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피 ㅣ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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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네 일상과 가장 근접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여류 작가를 특히 선호하는 것은 여자로써의 삶에 대해 좀 더 깊게 파고든 그들의 소설과 공감할 수 있어서다.  지극히 권태롭고 불순해 보이는 제목과 표지를 누구라도 이 소설을 지나칠 수 없게 한다. 작가의 등단작 <열 세살>과 <엄마들>을 읽었을 때 그 기대감을 기억하기에 주목받는 신예라는 문구가 내게는 당연한 것이다.

 엄마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아빠의 존재를 모르며 태어남과 동시에 나쁜 피라고 낙인찍힌 여자, 화숙이 있다. 두 모녀를 당연히돌바줘야 할 가족인 할머니와 외삼촌 조차 냉대와 폭력을 일삼았다. 그런 엄마에게 화숙도 연민보다는 증오와 분노가 있었다. 천변에서 고물상을 하던 외삼촌의 폭력에 쓰러진 엄마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모른 척 외면했다. 모든 게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들로 화숙이 비툴어진 심성을 갖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화를 동갑내기 사촌 수연에게 뒤집어 씌워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거짓말로 수연을 난처하게 했고, 외숙모의 외도를 외삼촌에게 고했다. 

 수연은 언제나 화숙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연약했고, 여대생이 되었고, 결혼을 했다. 심지어 사랑했던 옛 남자 재현과 다시 살림을 차린다. 화숙은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삶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늙은 할머니를 부양했고, 삼촌에 대한 분노도 여전했다.  화숙에게 남은 것은 악의뿐이었다.

 못생기고 살집 많던 여고생은 뚱뚱하고 키 작은 노처녀가 되었다. 손톱은 언제나 뭉뚝했고, 찬 바람이 불면 손등이 트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면 붉게 변해 피가 났다. 발뒤굼치도 언제나 허옇게 들뜨고 굳은 살점이 갈라졌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부자가 되지 못했다. p 53

 어린 혜주를 살뜰하게 돌보는 옆집 여자 진순을 이해할 수 없다. 딸까지 버려가며 사랑을 선택했지만 수연의 마지막은 자살이었다. 재현을 찾으러 간 외삼촌은 실종되고 결국 시신으로 돌아왔다. 화숙에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남은 이는 없다. 지겹도록 끔찍했던 외삼촌의 고물상이 새로운 일터가 되었고, 엄마도 외삼촌도 그 누구도 아닌 혜주와 진순만이 화숙을 기다렸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천변과 고물상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더럽고 피하고 싶은 곳이지만, 삶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버려진 것들로 이뤄진 고물상이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삶의 근원지가 된다. 그 안의 사람들, 화숙을 비롯해 모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우울증으로 아이마저 외면하고 도망쳐야 했던 진순, 장애인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 할머니가 술꾼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이기,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반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아니었다면 쉽게 천변을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혜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 화숙의 진심은 아니었을까. 하여,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가족을 만들고 지키고 싶은 욕망이 살아났는지도 모른다.

 “다녀오셨어요.”
안채로 들어서자 혜주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색연필을 쥐고 있던 혜주가 다시 바닥에 엎드려 발을 까닥거리며 그림을 그렸다. 여자 셋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구석에는 세모 지붕의 집 한 채, 하늘에는 노란 해가 떠 있었다. p 178

 혜주가 그린 그림 속 여자들은 더이상 나쁜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닌, 새롭게 태어난 가족이다. 혜주가 화숙과 수연처럼 성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화숙과 진순은 혜주에게 자신의 분노와 피해의식을 표출하지 않을 것이며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희생도 강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한 소설이나 외면할 수 없는 소설이다. 내가 만든 인물들이 당신을 대신해 앓았으면 좋겠다, 라는 작가의 바람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그들이 몹시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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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9 0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0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 기념시선집 ㅣ 창비시선 300
박형준 외 엮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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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 문학의 점유률이 높아지고 있는 출판계에 대해 누군가는 한국문학이 위기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 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창비 시선 300번 기념시선’을 마주하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시집은 몇 몇 유명 시인의 시나 방송에 언급된 경우를 제외하곤 시를 읽는 이는 소설에 비해 많지 않다. 시에 대해 어렵다는 편견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 가진 함축적 의미에 대해서만 학습한 결과이다. 학창시절 밑줄 그으며 교과서적 일관된 해설에 의해서가 아닌 읽는 이의 느낌대로 해석하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그때 알지 못했다. 물론 문학을 전공하는 자에게는 다른 일지지만, 일반적으로 시를 읽는 이들에게 시는 시일뿐, 그 이상의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시를 읽는 즐거움으로 시는 그 의미를 다하는 것 아닐까.

