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자의 말
내게 한 권의 책을 읽는 행위는 해명되지 않는 삶의 비밀을 풀어가기 위한 질문이었다. 질문거리가 많았으므로, 자연스럽게 나의 독서는 난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낄낄거리며 만화책을 읽다가도, '존재자' 운운하는 하이데거를 읽는 일이 내게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책읽기란 '나'와 '세상'에 대한 물음 던지기의 일부였고, 그런 방식으로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의 물음은 해소되기보다는 더욱 충만해졌다. 그런 일을 나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내 생각에 좋은 책이란 '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물음'을 키워주는 책이다.
...
그래도 산다는 일이 때때로 팍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쓰린 마음에 소금이 뿌려져 그야말로 소금밭이 되는 일도 종종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움큼의 투명한 소금이야말로 가혹한 비바람과 격렬한 태양 아래서 마술적으로 응결된 것, 아니 단련된 것. 사각형의 책들을 순례하면서, 나는 사는 일을 경쾌하게 긍정하는 연습을 했으며, 더 나은 삶에 대한 질문을 거듭 던졌다.

2. 19
책읽기라는 것이 그렇다. 눈썹에 힘을 주고 책을 읽다가도, 페이지는 넘어가는데 생각은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널뛰기를 하는 것이다. '몽상의 시학'이란 말도 있다 하니, 이걸 '몽상의 독서'라고 명명하자.

3. 24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서가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을 보면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오래된 책들에서 나는 서늘한 냄새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제법 '오래된 인간'이 되어버린 나, 별 수 없이 '무화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그런 향기 없는 젊음의 대피소가 기껏 도서관의 지하서고였다. 습기와 책 먼지로 가득한, 어두운 지하2층의 서고에서 허균의 산문집을 읽었다. 과거에 이미 다 읽어보았던 것인데, 그게 그렇게 새롭게 읽혔다.

4. 78
책을 읽는 일이 직업이 되다 보니, 종종 책읽기가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이를테면 의무감이 나를 불러 책상에 앉게 할 때라든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책을 읽었으나, 그 책이 도대체가 내게 아무런 지적, 정서적 자극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그러하다. 그럴 때, 제법 품위 있게 우리가 '독서'라고 명명하는 그 행위는 여타의 '소외된 노동'과 궤를 같이하는 불편한 시간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의 체험에 빠져들 때가 있다. 아주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어떤 책의 페이지를 무심히 들추는데, 거기서 자기의 마음과 딱, 공명(共鳴: 남의 사상이나 의견 따위에 동감함)하는 문장들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이 그렇다. 책읽기에도 어떤 '계시의 체험'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5. 85
2001년 11월 3일 '이문열 책 반환행사'가 있었다. 이문열 소설의 독자들이 몇 달간 작가가 보여준 문학과 행태에 실망한 나머지, 그들이 소장해왔던 작품을 저자에게 되돌려주는 행사였다. 이문열 씨의 독자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책 반환행사의 단초를 제공했던 이문열 씨의 발언이다.
"독자님, 얼른 반송해주세요. 책값은 현행법상 최고 이율은 붙여 반환하겠습니다. 아울러 부탁하는 바는 어디 가서 내 책을 읽었다고 하지 마십시오. 내가 직접 사람 골라가며 팔지 못하다보니 고객을 잘못 고른것 같습니다."

6. 108
많은 문인들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글쓰기에 집중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몇 년 전에 타계한 비평가 고 김병걸은 병상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내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그 순간까지, 기를 쓰고 글써야지. 피를 토하다 쓰러지는 그 찰나까지. 기를 쓰고 글써야지. 글은 내가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의 핏자국" 그가 죽은 후 한 문예지에 발표된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극심한 '전율감'에 빠졌었다.

7. 109
쓰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럴 수 없다는 데에 글쓰기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몇몇 운 좋은 예외를 제외하면, '쓴다'는 행위는 작가들에게 먹을 것이 공기밖에 없을 정도의 가난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쓴다'는 행위의 '마력'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고통 속에 밀어넣으면서, 역설적이게도 이로부터 행복을 추구한다. 냉정한 세속인의 시작에서 볼 때, 문인들은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하도 이해가 안 되니까, 서구의 어느 심리학자는 문인들의 존재를 '광기'와 관련하여 연구해보기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광인들의 심리상태와 문인들의 그것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광기가 창조의 원천이래나 뭐래나.

8. 156

9. 164
방현석은 '아름다운 저항'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시간이 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은 언제일까. 사람답게 살기 위해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싸운 흔적, 그 흔적 앞에서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시간과 인간의 풍경을 목격한다."

10. 190
악화된 출판환경에도 불구하고 참신한 기획을 선보이고 있는 몇몇 책에 대해 논의를 펼쳐보기로 하자. 많은 현장 출판인들은 아무리 기획이 참신하다고 해도, 기획에 걸맞는 책을 쓸 수 있는 필자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출판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어쨌든 '대중독자' 또는 '중간독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목표독자층에 걸맞는 책을 쓸 수 있는 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주장이다. '컨텐츠'의 측면에서는 비교적 우수한 책들의 집필자들도 지식인 특유의 '엄숙주의'에 빠져 있는 나머지 대중들과의 생동감 있는 소통에 실패하고, 대중적으로 긴밀하게 접근하겠다는 의도에서 쓰여진 많은 책들은 반대로 '콘텐츠'의 빈약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11. 194
불면의 밤은 실존을 밝히는 등불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지금 나는 그 등불 앞의 생에 대해 가볍게 떨고 있다. 그 떨림을 가능케 하는 것은 쓴다는 행위다. 논리적으로 어떤 사유가 있고, 그것이 글쓰기로 연결되는 것이겠으나, 나에게는 쓴다는 행위가 있은 연후에야 사유가 가능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를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 쓴다는 행위조차도 컴퓨터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허언(虛言:실속이 없는 빈 말)이 아니다. 컴퓨터의 전원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나의 사유는 작동되며 자판 위로 열 개의 손가락을 올려놓는 순간 희미하게 존재했던 어떤 이미지들이 육체를 얻게 된다. 계시처럼 어떤 말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실제로 이러한 경험은 일상 속에서, 수풀 속에 숨어 있던 개구리가 예고도 없이 뛰쳐나오듯 그렇게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잠에서 막 깨어난 바로 그 순간, 내 입술은 때때로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을 뱉어낼 때가 있다. "음, 아주 먼길을 걸어왔군." 나는 이 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맥락에서 탈구(脫句:시문에서, 빠진 글귀)된 발언이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가끔 시의 몸을 갖추지 못한 전언이 나에게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노트에 성급하게 옮겨 적는다."

12. 274
독자들이 비평을 읽지 않는 이유

13. 282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에세이 '고통 속의 유미주의 체험'에 대한.
일상 속의 그가 완전한 '미적 결여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미적인 것이 구원처럼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 전체가 폐허나 야만상태에 처해지더라도 인간은 아름다움을 통해서 자신의 추락한 영혼을 구원하는 끈질긴 관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인간됨을 포기하지 않으며, 어처구니없게도 자꾸만 아름다움에 대해 상상하고 싶어한다.

14. 290
독일의 문예학자인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물신에 대한 현혹이 왕성하게 작동되는 곳이 동시에, 현실의 고통을 은폐하는 이미지의 스펙트럼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환영의 공간이기도 하다. 백화점에 진열된 찬란한 상품들을 음미하면서, 대중들은 그들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남루한 일상의 질서를 순간적으로 망각하게 되며 물신화된 상품의 유혹에 시선을 집중하게 되는데, 이것은 롯데 백화점이 배치되어 있는 공간적 구조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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