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 ㅣ 위픽
이서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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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때문에 막연하게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 기대했는데(그렇기도 하다) 아니었다. 꽤나 복잡한 생각을 생각을 건네는 소설이었다. 이서수가 건네는 여성 연대와 다양성. 그리고 이서수 식 유머랄까. 사랑은 무엇일까, 저마다의 사랑은 다른 것, 함부로 사랑을 정의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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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건 가만히 나를 관찰하는 일이다. 때로는 보이는 대로 외부를 기록하다 점점 그것은 내부로 파고든다. 결국 글쓰기는 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나 해야만 했던 말들에 대한 다른 방식의 대화다. 말로는 차마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용기거나 뒤늦은 후회, 다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처음부터 쉽지는 않다. 누구에게 보일 목적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만이 읽고 쓰는 글이라 해도 조금은 주저하거나 조금은 글 뒤로 숨고 만다. 그러나 결국엔 감정이 담긴 글을 쓰고야 만다. 그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기쁨이고 글을 쓰는 위안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주의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를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특성상 말을 크게 해야 하고 큰 목소리로 정확하게 아이에게 말을 건네야 할 치료사(언어, 놀이, 상담 등)를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다른 글이었다. 어쩌면 외부인인 내가 알지 못하는 내부인의 진짜 이야기가 그러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특수한 상황에 놓인(보편적인 이용자) 이들과 반복적인 내용을 전달하거나 학습시키는 일, 그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외부로 드러나는 장면이나 드라마나 영화처럼 포장된 이미지가 실재는 아니라는 정도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치료사라는 직업과 일을 떠나 치료사란 개인에게 맡겨진 막중한 책임을 처음 느끼고 생각했다.복지관이나 사설 센터에서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불리지만 4대 보험이나 정직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 작은 공간에 아이들 치료를 위한 놀잇감이나 도구를 사비로 구입하고 대소변 실수를 하는 아이를 감당하는 일까지 하루하루 나아지기를 바라는 부모(조력자, 모든 보호자)에게 상태를 전달하고 앞으로 방향까지 계획해야 한다. 감사를 위한 서류 업무는 물론이고 센터의 청소까지.


아이를 관찰하고 의연하게 바라봤던 그 수많은 의식과 기록들을 굽이굽이 기억에서 끌어올리는 것을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일은 그래서 가늘고 길다. (본문 중에서)


업무나 행정에서 한계를 느껴도 그것에 대한 개선이나 요구사항을 정확히 전달할 창구가 없다는 걸 낄 때 그 마음은 어떨까. 동료이면서 각자의 치료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서로의 시간에 들고나는 것 정도만 인식하는 일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누군가는 그저 직업이라고 직장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직을 할 때마다 치료사가 아닌 많은 아이를 받아 수입을 더 늘이는 게 목적인 원장 앞에서 수긍의 미소를 건네는 일은 아프고 힘겹다.


그러나 아이들을 만나고 개개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시작으로 발화하거나 의미를 알지 못하더라도 대화를 이어가는 일은 치료사에게 가장 소중하고 숭고하다. 때로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수업이 흐르고 반복적이 놀이에 지치더라도 아이가 놀이실에 왔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 불편한 신체를 도와주기 위한 보장구에 대해 목발이나 휠체어 같은 게 전부인 줄 알았지만 더 세부적인 도움을 위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책으로 알게 되었다.


치료사의 일상에 대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이에게 이 책은 선배이자 동료가 건네는 손길이 될 것이다. 한눈에 바로 뛰어나게 발화하거나 움직임이 좋아지거나 놀이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치료사와의 시간에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로 인해 그들은 충만해질 것이다. 치료사도 아이도. 물론 이 모든 게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고단한 현실은 끝이 보이지 않고 어려움은 산적해 있는 게 삶이니까. 그래도 우리는 제목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 반짝인다. 그것을 들어주고 공감해 줄 이가 있다는 사실에 더욱 그러하다. 이 책도 담긴 마음도 그렇다.


