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일기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밀린 일기를 쓰는 일은 고역이었다. 지금처럼 과거의 날씨도 쉽게 알 수 있던 때가 아니라 날씨를 떠올리는 게 제일 힘들었다.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싶은 일기, 착한 일을 하지도 않고 부모님을 도와드리지도 않았는데 착한 아이인 것처럼 거짓을 쓰기도 했다. 하루를 반성하고 가장 인상적인 일을 기록하는 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청소년기의 일기는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자 고민의 기록장이었다. 친구와의 갈등,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감정을 유치하고 화려하게 썼다. 나만 읽어야 했다. 아무도 봐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나만의 일기장은 그런 것이었다. 어른이 된 후에는 일기장을 구매한 기억이 없다. 그 후로 나에게 일기(日記)는 책을 읽은 기록,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토로, 누구나 볼 수 있는 글이 되었다. 제목부터 금기된 무언가를 만날 것 같은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금지된 일기장』을 읽으면서 몇 년 전 붙박이장을 정리하며 발견한 노트 한 권이 떠올랐다. 나는 안도했다. 가족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찾았기에. 모든 페이지의 글은 조각났고 폐기되었다.
소설 속 발레리아는 남편을 위한 담배를 사러 갔다가 담배 가게에서 공책을 충동적으로 구매한다. 금지된 일이라며 가게 주인은 거부했지만 발레리아의 간곡함에 판매한다. 금지된 일이라고? 남편을 위한 담배를 산다고? 놀랄 수 있다. 195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일요일에 담배만 파는 법이 있었다고 하니 『금지된 일기장』이란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일기는 필자와 독자가 같아야 한다. 그래서 소설 속 ‘발레리아’는 자신의 일기장을 숨겨야만 했다. 변호사 남편 미켈레,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 리카르도, 대학에 들어가는 딸 미렐라가 알아서는 안 되는 생애 가장 큰 비밀이었다.
일기장을 어디에 숨길까 고민하는 발레리라의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짠하다. 그렇다. 어디에도 발레리아의 공간은 없다. 8년 전부터 직장에 다니는 워킹맘인 그녀에게 그녀를 위한 시간도 없었다. 사소한 것부터 모두 그녀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러니 일기를 쓸 수 있는 시간은 가족 모두가 잠든 후였다. 매번 일기를 쓰고 일기장을 숨길 때마다 전전긍긍하면서 일기를 써야 할까. 왜 일기를 써야 할까. 그것이 이 소설의 가장 핵심이다. 발레리아에게 일기를 쓰는 시간은 자신을 발견하고 욕망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솔직한 마음을 일기를 쓰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가족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 갈등이 생긴 딸 미렐라, 우유부단하고 미숙한 아들 리카르도,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 남편. 이제껏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때로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 (51~52쪽)

소설 속 발레리아의 나이는 마흔셋이다. 젊고 아름다운 나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그녀는 끼인 세대다. 여전히 꼿꼿하고 우아한 자세로 살아가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와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며 대립하는 딸 미렐라. 자신과는 다른 신념을 지녔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딸을 대하는 발레리아의 모습은 그 시대를 살아온 어머니를 닮았고 나아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딸과 엄마의 관계를 관통한다. 미렐라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원수가 되어간다고 느끼는 감정. 미렐라를 지지하고 응원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만약 나였다면 그게 가능할까. 선뜻 답을 할 수 없다.
그날 저녁 일기장을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숨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일기장을 침대 시트와 수건을 보관하는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 일기장을 숨기면 20년 동안이나 내 딸에게 밥을 해먹이고, 가르치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 아이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신중히 살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애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71쪽)
발레리아는 직장에서 돌아와 살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게 버겁지만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일탈이 필요했고 자유를 원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녀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에서 그녀가 가벼워지기를 나는 간절하게 바랐다. 소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소설이 아닌 일기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후련해지기를 바랐다.
나 자신을 파괴하고 싶었다. 무거운 변장을 하고 다니다 지쳐버린 듯 나라는 껍질을 벗어던지고 분노가 뒤섞인 후련함을 느끼고 싶었다. (199쪽)
이런 글을 쓰는 발레리아의 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발레리아의 손길로 채워지고 만들어진 집이 분명한데 그녀의 것이라고 여길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니. 그 공허함을 알 것 같아서. 나만의 공간을 바라지도 않고 다만 작은 책상을 갖고자 하는 누군가가 떠올라서.
참 이상한 일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인데도, 우리는 마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척 행동해야만 한다 게다가 일기장을 사무실에 가져다 놓으면, 집에는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질 것이다. (331쪽)
아무도 모르는 SNS 비밀 계정, 비상금 계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지트, 깊은 곳에 간직한 마음, 도저히 꺼낼 수 없는 그 무언가, 그 모든 것이 금지된 일기장은 아닐까. 『금지된 일기장』에서 발레리아는 나를 발견하고 알아가는 순간을 꿈꾼다. 그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연결된다.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500파운드’,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돈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책은 남성의 책보다 더욱 짧고 더욱 응집되어야 하며, 지속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장시간의 독서가 필요하지 않게끔 꾸며져야 한다고 나는 과감하게 말할 것입니다. 여성은 언제나 방해를 받을 테니까요. (『디 에센셜: 버지니아 울프』)
『금지된 일기장』, 『자기만의 방』과 함께 도리스 레싱의 단편 「19호실로 가다」가 생각나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어요.” (「19호실로 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