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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지음 / 래빗홀 / 2025년 8월
평점 :
꿈꾼다는 건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뜻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꿈도 꾸지 마, 꿈 깨라고 면박을 준다. 그 꿈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지고 않고 구체적으로 들어보려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나는 꿈을 꾸는 사람일까, 꿈 깨라고 말하는 사람일까. 김초엽의 『양면의 조개껍데기』를 읽다 보면 그런 질문과 마주한다. 꿈을 이해하고 인정하려 노력하는 사람인가.
다른 존재로 변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에게도 있었다. 소설 속 물고기, 펭귄, 곰 같은 피부를 갖고자 실천하는 이들이나 다른 세계로 넘어갈 막을 찾는 이들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육체적인 고통에 기인한 것으로 수술 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신체의 변화로 얻은 활동의 제약, 쪼그라들고 움츠려든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간절함이었다.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감정, 나만이 느끼는 통증은 설명할 수 없고 이해와 공감을 얻기도 어려운 종류니까.
모두 똑같을 수 없지만 주류가 아닌 경계나 변두리의 삶을 살다 보면 주류로 넘어가려 애쓴다. 사람들이 그게 정답인 양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삶이라고. 보편적인 것이 아닌 다른 일상을 반복하거나 지향하면 신기한 듯 호기심을 가질 뿐 파고들지는 않는다. 김초엽은 다르다. 그런 타자를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같은 게 있으면 다른 것도 있는 게 당연하다고. 그러니 그가 그려낸 다양한 세계는 놀랍고 이상한 게 아니라 아름다울 지경이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속 ‘수브다니’는 최첨단 안드로이드였다가 인간화 시술을 후 기계로 돌아가기를 꿈꾼다. 금속 피부 이식을 받으면 녹슬게 분명해 말류 하지만 수브다니는 강행한다. 그것만이 수브다니가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이해할 수 없지만 수브다니의 삶을 인정하며 어려울 게 없다. 타자를 인정하는 일, 정상이라는 세계로 오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인정한다면 혐오와 차별은 사라질 것이다.
타자와의 공존은 어려운 일이 아닌게 된다. 그런데 정상이라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어쩌면 정상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하나의 신체에 두 개의 자아(‘샐리’와 ‘레몬’)를 지닌 셀븐인의 이야기인 표제작 「양면의 조개껍데기」도 다르지 않다. 샐리와 레몬의 독립된 자아는 감정도 다르고 욕망도 다르고 자아가 바뀔 때마다 신체적 특성도 변한다. 하나로 통합될 수 없고 치열하게 갈등하지만 공존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준다. 우주 어딘가의 행성인 샐리는 내가 될 수 있고 주변의 누군가가 될 수 있다. SF 소설은 상상이 아닌 사고 영역의 확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이 김초엽의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거대한 외로움을 직면하는 것이 두려웠었다. 하지만 레몬은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외로운 세계가, 그렇기에 얼마나 자유로운지. (「양면의 조개껍데기」, 106쪽)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주 협소한 우주의 일부라는 걸 알지만 인간의 문명이 아닌 다른 문명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진동새의 진동으로 기록하는 「진동새와 손편지」는 문자 대신 색채로 기록하는 외계 생명체 이야기를 다룬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 단편 「스펙트럼」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문자와 언어를 대신할 수 있으니 눈빛이나 움직임으로 말하는 존재도 가능하다.

「고요와 소란」에 등장하는 사물과 생물의 목소리를 채집하고 전시하는 세계가 이상할 게 없다. 어쩌면 갑자기 사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라 인간의 요란한 소리에 감춰져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하는 말을 잘 듣기를 바란다. 얼핏 사물을 기억하고 추억하려는 아름다운 단편 같지만 김초엽은 온갖 소리로 가득한 지구를 살피고자 하는 우주의 소리 수집가가 지구에 거미줄을 친 거라고 우리를 안내한다.
더 깊고 넓게 확장된 김초엽의 상상과 탐구는 먼 미래 데이터만 남은 세계에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질문하는 「달고 미지근한 슬픔」으로 이어진다. 소설이 아닌 현실 속 AI로 통하는 세계에서 인간 고유성과 살아 있다는 감각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도래할 세계가 그러하다면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살아 있다는 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 이 세계도 이곳의 사람들도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어떤 생물도 존재한 적 없는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달고 미지근한 슬픔」, 292~292쪽)
생태 탐사용 고래 로봇 이야기를 다룬 「소금물 주파수」는 동화 같은 소설이다. 작가의 고향인 울산을 배경으로 바다에서 수많은 고래들을 만나고 육지로 돌아오는 돌고래 ‘해몽’을 만들고 사랑한 할머니 과학자. 소설 속 해몽이가 진짜 존재할 것만 같다.
평행 세계를 다루며 그 안에서 정체성을 찾는 「비구름을 따라서」는 나를 울컥하게 만든 소설이다. 죽은 친구 ‘이연’의 이름으로 온 추도식 초대장. ‘보민’은 누군가의 고약한 장난이라고 여겼지만 신경이 쓰인다. 이연과 보민은 보드게임 모임에서 처음 만났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만들고 설명하는 게임 ‘노바 파우치’를 하며 친해졌고 룸메이트가 되었다. 이연은 자주 직장을 옮겼고 가족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이연의 방은 잡동사니와 쓰레기 같은 물건들이 가득했고 그것이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것이라 말했다. 보민은 이연이 불안했다. 그래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사람은 아니었다.
날짜가 뒤죽박죽인 초대장 중 하나에서 발견한 문구가 아니었다면 초대장에 적힌 주소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문구는 언젠가 이연이 상상했다며 들려준 것이었다. 그곳에서 이연의 초대를 받은 두 명과 이연이 말한 다른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니까 이연은 다른 세계로 건너갔고 그 세계에서 수많은 초대장을 보낸 것이다. 그쪽에서 보낸 걸 이쪽에서 발견하게 될 확률은 아주 적으니 이연은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평행세계에 대한 소설은 익숙하지만 이렇게 애틋한 적이 었었던가. 이연은 자신이 본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들을 초대했다. 막을 건너는 일은 보민과 다른 두 사람의 선택이었다.
알 수 없었다. 막을 건너온 것은 작은 사소한 물건들,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거대한 세계와 사람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상하는 일뿐. (「비구름을 따라서」, 374쪽)
김초엽이 보여준 세계는 낯설고 이상하다. 여기가 아닌 거기에만 존재할 것 같지만 그가 전하는 바는 명확하다. 무엇을 꿈꾸든 그 꿈을 방해하지 말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나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타자가 공존하는 세계를 향한 지속적인 환대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