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이였지만, 어쩐지 이제부터는 미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싶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이루어 낸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에는 차츰차츰 무일푼으로 전락해 아파트마저 잃고 길바닥으로 나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만일 키티 우라는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내가 그녀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지만, 나는 마침내 그 기회를 내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의 한 형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나 자신을 구하는 방법으로 보게 되었다. 그녀를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휠체어에 의지한 노인에게서 일자리를 얻었고,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타 주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주까지 걸어서 사막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그것은 물론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 삶의 출발점으로서.
2. 6
그 아파트에서 나는 1천 권이 넘는 책들과 함께 살았다. 그 책들은 원래 빅터 외삼촌 소유로, 그가 근 30년에 걸쳐 한 권 두 권 사 모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대학으로 떠나오기 바로 전, 그는 무슨 충동에서인지 헤어지는 선물로 내게 그 책들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사양을 하려고 별의별 애를 다 썼지만, 외삼촌은 다정다감하고 아낌없이 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 수중에는 너한테 줄 만한 돈이 없다. 또 충고도 한 마디 해줄 수 없고. 그러니 네가 이 책을 받아 준다면 기쁘겠구나."
나는 그 책들을 받기는 했지만 그 뒤로 1년 반 동안은 그 책들이 담겨 있는 상자를 하나도 풀지 않았다. 내 속생각은 그를 설득해서 책들을 다시 가져 가도록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때까지는 책들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3. 26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생겨 먹었던가를 알 수 있다. 말라빠진 몸집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하고 분명히 세상에서 비켜 선 과격한 젊은미. 그러나 사실 나는 세상에 적응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내 동료 학생들이 나를 괴짜로 여기더라도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보기 드물게 지성적이고 다투기 좋아하고 자기 주장이 센 미래의 천재,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악의 화신이었다. 그 당시에 내가 취했던 우스꽝스런 태도를 떠올리면 지금까지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때 나는 소심함과 자만심이 기괴하게 뒤섞인 상태에서 길고 어색한 침묵과 격력하고 제멋대로인 발작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내킬 때면 밤새도록 술집들을 돌아다니며 담배를 피우고, 죽기로 작심한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16세기 무명 시인들의 시를 인용하고, 중세 철학자들에 대해 라틴 어로 뜻 모를 말을 하고,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하려고 들었다. 열여덟은 끔찍한 나이여서 나는 내가 다른 급우들보다 어쨌든 더 어른이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다녔지만, 실제로는 단지 더 어려지는 다른 방법을 찾았을 뿐이었다.
4. 136
빅터 삼촌이 오래 전에 얘기했듯이, 대화는 누군가와 함께 공던지기 놀이를 하는 것이나 같다. 쓸 만한 상대방은 공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짐으로써 여간해서는 놓치지 않게 하고 그가 받는 쪽일 때에는 자기에게로 던져진 모든 공을, 아무리 서툴게 잘못 던져진 것일지라도, 능숙하게 다 잡아낸다. 키티가 바로 그랬다.
5. 160
나로서는 그 눈이 볼 수 있는지 아닌지 알기가 어려웠다. 어느 순간에는 그것이 모두 속임수이며 그는 나처럼 잘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순간에는 그가 완전히 앞을 못 본다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바로 에핑이 원했던 방식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신호들을 발한 다음 사실을 절대로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을 한껏 즐겼다.
6. 184
마침내 그(토머스 에핑)가 말했다.
"나는 그걸 해 봤고 지금은 그게 모두 내 머리 속에 있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황무지 한가운데서 혼자 몇 달 몇 년씩 살아 봤지...... 일단 그러고 나면 평생 동안 그걸 절대로 잊지 못해. 나는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어.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로 돌아가 있으니까. 거기가 요즘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야. 아무도 없는 곳 한가운데로 돌아가서......"
7. 298
"어르신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낯선 사람들에게 50달러짜리 지폐를 건네 주자는 건가요? 그런다면 폭동이 일어날 텐데요. 사람들은 미칠 거고 우리를 잡아 찢을 겁니다."
8. 316
그(토머스 에핑)가 말했다.
"자네는 몽상가야. 자네 마음은 달에 가 있어.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걸로 봐서는 그래 가지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자네는 야망도 없고 돈에도 전혀 관심이 없고 예술을 느끼기에는 너무 철학적이야. 내가 자네를 어떻게 해야 하지? 자네한테는 뒤를 봐 주고 뱃속에 음식이 들어 있는지, 호주머니에는 돈이 좀 있는지 보살펴 줄 사람이 있어야 해. 내가 죽고 나면 자네는 곧장 시작했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말 거야."
9. 328
-유골을 뿌리는 장면을 보며-
찰리가 자기의 누이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나한테도 저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리타. 내가 죽은 뒤에 나를 태워서 공중에다 던져 줬으면 좋겠어. 멋진 장면이야.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춤을 추며 흩어지다니.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야."
10. 350
그(솔로몬 바버)를 보고 웃거나 그 자리에 얼어붙는 사람들 사이를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풍선처럼 부푼 청년이었다. 그렇기에 책은 일찍부터 그를 위한 피난처, 그가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생각으로부터도 그랬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기가 그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누구 책임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자기 앞에 있는 책장의 글자들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는 자신의 몸을 잊을 수 있었고, 그것이 자신에ㅣ 대한 비난을 한옆으로 제쳐놓는 데 무엇보다도 더 도움이 되었다. 책은 그에게 떠오를 기회, 마음속에서 자신을 띄워 올릴 기회를 제공했고, 책에 완전히 몰두하는 한 그는 자기가 자유롭게 풀려났다고, 그를 끔찍한 닻에 묶어 놓고 있는 밧줄이 끊어졌다고 자신을 속일 수 있었다.
11. 353
매일 아침마다 그는 러시아워의 유클리드 가를 따라 걸어가면서 자신을 시험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반드시 웨이예 공원으로 나가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입을 쩍 벌리고서 쳐다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자기에게 쏟아지는 눈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외톨이, 자신의 비틀거리는 의식을 헤치고 터벅터벅 걷는 둥근 달걀 모양의 단세포 생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효과가 있어서 그는 더 이상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혼돈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그는 마침내 솔로몬 바버, 내노라 하는 중요한 인물, 자신을 극복하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가 되었다.
12. 412
나에게 현실로 존재하는 사람은 키티 하나뿐이었는데, 그녀가 없다는 것이 너무도 절실하고 뼈저리게 와 닿아서 다른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매일 밤이 똑같은 고통, 똑같은 숨막힘, 그녀의 손길을 다시 느끼려는 가슴 저밀 듯한 욕구로 시작되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처 알아차릴 틈도 없이 나는 온몸의 피부 밑에서 나를 지탱하고 있는 조직들이 이제 막 폭발하려는 것 같은 동통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가장 갑작스럽고 가장 절대적인 형태의 박탈감이었다. 키티의 몸은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있어서 그녀의 몸이 내 곁에 있지 안고는 내가 나 자신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마치 내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13. 434
"나는 매순간마다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도 그건 알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