아이들이 남기고 간 장난감은 언제나 내게 어떤 이야기였다. 단순히 질문을 하기 위한 핑계가 아닌, 상상하고 느끼는 그대로의 이야기 말이다. 아이들과 노는 동안, 나는 되도록 어려운 질문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대로 두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바라보는 일을 오래오래 하고 싶다. 장난감이 가득한 곳에서 부끄럽거나, 슬프거나,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 없이 놀 수 있다면 초대한 내가 더없이 기쁘겠다. (본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를 읽으면서 여러 저자가 자신의 계절에 대해 쓴 『계절 쓰기』와 백수린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를 만났을 때처럼 좋았다.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톤, 쓰고 읽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쓰고 나를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길고 길었던, 끝날까 싶었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열린 지금, 가을에 대한 부분은 처음과 다르게 가을에만 존재할 것 같은 감각으로 읽힌다. 이 가을은 눈 깜짝할 것 없이 지나할 것이고 우리는 또 겨울에 취해 가을을 잊게 될지도 모른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는 걸 느끼는 순간은 아침에 집에서 나와 숨을 들이마셨을 때 찬 기운이 가슴 속으로 훅 들어와 명치를 아리게 할 때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고 어떤 감정이 나를 한바탕 뒤흔들고 지나가려는 조짐이라고 생각했다. (「홍한별의 가을 : 오래된 이야기」 중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겠지만 슬픔이 너무 커서 세상에 대해 원망만 가득했던 마음이 찬란한 가을 햇살 속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풍경들에 황홀함으로 물드는 걸 느낄 때마다 나는 아름다움은 어쩌면 삶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중에서)


순간을 채집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방법으로 기록은 훌륭하다. 정작 쓰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나중에 가만히 읽어 보면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느끼고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말들은 여전히 깊은 곳에서 쌓이고 어떤 말들은 목까지 달려 나오다 멈추고 만다. 그런 말들이 글이 되어 나왔을 때 우리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그 말에 위로받고 회복된다. 그래서 글을 쓰고 글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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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나무
윤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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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 건넨 말로, 틀어놓은 TV의 뉴스 한 꼭지로, 얼결에 클릭한 기사나 광고로 그런 것들을 알게 된다. 몰라도 될 것들이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라며 이런 것도 모르냐며 나를 향해 돌진한다. 차단하고 거부해도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것들.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그렇다. 무언가를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AI가 답하는 시스템. 나는 이런 빠른 속도가 달갑지 않은 사람이다. 윤고은의 소설 『테니스나무』를 읽으면서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하나의 일이 순식간에 모두가 알게 되는 세상이라서 씁쓸하고 서글퍼졌다. 어쩌면 이 소설이 사랑 이야기라서, 소설 속 두 사람의 사랑이 그들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안타까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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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생존배낭을 만드는 일을 하는 ‘미아’와 지하철 K선 역사에서 일하는 역무원 ‘태오’는 업무적으로 만나면서 연인이 된다. 지하철 역사를 달리는 하프코스 러닝 대회의 기념품이 미아 회사의 생존배낭이었고 그 일로 태오를 처음 만났다. 모든 게 AI로 통하는 세상에 지하철 역사에 인간 역무원이 거의 없었기에 태오는 K의 얼굴로 통했다. 미아가 지하철에서 양말을 잃어버렸을 때 유실물 담당자가 태오였고 그래서 둘은 구면이었다. 러닝 대회가 다가올수록 둘은 자주 만났고 그렇게 가까워진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면서 둘 사이의 풍경은 그들만의 언어와 의미로 새겨진다. 산책하면서 지나는 테니스코트의 풍경이 그러했다. 이용자가 없는 테니스코트의 밤, 바닥에 떨어진 라임색 테니스 공들은 가로수 불빛을 받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태오와 미아에게 그것은 싱그러운 열매처럼 느껴졌고 테니스코트의 옆 나무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테니스코트 옆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테니스나무로 지정했다. 공들은 나무줄기에 매달렸던 기억이 없겠지만, 그 밤의 나무는 분명히 테니스 공의 출처처럼 보였다. 아침이 되면 공은 다시 코트 안을 오가다가 밤이 오면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조금 더 라임빛으로 물들 테고.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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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순간인가. 아무도 모르는 둘만이 아는 공간, 둘만이 느낄 수 있는 공기, 둘만의 감정으로 가득 채워진 시간.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무리 없이 러닝 대회만 끝나면 둘 사이는 더욱 공고해지고 사랑은 커질게 분명했다. 러닝 대회는 무사히 끝났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고 그 중심에 태오가 있었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노숙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사망한 사건으로 대회 기념품 생존배낭을 메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 하루 전에도 누워 있는 노인을 발견한 승객이 민원을 넣은 것이다. 그 전화를 받은 게 태오였다. 태오는 매뉴얼대로 처리했다. 노인이 있었던 곳은 B선을 타고 오다가 K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내린 승강장이었고 정확하게는 B선 관할이라 B선에 연락을 취했고 교대했다. 얼마 후 노인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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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나의 건수를 잡은 듯 사건에 집중했다. 책임을 추궁했고 태오와 미아 사이의 글로 등장했다. 10살이라는 나이 차이, 인턴의 정규직 전환 인사권에 영향을 주는 미아의 위치까지. 말도 안 되는 소문과 악의적인 기사가 쏟아졌다. 미아의 회사에서는 노인이 메고 있던 생존배낭이 문제였다. 미아는 태오를 향한 어쩔 수 없는 마음과 함께 사건이 잠잠해지기를 바라면서 잘못된 정보를 흘린 이들(댓글 작성자, 기자, 유튜버)을 차곡차곡 모았다. 고소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고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그런 말이 들리는 세계란 정말 어마어마한 거구나. 보통 우리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어디를 향해 갈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어떤 신호도 주지 않고 닥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행선지를 확인하고 올라타도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니까.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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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름 붙인 테니스나무와 열매처럼 환하고 밝게 빛날 것만 같은 둘의 사랑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러나 태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미아는 그런 태오를 지켜주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재난을 대비해 생존배낭을 기획하고 준비한 미아였지만 사랑의 재난 앞에서 무력했다. 태오는 AI가 아닌 사람이 있다고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고 안심을 주는 업무를 맡은 역무원의 얼굴이 되었지만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안심하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태오와 미오 사이를 오가던 홍해파리의 존재도 힘이 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외부 환경이 좋지 않다고 느끼면 유년기로 숨어버리는, 필요할 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홍해파리. 시간을 거슬러 서로의 꿈에 초대하며 라임 빛 열매를 함께 볼 수 있는 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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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나무는 꿈의 틈새에 책갈피처럼 놓여 있다. 그 나무 아래 라임빛 열매들과, 태오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향기도 맡을 수 있지만 그곳에 가닿을 수는 없는 사람.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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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말들을 파생시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 사건은 희미해지고 사라지지만 태오와 미오의 일상은 망가지고 부서졌다.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서로가 힘들 때 가장 힘이 되어준 사람이지만 함께 할 앞날을 꿈꿀 수 없었다. 그저 한 시절의 기억으로 아픈 사랑으로 남아야 했다.


