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5 - 최초의 민족통일국가 고려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5
이이화 지음 / 한길사 / 199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이화 선생님의 한국사 이야기는 전집으로 우리 집 책장 한 켠에 늘 자리하고 있다. 오래된 책이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정답고 미소를 짓게 하는 책이다. 선생님을 단 한 번 뿐이지만 민중사 강연 때 뵈었던 적이 있었는데 사진이나 동영상에서 본 모습보다 더 푸근한 인상이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물론 강의에서는 단호함이 묻어나셨지만!


이이화 선생님의 역사 이야기 서술 방식의 특징은 민중의 힘을 강조하셨다는 점에 있다. 민중사가 이제는 대세가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역사가 권력층의 입장에서 쓰여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책은 계속 소비되어야 하고 읽혀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국사 이야기 5권은 고려라는 나라가 성립된 시기부터 거란이라는 나라를 만나서 관민이 힘을 합쳐 물리칠 때까지를 다룬다. 


고려의 역사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보았으나 항상 아쉬운 것은 사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특히 정사인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기에 작업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인의 입장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기록이 너무 소략한 경우가 많아서 아쉬움이 많다. 때문에 고려와 동시기에 존재했던 다른 나라들의 역사를 참고하거나 '야사'를 찾아봐야 하지만 그마저도 조선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은 숫자라서 슬프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위주로 적어보려한다.


때는 바야흐로 983년, 개경 거리에 술집 여섯 곳이 들어섰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설된 관영 술집이었다고. 11세기 말 숙종 시기 동전을 전파하기 위해서 민간인에게 주점을 맡기기 시작했고 그 뒤로 술집은 민간인이 경영하게 된 것이라 한다. 사극을 보면 주막을 보게 되는데 이 때가 시작이 아닐까.


또 무당을 찾아가는 일인 '당골'이라는 단어가 현재 우리가 쓰는 '단골'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 절에서는 여러 시설을 만들었는데 그 중 민간에서 경영하는 최초의 여관이자 음식점을 이름하여 '원'이라고 불렀다. 스님들만 이곳에 가서 숙박을 하고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민간인들에게도 이것을 공유했다는 점이 특이했다.


아무래도 불교를 중시하던 국가여서 불교와 관련한 것이 많은데 승과가 존재하기도 했고 귀족들은 자제들을 출가를 시키려고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중의 사회적 위치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것의 폐해로 절이 부를 축적하고 나중에는 부패하면서 백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초기의 역사를 다루는 만큼 광종, 성종과 현종, 문종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4대 임금인 광종은 기존의 공신들의 힘을 낮추고 왕자들을 통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다지는 일에 힘을 썼다. 과거제 실시와 노비안검법 제정 공포는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노비안검법으로 노비의 신분을 풀어주자 귀족들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광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광종의 조치를 두고 정인지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에 노비가 있어 풍교(風敎)의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내외를 엄히 하고 귀천을 매겨 예의가 행해지는 것이 여기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노비가 없으면 양반이나 사대부가 체면을 차리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유학자 출신인 최승로는 광종의 노비정책을 비난하면서 광종의 다음 임금인 성종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성상께서는 깊이 지난 일을 거울삼아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능멸하지 못하게 하고, 노비와 주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잡아 처리하게 하소서. 대체로 벼슬이높은 자는 이치를 알아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경우가 적으며, 벼슬이 낮은 자일지라도 진실로 자기의 비위를 꾸밀 만한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속임수로 양민을 천민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궁원(院)과 공경들이 더러 위세를 빌려 비법을 저지르는 자가 있긴 하지만... 지난날 판결한 것을 다시 캐고 따져 세상을 어지럽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승로는 노비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우니 지난 일은 접어두고 노비 관계의 송사를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였다. - P103

성종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노비환천법을 공포하는데 이는 "무릇 도망해온 남의 노비를 숨겨 멋대로 차지한 자는 날을 따져 베 30자를 본주인에게 주고, 날수가 비록 많더라도 원래 값을 넘게 하지 말라"는 전교를 내려 노비주를 보호하였다.