특별히 창비 시선 300번 기념시선은 201번부터 299번의 시인들이 자신의 시집에서 사람이라는 주제로 하나의 시를 선택하여 엮었다. 시인이 고른 시, 시인의 각별한 애정이 담긴 시가 아닐까 싶다. 몇 몇 시가 나를 사로 잡는다.

우리집에 놀러 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나 왔어./문을 열고 들어서면/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이봐. 어서 나와./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조등(弔燈)하나/꽃이 질 듯 꽃이 질 듯/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나희덕-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전문

나희덕의 시는 우리가 얼마나 무심한 사람들인지 생각하게 한다. ‘전화할께, 언제 한 번 보자, 밥 먹자’ 라는 빈말로 우리는 무심함을 대신하며 살고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의 부재로 인한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시가 슬프다.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소리처럼/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音程)//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다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밤비뿐이랴/젊음도 사랑도 기회도/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죄다. <유안진- 비 가는 소리> 전문

유안진의 시는 비가 오는 밤 소리내어 읽어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한 구절(저녁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 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을 중얼거린다. 친구가 그리워지는 밤, 때마침 비라도 내린다면 학창시절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 들게 분명하다. 소원해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 시를 들려주고 싶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천양희- <물에게 길을 묻다 3>의 일부

바쁘다는 핑계로 밥먹고 살기 버거워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삶, 하여 사람같이 살고 싶다고 시는 아우성친다. 예술을 위한 시가 아닌 사람들을 노래하는 시라면 시는 어렵지 않은, 우리네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존재할 것이다.  문득 좋아하는 정현종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도 꺼내본다.

사람이/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앉아있거나/차를 마시거나/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내가 그리는 풍경인지/그건 잘 모르겠지만//사람이 풍경일 때처럼/행복한 때는 없다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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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 - 원재훈 시인이 만난 우리시대 작가 21인의 행복론
원재훈 지음 / 예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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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만으로도 한국 문학의 상징이 되는 작가들. 그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설렘을 준다. 박범신이 만난 젊은 작가들에 비해 원재훈이 만난 작가들은 가장 적은 나이가 마흔인 중년을 훨씬 넘어선 작가들이다.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확고한 신념이 있는 작가들이라고 하면 맞을까 싶다. 21명의 작가중 정현종 시인을 시작으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아서 다소 흥분된 책읽기를 시작하였고 끝까지 그 기분은 계속되었다. 책은 1~2년 전 원재훈이 직접 작가들 을 인터뷰한 글들을 엮어 놓았다. 인터뷰한 장소는 주로 서울이나 일산이 많았고 도종환과 김용택은 작가의 집으로 저자가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한 잔의 차나 술 잔을 마주하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면서 문학과 사랑, 삶,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유명인이나 다름없기에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진 사실도 많았지만 김연수와 시인 문태준이 고교 동창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언제나 책을 처음 만났던 그 때의 나와 작가를 기억하고 있었던 때문인지 은희경이 쉰을 넘겼고 정호승 시인이 예순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작가들에게는 언제가 책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법.  많은 책들 이 언급되었고, 정현종이 언급한 ‘카프카와의 대화’를 꼭 만나봐야 겠다 생각했고, 정호승의 만나지 못한 책을 주문 하기도 했다. 

 세련된 외모의 은희경이 어린 시절 왕따를 당하고 아버지의 사업이 안 좋아서 야반도주의 경험을  ‘비밀과 거짓말’로 썼다니 그 소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전 소설가로 사는게 좋아요. 이것만 잘하면 되니까 말이죠. 그런데 최근에는 산문을 쓰기로 했어요. 이제 좀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법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이제는 여러 가지 상황이 바뀐 것 같아요. 전 이제 문학소녀가 아니라, 일로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여러 장르의 글을 소화해내는 것도 능력이죠. ” p 86  이제 그녀의 산문을 읽을 준비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은 윤대녕의 말을 썼다. 그는 어린 시절 조부모 밑에서 자랐고 조부를 문학의 아버지라 할 정도다. 그리고 그 시간을 이렇게 말했다. “오직 글 쓰고 책 읽는 동안만 행복했어요. ”그는 자신의 소설을 오늘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확실한 미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삶을 이야기하지요. 그것이 바로 오늘 입니다. 나는 이 오늘을 씁니다. ” p 113 그가 쓰는 오늘은 작가이며 독자이기도 한 것이다. 아, 윤대녕의 단편‘못구멍’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딸과 함께 다녀온 인도 여행을 풀어 놓는 전경린의 글 속에서는 왠지 평온함이 느껴진다. ‘엄마의 집’ 이후로 그녀의 글에서는 불안보다는 안정감과 따뜻함이 나타나지 않을까. “글쓰기의 한가운데에서 글쓰기의 행복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는다면 내가 뭘 선택할 수 있을까 라는 반문을 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어떤 일을 해서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지요. 그래서 쓰고 또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p 426  혼자서 써야 하는 외로움과 고단함의 시간이 얼마나 많았으며 그 안에서 자신이 쓴 글에 만족한 시간은 또 얼마나 될까. 