AI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는 세상에서 사랑은 더 귀해졌다.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것은 사랑이 아닐까. 어쩌면 윤고은은 재난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생존배낭 목록에 반드시 필요한 건 사랑이라고, 사랑의 기억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테니스 공을 볼 때마다 홍해파리란 말을 들을 때마다 이 소설이 생각날 것이다. 쏟아지는 햇빛처럼 환하고 눈부시게 빛나던 그들의 가슴 아린 사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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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제외하면 이번 추선 연휴는 이틀이라 할 수 있다. 추석 당일에는 날씨도 별로였다. 은근히 덥고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어린 시절처럼 송편을 빚지도 않고 전을 부치지도 않는다. 차례 대신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많이 않은 식구가 모여 식사를 하는 게 전부다. 설에는 농사일이 없어서 다 같이 거실에 앉아 TV 채널을 돌리는 게 일인데 가을 추석에는 일이 한창 바쁜 농사철이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커피나 과일을 먹는 대신 오빠는 약을 치러 나가셨다. 올케언니도 결혼한 조카에게 과일을 깎아 먹으라는 말을 건네고 서둘러 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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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조카는 이번 명절에 다른 때와 다르게 시댁이 아닌 친정에 먼저 왔다. 순서가 바뀐 것이다. 우리 집에서 아침을 먹고 시댁으로 가는 일정이다. 조카 부부와 큼지막한 배를 깎아 먹었다. 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닌 데 올가을 배는 달고 맛이 좋았다. 조카사위의 취향대로 물이 많았던 믹스 커피의 맛은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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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게임이 한창이었지만 TV를 켜지 않았다. 내가 켜지 않으니 아무도 켜지 않았고 나중에는 다른 조카가 TV를 왜 안 보냐고 묻기까지 했다. 나는 그냥 안 보려고라고 말했지만 TV에 시선을 모으지 않으니 오히려 좋았다. 결혼한 조카는 최근에 직업을 바꿨다. 조카의 결단력에 조금 놀랐다. 자영업자가 되는 조카를 마음으로 응원했다. 시댁으로 출발해야 하는 조카 부부는 먼저 떠났고 남동생도 피곤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올케언니는 기다렸다. 올케언니의 말대로 시간은 길지 않았고 1시간 30여 분이 지나니 오빠와 올케언니가 돌아왔다.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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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스크를 꼭 써야 한다고 괜한 잔소리를 했다. 오빠의 오른쪽 다리에는 큰 상처가 있었다. 다 나았다고 했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다 알고 있지만 잔소리를 하는 사이. 도착한 청첩장의 디자인을 보며 잠깐 이야기를 했고 갑자기 이웃집 아주머니의 이름이 궁금해서 올케언니에게 물었더니 알려주셨다. 그분은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 이름을 모른다. 누구 엄마로만 알기에. 그분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흔한 이름인데 무척 특별하게 다가왔다.





