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나무
윤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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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 건넨 말로, 틀어놓은 TV의 뉴스 한 꼭지로, 얼결에 클릭한 기사나 광고로 그런 것들을 알게 된다. 몰라도 될 것들이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라며 이런 것도 모르냐며 나를 향해 돌진한다. 차단하고 거부해도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것들.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그렇다. 무언가를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AI가 답하는 시스템. 나는 이런 빠른 속도가 달갑지 않은 사람이다. 윤고은의 소설 『테니스나무』를 읽으면서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하나의 일이 순식간에 모두가 알게 되는 세상이라서 씁쓸하고 서글퍼졌다. 어쩌면 이 소설이 사랑 이야기라서, 소설 속 두 사람의 사랑이 그들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안타까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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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생존배낭을 만드는 일을 하는 ‘미아’와 지하철 K선 역사에서 일하는 역무원 ‘태오’는 업무적으로 만나면서 연인이 된다. 지하철 역사를 달리는 하프코스 러닝 대회의 기념품이 미아 회사의 생존배낭이었고 그 일로 태오를 처음 만났다. 모든 게 AI로 통하는 세상에 지하철 역사에 인간 역무원이 거의 없었기에 태오는 K의 얼굴로 통했다. 미아가 지하철에서 양말을 잃어버렸을 때 유실물 담당자가 태오였고 그래서 둘은 구면이었다. 러닝 대회가 다가올수록 둘은 자주 만났고 그렇게 가까워진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면서 둘 사이의 풍경은 그들만의 언어와 의미로 새겨진다. 산책하면서 지나는 테니스코트의 풍경이 그러했다. 이용자가 없는 테니스코트의 밤, 바닥에 떨어진 라임색 테니스 공들은 가로수 불빛을 받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태오와 미아에게 그것은 싱그러운 열매처럼 느껴졌고 테니스코트의 옆 나무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테니스코트 옆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테니스나무로 지정했다. 공들은 나무줄기에 매달렸던 기억이 없겠지만, 그 밤의 나무는 분명히 테니스 공의 출처처럼 보였다. 아침이 되면 공은 다시 코트 안을 오가다가 밤이 오면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조금 더 라임빛으로 물들 테고.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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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순간인가. 아무도 모르는 둘만이 아는 공간, 둘만이 느낄 수 있는 공기, 둘만의 감정으로 가득 채워진 시간.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무리 없이 러닝 대회만 끝나면 둘 사이는 더욱 공고해지고 사랑은 커질게 분명했다. 러닝 대회는 무사히 끝났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고 그 중심에 태오가 있었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노숙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사망한 사건으로 대회 기념품 생존배낭을 메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 하루 전에도 누워 있는 노인을 발견한 승객이 민원을 넣은 것이다. 그 전화를 받은 게 태오였다. 태오는 매뉴얼대로 처리했다. 노인이 있었던 곳은 B선을 타고 오다가 K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내린 승강장이었고 정확하게는 B선 관할이라 B선에 연락을 취했고 교대했다. 얼마 후 노인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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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나의 건수를 잡은 듯 사건에 집중했다. 책임을 추궁했고 태오와 미아 사이의 글로 등장했다. 10살이라는 나이 차이, 인턴의 정규직 전환 인사권에 영향을 주는 미아의 위치까지. 말도 안 되는 소문과 악의적인 기사가 쏟아졌다. 미아의 회사에서는 노인이 메고 있던 생존배낭이 문제였다. 미아는 태오를 향한 어쩔 수 없는 마음과 함께 사건이 잠잠해지기를 바라면서 잘못된 정보를 흘린 이들(댓글 작성자, 기자, 유튜버)을 차곡차곡 모았다. 고소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고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그런 말이 들리는 세계란 정말 어마어마한 거구나. 보통 우리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어디를 향해 갈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어떤 신호도 주지 않고 닥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행선지를 확인하고 올라타도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니까.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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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름 붙인 테니스나무와 열매처럼 환하고 밝게 빛날 것만 같은 둘의 사랑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러나 태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미아는 그런 태오를 지켜주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재난을 대비해 생존배낭을 기획하고 준비한 미아였지만 사랑의 재난 앞에서 무력했다. 태오는 AI가 아닌 사람이 있다고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고 안심을 주는 업무를 맡은 역무원의 얼굴이 되었지만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안심하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태오와 미오 사이를 오가던 홍해파리의 존재도 힘이 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외부 환경이 좋지 않다고 느끼면 유년기로 숨어버리는, 필요할 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홍해파리. 시간을 거슬러 서로의 꿈에 초대하며 라임 빛 열매를 함께 볼 수 있는 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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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나무는 꿈의 틈새에 책갈피처럼 놓여 있다. 그 나무 아래 라임빛 열매들과, 태오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향기도 맡을 수 있지만 그곳에 가닿을 수는 없는 사람.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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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말들을 파생시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 사건은 희미해지고 사라지지만 태오와 미오의 일상은 망가지고 부서졌다.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서로가 힘들 때 가장 힘이 되어준 사람이지만 함께 할 앞날을 꿈꿀 수 없었다. 그저 한 시절의 기억으로 아픈 사랑으로 남아야 했다.


AI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는 세상에서 사랑은 더 귀해졌다.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것은 사랑이 아닐까. 어쩌면 윤고은은 재난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생존배낭 목록에 반드시 필요한 건 사랑이라고, 사랑의 기억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테니스 공을 볼 때마다 홍해파리란 말을 들을 때마다 이 소설이 생각날 것이다. 쏟아지는 햇빛처럼 환하고 눈부시게 빛나던 그들의 가슴 아린 사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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