 아직 소설이나 시로 만나지 못한 작가도 있다. 윤후명의 작품은 몇 번 만났지만 읽다가 손을 놓았던 기억이 있고, 김선우의 산문집도 그러하다. 김선우가 쓰는 동안 쓰고 싶은 소설이 세 권이나 몸으로 들어왔다는 ‘나는 춤이다’가 궁금해진다.  읽는 동안 행복했던 이유는 원재훈의 글에도 있다 . 시인이라 그런지 무척 감각적이고 섬세했으며 같은 공간을 묘사한 부분도 작가마다 그 느낌에 따라 달랐고 독자가 작가들 더 사랑하도록 공들여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인터뷰 하는 내내 작가들도 무척 행복했을 것 같다. 친구이자 선후배를 만나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열심히 자신이 쓴 작품과 삶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그 자체로도 소중하므로. 내게도 자주 자주 열어보고 싶은 또 하나의 소중한 책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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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비파 레몬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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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와 남자가 꿈꾸는 연애는 다르다. 하여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만나는 연애에 때로 빠져들게 된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실현되기 어려운 사랑이나  한 번쯤 저지르고 싶은 일탈의 행위가 아름답게 미화되기 때문인데 일본 소설에서 특히 자주 만나 볼 수 있다. 에쿠니 가오리는 지극히 여성적인 글을 쓰지만 절대 보편적이지 않다. 그래서 고정적인 여성 팬들이 많다.  그녀의 감각적인 글을 만날 때마다 그녀의 연애와 결혼이 궁금하기도 하다.

 <장미 비파 레몬>도 역시 연애 소설이다. 9명의 여자들(도우코, 소우코, 미치코, 에미코, 레이코, 에리, 사쿠라코, 마리에, 아야)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다. 꽃집을 운영하는 에미코, 전업주부인 도우코, 일을 하는 레미코는 종종 점심을  함께 즐기는 친구다. 겉보기에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속사정은 모두 다르다. 꽃집 동업자를 남편으로 둔 에미코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자신과 맞지 않음을 알고 이혼을  결심하고 실행한다. 외출용 옷까지 자신의 취향으로 입어야 하는 남편을 둔 도미코는 안정적인 생활에 만족하는 듯 하다. 남편의 일과 사적인 부분에 대해 암묵적인 선을 두고 사는 레미코는 홈 파티를 통해 스스로  불안을 잠재운다.

 소우코는 언니(도우코)의 결혼 생활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지고 선을 본 남자와 결혼한 언니.  언니의 옛 애인을 좋아한다.  유부남이지만 그의 아내 마치코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소우코는 이런 자신의 감정을 사랑에 연연하지 않는 선배 마리에에게 조언받기도 한다. 연애를 하거나, 연애가 두렵거나, 결혼을 했거나, 결혼을 끝내고 싶은 여자들이다.

 이제 그녀들의 남자들을 볼까? 아니, 남자들의 여자를 만나는 게 맞다. 레이코의 남편은 바람둥이다. 그가 만나는 여자,  모델인 에리는 편모 가정에서 자랐고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원한다. 함께가 아니더라도 아이만은 낳고 싶어한다. 다른 여자 사쿠라코는 레미코의 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려 하지만 우유부단하다. 당당한 사쿠라코는 레이코에서 남편과의 관계를 말하고 레미코는 이혼을 한다.

 9명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해야 겠지만 도우코가 중심에 있다. 애완견 검둥이를 산책시키면서 우연하게 만난 남자를 치과에서도 만난다. 그를 만날 때마다 남편과는 다른 느낌으로 설렌다. 사랑의 표현에 격정적이고 뜨거움을 즐기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우코와 사랑을 나누는 남자의 아내, 아야는 평범한 여자다. 둘째 아이로 딸을 낳기를 바라며 에미코의 꽃집에서 종종 꽃을 사고 오며 가며 개와 함께 있는 도우코를 본다.