명절에는 시간을 쓴다. 평소에는 내어주지 않았던 시간, 바빠서 미루고 미뤘던 시간, 그러나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시간이다. 명절에는 몸을 쓴다. 안 하던 일과 정리로 몸을 써서 명절 후엔 이곳저곳이 아프다. 명절에는 돈을 쓴다. 선물을 준비하고 봉투에 용돈을 넣는다. 선물의 크기와 종류에 상관없이 선물을 고르는 일은 어렵고 용돈도 금액과 상관없이 부족한 마음이다. 명절에는 마음을 쓴다. 연로하신 부모님을(나에게는 이제 오빠 내외) 뵈면 속상하고 나의 조카들에게는 고모로써 도움을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미안해서 마음이 쓰인다.


명절 일상을 기록하려고 했는데 쓰다에 많은 것들이 따라왔다. 명절이 지나고 명절을 쓰니 생각이 많아진다. 어느 해부터 추석에 송편을 먹지 않는다. 아무 때나 먹고 싶으면 사 먹을 수 있기에. 하지만 막상 송편도 없는 추석을 보냈다는 생각을 하니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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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찼던 보름달은 조금씩 살이 빠지고 다음 보름을 위해 준비한다. 단맛이 빠진 청귤 차에 물을 붓는 주말 저녁으로 우리의 명절은 끝났다. 이상하게 제목에 끌려 주문한 이서수의 소설, 윤단과 최미래의 단편을 기다리고 커피와 주문할 책을 둘러보는 아침, 진짜 연휴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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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09-27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안 게임 안 보셨어요? 저는 오전과 저녁 수영경기를 계속 봐서 가족들이 지겹다며 불평을 쏟아냈습니다ㅋㅋㅋㅋㅋㅋ
자목련님 가족들과 함께한 추석 이야기 평온해보여서 참 좋아요

자목련 2026-09-29 11:26   좋아요 0 | URL
ㅎㅎ 수영에 집중하신 망고 님!!!
챙겨서 볼 정도는 아니었고요.어쩌다 보니 일본과 결승을 많이 본 것 같아요^^

bogjory2002 2026-09-2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송편도 전도 나물도 먹기 싫어진..
너무 나도 바뀐 요즘입맛.. 예전 추석때나 맛보던
어머니의 손맛
아련한 추억이 되엇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열심히 만들고 맛잇게 먹는다.


자목련 2026-09-29 11:27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리운 맛이 되었어요^^

2026-09-27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9-29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6-09-28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휴가 너무 짧아서 슬펐지만...
10월 연휴가 또 오므로 참았습니다. ㅋㅋㅋㅋ

자목련 2026-09-29 11:28   좋아요 0 | URL
그쵸, 10월에도 연휴가 있으니~~
 
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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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은 조심스럽다. 이미 맺어온 관계만으로 충분해서 그렇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는 일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참여하고 싶은 모임이나, 알고 지내고 싶은 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들과 더 가까이, 그들과 한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확장되는가. 누군가의 지속적인 노력이나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가능하다. 예소연의 소설집 『너의 나쁜 무리』는 나와 다른 누군가와 쉽게 친해지는 일이 점점 더 불가능한 시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그 이면에 존재하는 연약하게 이어온 관계를 거부하고 과감하게 단절하는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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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에서 만나는 관계는 조금 이상하다.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 신경 쓸 일 없는 사이로 보이는 데 그게 잘 안된다. 그냥 단 한 번의 만남, 일적으로 만난 사이인데 묘하게 끌려 상대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 무슨 말이냐면 구급차를 모는 ‘이중일’이 자신이 호송하던 환자 ‘진정희’와 보호자 ‘서송이’에게 자신의 구급차를 빼앗기는 이야기 「작은 별」가 그렇다. 이중일은 그냥 그들을 호송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환자와 보호자가 구급차에 탄 이후 그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중일은 심경의 변화를 느낀다. 마냥 죽음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환자의 의지, 그리고 자신이 그저 무기력하게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된다. 어쩌면 삶의 끝에 다다른 환자였기에 이중일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의 ‘상태’를 알아봐 준다는 건 가장 큰 위로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누가 봐도 이상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 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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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이한 감정은 노인을 돌보는 시터로 일하는 ‘희지’가 돌보던 두부 할머니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무 사이」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시간만큼 돌봄이 필요한 할머니를 돌보는 일, 의무는 거기까지다. 하지만 희지는 최선을 다했다. 이전에는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며 불안했지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뿌듯함과 자신감이 있었다. 두부를 만병통치약으로 아는 두부 할머니가 희지가 가사 일을 하는 사이 사라진 것이다. 갈 법한 곳은 다 찾아다녔는데 할머니는 없었다. 할머니의 며느리에게는 거짓말까지 한다. 할머니가 주무신다고. 정작 할머니는 며느리와 함께였고 할머니는 희지에게 전화기를 놓고 간 사실을 미안해한다. 며느리는 희지에게 할머니에게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하지만 희지는 그럴 수 없다. 할머니를 사랑하고 돌보는 일이, 그것을 유지하는 일이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삶의 최소한을 지켜내는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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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사이」란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아무 사이가 아니었지만 아무 사이가 아닌 사이가 될 수 있고 아무 사이가 아니라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대할 수 있고 아무 사이가 아니라서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 단편이 좋았던 이유는 희지가 할머니를 찾기 위해 성당, 시장의 두부집을 찾아다니며 ‘이순이’ 할머니라 말하는 것, 할머니의 휴대전화에 ‘희지’라고 저장된 부분이었다. 누군가 이름을 호명하고 기억하는 일은 관계의 시작이며 서로에게 속하는 일이니까. 희지와 두부 할머니 둘 사이의 하루와 관계를 상상할 수 있는 부분. 갑과 을이 아닌, 고용주와 고용인이 아닌 ‘희지’와 ‘이순이’ 둘 사이의 관계는 한결같다.





