터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는 젊음의 낭만주의에 흠뻑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고전들이 가득 든 가방을 가지고 갔다. 그녀는 달의 표면 같은 사막 너머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며 그 책들을 읽고 주석을 달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 주가 지나지 않아 그녀는 평생 갈망했던 고독 때문에 방향감각이 흐트러지고, 겁이 나고, 현실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주 조그만 시장에 가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소리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존재감, 자신의 경계들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마침내 겨우 한 달 만에 그녀는 그 소도시를 떠나 피닉스의 한 레스토랑에 웨이트리스로 취직했다. 그녀를 내리누르는 "비현실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닉스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사회적 접촉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기본적인 질문에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라는 것에 대한 모든 느낌을 잃었다. 그녀가 겪은 경험들은 언어로 정리될 수 없을 것 같았다.

14. 177
언어는 그 안정성으로 우리의 우유부단함에 아첨한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언어 덕분에 우리는 지속과 고정이라는 착각속에 숨을 수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모든 것이 흘러가버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임을 지적하고 있지만, 강이라는 단어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나의 감정들의 유동성과 변덕스러움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전달해줄까? 그 말 속에 이 사랑과 얽혀 있는 그 모든 배신, 권태, 짜증, 무관심이 들어설 공간이 있을까? 내 감정은 양면 공존의 운명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는데, 도대체 어떤 말이 그 상태를 조금이나마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을까?

15. 204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불안은 부분적으로는 내 행복의 원인이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오는 불안이었다. 클로이는 갑자기 나에게 흥미를 잃을 수도 있었고, 죽을 수도 있었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관계를 일찌감치 끝내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나 습관이나 익숙함이 관계를 끝내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클로이나 나 둘 중의 하나가 끝을 내버리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연애가 자연스러운 종말에 이르기 전에 끝내버리고 싶은 충동[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말다툼을 하는 것에서 표현되었다]을 느꼈다. 증오에서 나온 살인이 아니라 지나친 사랑에서 나온, 아니 지나친 사랑이 가져올 공포에서 나온 살인이었다. 연인들은 그들의 행복의 실험에 수반되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견딜 수 없을 때에만 자신들의 사랑의 이야기를 끝낼 수 있다.

16. 267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우리는 시간표가 꽉 짜인 현재의 무자비한 역학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지만, 마음의 자리인 영혼은 기억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만일 모든 연애가 낙타에게 짐을 더 얹는 것이라면, 사랑의 짐의 의미에 따라서 영혼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낙타가 마침내 클로이의 기억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떨쳐버렸을 때, 낙타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17. 270
그러다가, 불가피하게, 나는 잊기 시작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몇 달 뒤, 나는 런던의 그녀가 살던 동네에 갔다가, 그녀에 대한 생각이 전처럼 괴롭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내가 그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바로 그녀가 살던 동네였음에도], 근처 레스토랑에 잡아놓은 약속을 먼저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클로이에 대한 기억은 중립화되면서 역사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런 망각에는 죄책감이 뒤따랐다.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의 부재가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망각은 내가 한때 그렇게 귀중하게 여겼던 것의 죽음, 상실, 그것에 대한 배신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18. 272
낙타는 시간을 따라 걸어가면서 짐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계속 등에 실린 기억과 사진들을 흔들어 사막에 떨어뜨렸고, 바람이 그것들을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낙타는 점점 더 가벼워져서 나중에는 그 독특한 모습으로 뛰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현재라고 부르는 조그만 오아시스에서 이 지친 짐승은 나의 나머지를 따라잡게 되었다.

19. 273
우리는 사는 방법을 알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사는 것도 자전거 타기나 피아노 치기처럼 하나의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고나면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지 시작한다. 그러나 지혜가 우리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까? 지혜는 우리에게 평정과 내적 평화를 목표로 삼으라고 말한다. 불안, 두려움, 우상 숭배, 해로운 정열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의 첫 충동이 꼭 진실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이성을 훈련시켜서 무익한 요구와 진정한 요구를 분리하지 않으면 욕심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통제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그것이 현실을 왜곡하여 산을 흙둔덕으로, 개구리를 공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제어하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해를 주는 것은 두려워하되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말라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고 가르친다.

20. 274
♣성숙한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으로 나눌 수도 있다. 성숙한 사랑의 철학은 거의 모든 면에서 미성숙한 사랑보다 바람직하며, 그 특징은 각 개인의 선과 악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다. 성숙한 사랑은 절제로 가득하며, 이상화에 저항하며, 질투, 매저키즘, 강박에서 자유로우며, 성적 차원을 갖춘 우정의 한 형태이며, 유쾌하고, 평화롭고, 상호적이다[어쩌면 이래서 욕망이 무엇인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고통 없는 상태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미성숙한 사랑은 [나이와는 거의 관계가 없기는 하지만] 이상화와 실망 사이의 혼란스러운 비틀거림이며, 환희나 행복의 감정이 익사나 섬뜩한 구토의 인상과 결합되어 있는 불안정한 상태이며, 마침내 답을 찾았다는 느낌이 이렇게 헤맨 적이 없다는 느낌과 공존하는 상태이다. [절대적이기 때문에] 미성숙한 사랑의 논리적 절정은 상징적이든 현실적이든 죽음이다. 성숙한 사랑의 절정은 결혼이며, 일상[일요일 신문, 다리미, 리모컨이 달린 장치들]을 통해서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이다. 미성숙한 사랑은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다. 일단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으로 가는 길에 올라설 수밖에 없다. 미성숙한 정열의 정점을 안 사람은 결혼으로 정착하는 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차라리 절벽 너머로 차를 몰아 끝장을 내고 만다.

21. 277
페기 니얼리 박사의 '괴로운 마음'은 무엇에 대한 책일까? 이 책은 어울리지 않는 짝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와 여자, 상대를 잔인하게 대하거나 감정적 불만족 상태에 빠뜨리는 사람들, 술이나 폭력에 의존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행하지만 낙관적인 이야기이다. 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사랑과 고통을 연결시키며, 그들이 사랑하게 된 어울리지 않는 유형의 짝이 변화를 일으켜서 그들을 제대로 사랑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그들의 감정적 요구에 응답할 수 없는 사람들을 바꿀 수 있다는 미망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게 된다. 니얼리 박사는 제3장에서 문제의 근원이 결함 있는 부모라고 밝힌다. 부모는 이 불행한 낭만주의자들이 감정의 과정을 왜곡되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주 어린 시절의 감정적 애착 경험을 통해서 사랑이 보답받지 못하는 것이며 잔인한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들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을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치료과정에 들어가 유년시절을 다시 짚어보면 자신의 매저키즘의 뿌리를 이해하게 되고, 어울리지 않는 짝을 변화시키려는 욕망이 사실은 문제 있는 부모를 제대로 된 부모로 바꾸던 어린 시절의 공상의 잔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22. 286
- 역자후기 -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은 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의 눈으로, 또는 굳이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생각이 깊고 많은 사람의 눈으로 일상을 해석하는 데에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런 재주를 통찰력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이 책에서 드 보통의 통찰력은 우리가 여러번 무릎을 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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