 이들의 관계를 그려보면 친구이거나 이웃이다. 레이코의 파티에서 친구의 친구로, 이웃의 이웃으로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한 사이. 그 안에 은밀한 연애가 있고 차갑게 식어가는 애정이 있다. 소설은 이렇다 할 결말이 없다. 도우코의 설렘을 멈추라고 강력하게 말리는 이도 없다. 스스로가 정리할 시간을 알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슬픔과 상처도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담담하고 솔직하고 다양한 그녀들의 연애방식 인 것이다.  사랑에 대해 이별에 대해 미리 걱정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흐르는 물처럼 지나갈 것을 알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 한다. 그래서 읽는 이도 읽는 동안 가볍게 그들의 사랑을 상상하면 그뿐이다.  때로 과한 것보다 부족한 것이 더 나으므로.


* 좋아하는 지인에게 연말에 선물받은 책인데, 계절이 두 번 바뀌어 버렸다. 나의 게으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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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6-11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책제목에서 상큼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에쿠니 가오리군요.

자목련 2009-06-12 10:2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고맙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책의 제목은 언제나 묘한 끌림이 있는 것 같아요.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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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5월을 훗날 역사는 어떻게 말하까? 우리가 1980년의 5월의 진실을 알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절규와 노력이 있었는지 잘 안다. 서울 광장 앞을 가로막은 경찰과 시민들의 모습은  비약이 심할지 모르지만, 그 시절의 울부짓던 청춘을 떠올렸다.  그래서 일까, 역사의 현장 1980년 5월 광주를 몸소 격은 청춘들의 이야기인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주인공 마해금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삼삼오오 친구들과 모여 수다를 떨고 빵집에서 미팅을 하던 소녀. 수선화라는 모임으로 만난 9명(해금, 정신, 승희, 태용, 승규, 만영, 진만. 경애, 수경)의 친구들을 만나는게 마냥 즐거웠던 여고생. 광주에 살지 않았다면, 그 현장에서 친구를 잃지 않았다면 해금의 인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9명의 친구 중 경애와 수경을 잃고 나머지 7명은 어떤 스무 살을 맞이할까? 대학을 가기도 했고, 재수를 하기도 하며 해금이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기도 한다. 기다리던 딸 대신 찾아온 해금이 품에 안겨우니 승희 엄마는 말한다.

  “악아, 우지마라. 사는 것은 죄가 아닌게로 우지를 마라.”p 65

 엄마를 잃고 엄마가 되버린 스무 살의 승희는 버스 회사에 취직을 하며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승희의 아들 승춘을 제 자식처럼 아끼는 만영은 승희와 함께하는 꿈을 꾼다.  대학 진학을 했지만 노동 현장에 들어간 정신, 그런 정신을 바라보는 승규 역시 운동권 학생이다. 해금은 우연하게 만난 환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환은 삶을 포기하려 하고 해금은 힘들기만 하다.  사는 게 죄가 아님을 알게 되는 때는 언제이며 과연 이 청춘들에게도 오기는 할까.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 들어간 해금은 새로운 세상을 본다.  정신과 승규가 하고 있는 운동, 환의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진혁이 수배로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문을 당하고 군대에 들어간 승규가 싸늘한 죽음으로 돌아오고 이제 6개의 수선화만 남았다. 그들은 각기 다른 수선화가 될 것이다. 조금 늦게 꽃을 피우는 수선화가 되기도 하고  꺽이기도 할 것이며 예쁜 정원에 피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 공선옥은 단편 <라일락 피면>을 통해 광주 항쟁을 쓰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라일락 피면>에서 하지 못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질펀한 사투리와 80년대를 사로잡았던 음악 다방, 화려했던 의상들을 추억하게 한다. 꼭꼭 담아 두었던 청춘이 부활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공선옥은 슬픔을 빚어 희망을 만들어 낸다. 승희에게 승춘이라는 희망이, 만영에게는 그런 승희가 희망이 된다. 환이 때문에 빛났던 시절, 해금은 기억하고 가슴에 새긴다.  이제 청춘은 알게 된다.
 
 “빛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는 거, 아름다움은 슬픔에서 나온다는 거, 모든 행복은 고통 뒤에 온다는 거. 진짜 빛이 있고 진짜 아름다움이 있고 진짜 행복이 있다면 말야.”p 199 

 스무 살, 청춘의 시작점을 기억하는가? 세상을 향해 날갯짓을 연습하고 있었을 눈부신 청춘들의 이야기. 시대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고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30년 가까이 시대를 뛰어넘은 우리네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것은 어떤 모양으로든 청춘은 아름다우며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해금이 가장 예뻤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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