나는 문득 두부 할머니의 휴대전화에 내 이름이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연락처 목록에 들어가보니 ‘희지’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마치 백지처럼. 유희지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닌 담백한 나의 이름, 희지. 나는 그걸 본 순간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아차렸다. (「아무 사이」, 208~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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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나의 나쁜 무리」를 보자면 가족이라는 혈연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발칙하면서도 유쾌한 유선의 성장소설이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손녀 ‘유선’은 할머니를 여사라 부른다. 둘은 할머니와 손녀가 아닌 마치 친구처럼 지내는데 연애에 자유로운 여사는 유선에게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여사가 살아가는 삶에 스며든 유선에게 그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유선은 성인이 되자마자 여사로부터 도망쳤고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여사처럼 살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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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사와 우리가 되기 위해 애썼던 시절들을떠올리고 있자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되기 위해 서로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했고 그게 잘 되지 않으면 나의 문제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사는 어땠을까? 12세의 나를 더이상 애가 아니라고 여겼던 여사는 내가 성장함으로 점점 더 우리가 되었다고 여기게 되었을까? (「너의 나쁜 무리」, 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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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사와의 관계를 끊어낼 수 없다. 여전히 여사와 한 패가 되어 여사의 과거 남자친구의 현구 아저씨의 굴착기를 찾기 위해 모였다. 유선의 옛 남자친구 이해신과 함께. 과거 현구 아저씨는 굴착기 구매 사기를 당했고 여사는 현구 아저씨에게 돈을 빌려줬다. 연인에서 채무관계가 된 여사와 현구 아저씨처럼 관계는 변하지만 그들이 보낸 시간은 변할 수 없는 걸까. 지긋지긋하면서도 끈끈한 사이, 어찌 보면 가장 완벽하게 아무 사이도 아니자 가장 가까운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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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자신이 ‘뚜비’라 부르던 고모와 친구 ‘근정’의 결혼을 바라보는‘문주’의 이야기 「뜰의 미래」 속 관계는 누가 봐도 인정할 수 없다. 뚜비의 재산을 노리고 근정이 접근한 것 같지만 아니었다. 둘은 진정으로 사랑했고 뚜비는 문주가 혼인서약을 해주길 바란다. 이처럼 어떤 관계는 숱한 의심을 받는다. 둘 사이의 내밀한 관계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좋은 「소란한 속삭임」은 비밀 아닌 비밀을 속삭이는 모임을 만들어 연대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데 새로운 관계와 연결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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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고 영원할 것 같은 관계를 원했던 시절이 있었다. 관계의 매듭이 만들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에 비하면 매듭이 풀리는 건 한순간이다. 관계의 지속은 혼자만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하다. 이처럼 관계 맺는다는 건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를 이행하는 일,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결국 예소연의 『너의 나쁜 무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관계를 갈망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박헤진 평론가의 발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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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9-23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커피잔 하고 책하고 넘나 깔맞춤 아닙니까!! 자목련 님의 책+커피잔 사진 팬입니다!!

자목련 2026-09-27 10:59   좋아요 0 | URL
팬을 위해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