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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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네 일상과 가장 근접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여류 작가를 특히 선호하는 것은 여자로써의 삶에 대해 좀 더 깊게 파고든 그들의 소설과 공감할 수 있어서다.  지극히 권태롭고 불순해 보이는 제목과 표지를 누구라도 이 소설을 지나칠 수 없게 한다. 작가의 등단작 <열 세살>과 <엄마들>을 읽었을 때 그 기대감을 기억하기에 주목받는 신예라는 문구가 내게는 당연한 것이다.

 엄마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아빠의 존재를 모르며 태어남과 동시에 나쁜 피라고 낙인찍힌 여자, 화숙이 있다. 두 모녀를 당연히돌바줘야 할 가족인 할머니와 외삼촌 조차 냉대와 폭력을 일삼았다. 그런 엄마에게 화숙도 연민보다는 증오와 분노가 있었다. 천변에서 고물상을 하던 외삼촌의 폭력에 쓰러진 엄마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모른 척 외면했다. 모든 게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들로 화숙이 비툴어진 심성을 갖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화를 동갑내기 사촌 수연에게 뒤집어 씌워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거짓말로 수연을 난처하게 했고, 외숙모의 외도를 외삼촌에게 고했다. 

 수연은 언제나 화숙는 다른 삶을 살았다. 연약했고, 여대생이 되었고, 결혼을 했다. 심지어 사랑했던 옛 남자 재현과 다시 살림을 차린다. 화숙은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삶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늙은 할머니를 부양했고, 삼촌에 대한 분노도 여전했다.  화숙에게 남은 것은 악의뿐이었다.

 못생기고 살집 많던 여고생은 뚱뚱하고 키 작은 노처녀가 되었다. 손톱은 언제나 뭉뚝했고, 찬 바람이 불면 손등이 트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면 붉게 변해 피가 났다. 발뒤굼치도 언제나 허옇게 들뜨고 굳은 살점이 갈라졌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부자가 되지 못했다. p 53

 어린 혜주를 살뜰하게 돌보는 옆집 여자 진순을 이해할 수 없다. 딸까지 버려가며 사랑을 선택했지만 수연의 마지막은 자살이었다. 재현을 찾으러 간 외삼촌은 실종되고 결국 시신으로 돌아왔다. 화숙에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남은 이는 없다. 지겹도록 끔찍했던 외삼촌의 고물상이 새로운 일터가 되었고, 엄마도 외삼촌도 그 누구도 아닌 혜주와 진순만이 화숙을 기다렸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천변과 고물상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더럽고 피하고 싶은 곳이지만, 삶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버려진 것들로 이뤄진 고물상이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삶의 근원지가 된다. 그 안의 사람들, 화숙을 비롯해 모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우울증으로 아이마저 외면하고 도망쳐야 했던 진순, 장애인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 할머니가 술꾼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이기,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반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아니었다면 쉽게 천변을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혜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 화숙의 진심은 아니었을까. 하여,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가족을 만들고 지키고 싶은 욕망이 살아났는지도 모른다.

 “다녀오셨어요.”
안채로 들어서자 혜주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색연필을 쥐고 있던 혜주가 다시 바닥에 엎드려 발을 까닥거리며 그림을 그렸다. 여자 셋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구석에는 세모 지붕의 집 한 채, 하늘에는 노란 해가 떠 있었다. p 178

 혜주가 그린 그림 속 여자들은 더이상 나쁜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닌, 새롭게 태어난 가족이다. 혜주가 화숙과 수연처럼 성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화숙과 진순혜주에게 자신의 분노와 피해의식을 표출하지 않을 것이며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희생도 강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한 소설이나 외면할 수 없는 소설이다. 내가 만든 인물들이 당신을 대신해 앓았으면 좋겠다, 라는 작가의 바람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그들이 몹시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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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9 03: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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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0 1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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