광종이 힘들게 쌓아 올린 노비안검법을 후퇴시키는 조치라니 아쉽게 느껴진다. 게다가 성종은 "여종이 낳은 아이는 아비가 양반이더라도 종으로 삼는다"는 천자수모법을 시행하도록 하여 노비수가 증가하게 된다. 


강조의 정변이 빌미가 되어 거란이 2차 침입을 했을 때 강조는 스스로 도통사가 되어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에서 싸웠으나 결과적으로는 패배한다. 삼수채에서 선발대가 요군을 상대로 고려군이 승리를 할 때 더 조심하고 경계했어야 하는데 그는 자만하고 나태한 모습을 보인다. 

강조가 통주에서 삼수채를 설치하고 있을 때 요군의 선발대와 다시 맞부딪쳤다. 고려군은 칼을 꽂은 수레를 배치하여 요군을 공격하였다. 요군은 패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강조는 지장의 자질이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적을 물리친 뒤 적을 깔보며 진중에서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반격을 시도한 요군이 삼수채를 격파하고 밀려들어왔다. 이 보고를 받은 강조는 태연하게 큰소리쳤다.


입 안의 음식은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다. 많이 들어오게 내버려두어라.

요군이 물밀듯이 진중으로 쳐들어왔다. 그때서야 강조는 황급하게 일어나 싸울 채비를 차렸으나 어느새 들이닥친 요군이 강조를 꽁꽁 묶어버렸다. 강조의 몸은 북방에서 나는 털담요에 둘둘 말렸다. 함께 있던 고려의 장수들도 다 잡혔다. - P177

대체 왜? 현종까지 옹립해가며 정변을 일으켜서 거란과의 전쟁이 벌어졌다면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물론 나중에 거란에 포로로 잡혀서 거란의 황제 앞에서는 끝내 고려의 장수로 절개를 지키지만 진작 좀 잘했으면 좋았을것을 하는 안타까움이 인다.


거란의 3차 침입에 대항한 리더는 강감찬이었다. 그런데 강감찬이 아니라 책에 강한찬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어 잘못 보았나했다. 

강한찬
한은 중국조(趙)나라 서울인 한단에서 처음생겨난 글자이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질없음을 나타내는 ‘한단지몽‘ (邯鄲之夢)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 이를 ‘감‘으로 발음할 근거가 전혀 없다. 따라서 강감찬은 강한찬으로 고쳐불러야 한다. 이 책에서는 강한찬으로 통일하였다. - P169

강감찬이 익숙해서 영 입에 안 붙는 이름이다. 관련하여 기록을 좀 더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문종의 집권 시기 중국은 송나라가 들어서 있었다. 송은 신종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고려에 수교를 제의하자 문종이 화답하며 두 나라의 왕래가 시작되었다. 

송은 문종의 병이 깊어지자 여러 차례 명의를 보내주면서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문종은 "고려는 소중화입니다" 하며 엎드리는 자세로 송을 흠모하였다. 

문종은 어느 날 송의 수도 개봉을 돌아보는 꿈을 꾸고 시를지었다.

악업의 인연으로 거란과 가까워 1년의 조공만도 몇 번인지 모른다네.
이 몸 홀연히 개봉에 이르니한밤에 흐르는 눈물 애석하도다.
(명나라 사람이 지은 『요산당기』에 나옴)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소중화'를 표방하고 중국을 '동방 예의의 나라'로 칭송한 것은 자주국의 수장으로서 지나치게 허리를 굽힌 것이 아닌가하여 찜찜함이 남는다. 


이 책은 정사 이외에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독자에게 말을 하듯 전달하는 이야기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가 사건과 상황을 상상하여 이성과 감성에 기반한 판단을 요청한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답을 하며 책을 읽어나간다면 더욱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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