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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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편의 영화, 책, 음악이 특별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 처음으로 본 영화라는 이유로, 이별을 했거나 슬픔에 잠겼을 때 들었던 음악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그리고 책이 그렇다. 따뜻한 위로를 주는 책을 만났을 때, 오래 오래 곁에 두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이어령 교수의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는 내게 이제 특별한 책으로 남을 것이다.   
 
 이어령 교수의 젊음의 탄생을 읽었을 때, 그 대상에 속하는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해서, 크게 감동을 받지 못했다. 그에 반해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는 어머니라는 존재 때문인지, 읽는 내내 마음이 울렁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글을 시작으로 일상의 기록인 신변잡기라 할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 어쩌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적을 수 있다. 부드럽고 섬세한 글로 이처럼 강한 울림을 줄 수 있다니, 놀라웠다. 진정 좋은 글이구나, 감탄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책, 나들이, 뒤주, 금계랍, 귤, 바다로 은유한 글은 아름다웠고 잔잔한 감동을 준다. 어머니가 읽어주시던 책으로 시작된 문학과의 만남, 함께 외갓집을 다녀오던 풍경, 쌀 위에 글씨를 써놓던 지혜, 자식을 위해 매를 들던 모습,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온 귤에 대한 아련한 추억, 바다처럼 넓고 무한한 어머니의 사랑. 

 나들이는 나가면서 동시에 들어오는 모순을 함께 싸버린 아름다운 말이다. p. 17  그 노란 귤과 거의 함께 어머니는 하얀 상자 속의 유골로 돌아오셨다. 물론 그 귤은 어머니도 나도 누구도 먹을 수 없는 열매였다. 그것은 먹는 열매가 아니었다. 그 둥근 과일은 사랑의 태양이었고 그리움의 달이었다. 그 향기로운 몇 알의 귤은 어머니와 함께 묻혔다. p. 24  바다는 살아 있는 어떤 것보다 생명력에 가득 차 있다. 어떤 짐승이 저렇게 강렬하게 숨쉴 수 있고 소리칠 수 있고 쉴 사이 없이 생동할 수 있겠는가. 어떤 풀 어떤 나무가 저렇게 늘 푸른빛으로 번지고 뻗쳐서 이 지상을 덮을 수 있을 것인가. p. 27

 어느 누가  간절함과 애통함을 이리 맑고 곱게 표현할 수 있을까. 1934년 생으로 올해 77세인 할아버지가 그리워하는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였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에 대한 감사를 한 번도 글로 옮겨지 못한 미련한 나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고향인 온양에 대한 크나큰 애정과 문학을 사막으로 표현한 글도 인상적이다. 그는 문학인 사막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었다. 그러니 사막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자신의 몸속에 수분을 저장한 낙타와 선인장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생이라는 끝없는 길을 걷는 우리에게 그는 먼저 걷고 있는 사람으로 어떻게 걸어여 할지 알려준다. 그가 경험하고 깨달은 방법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측은지심[惻隱之心]과 같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감기를 들어 설명한다.  

 만약, 당신이 감기에 걸려 방 안에 누워 있었던 경험이 있다면 이마를 짚는 그 손, 의미도 이미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손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나 혹은 조그마한 자기 아들의 손일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의 신열을 느낄 수가 없다.  가장 분명한 병까지도 자기의 힘만으로는, 그 인식만으로는 잡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타인들의 손이 나의 이마를 짚어줄 때, 그 촉감을 통해서만, 선뜻한 타인의 체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열을 비로소 확인한다. p. 59 ~ 60 

 병든 굴과 조개에서 병을 막아내기 위해 배출한 분비물이 진주가 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겪는 슬픔을 말한다. 고통 없이 탄생할 수 없는 진주처럼 절망과 슬픔을 이겨내면 희망과 즐거움을 만날 꺼라 우리를 응원한다. 우리들 고뇌의 술잔에도 이 아름다운 진주를 넣어라. 그리고 그 빛을 마시고 아픔과 눈물이 굳어버린 슬픔을 다시 녹여라. 그 생명의 술잔을 기울일 때 우리들의 피는 다시 시끄럽게 파동 치리라. 바닷물처럼. 진주의 조개를 흔들어놓던 그 바닷물처럼 고뇌의 술잔에도 그 생명의 술잔에도 잔잔한 파도가 일리라. p. 97~98  밑줄 긋고 가슴에 새겨두고 싶은 글이다. 

 단 한번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은 이가 있을까. 때로 낙심과 좌절로 방황하고 그 길에 주저앉고 싶은 순간을 돌아보며 그는 우수라 했다. 열병처럼 다가오던 10대의 첫사랑, 매일 직장에 출근하던 20대의 출근부 도장, 고단한 삶에 찌든 30대 아내의 모습,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회한에 쌓인 40대, 그리고 늙은 아버지들의 일상.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제대로 가고 있는가, 묻는다.  

 낙원보다도 이상하게 생긴 곳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렇다. 그것은 이방의 어느 나라보다도 멀고 먼 공간이다. 그 여행으로 얻은 공간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문학은 어머니의 땅에서 탱자처럼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노랗게 노랗게, 그리고 동글게 동글게 나의 언어들이 울타리를 만들어간다. p. 162

 그에게 문학의 마지막은 시작이 그렇듯 어머니였다. 어머니와 단둘이 떠난 외갓집 여행. 이제는 다시 갈 수 없는 여행이 그를 지탱한 것이다. 어머니 없이 어느 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가 있기에 세상은 존재하는 게 아닐까. 때론 한없이 뜨겁고 때론 한없이 강하고 때론 한없이 여리고 거대한 엄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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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 사회, 예술 관련 책은 많이 읽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여행기가 많이 보인다.  떠날 용기가 없는 난 책만 읽나 보다. 여하튼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책을 골라보면 이렇다. 우선 여행기로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굴라쉬 브런치』는 곁에 두고 천천히 읽고 싶은 맛있는 책이다. 여행과 영화를 접목시킨 책으로 프라하와 카프카를 꿈꾸게 한다.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허기를 채우는 것과 다를 게 뭐냐 싶다. 여행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관계를 맺는 것도 결국은 서로 다른 종류의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p. 60

 인문 사회 분야로 최근에 읽은 엄기호의『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은 20대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 하겠다. 내가 그네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세대에 속한다는 게 슬프다.  조카들과의 교감이 줄어들고  거리가 점점 커진다.   

 
나는 이것이 수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됨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는 것, 이보다 더 인문학적인 발견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맞지 않으며,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발견(깨달음) 말이다.그래서 우리에게 판단과 심판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찰의 언어이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이 가진 무게를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수업이라고 믿는다. p. 263 

 안현신의『키스를 부르는 그림』은 키스를 주제한 그림 이야기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며 숨겨진 화가의 일상을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주는 책이다. 다른 시리즈가 나온다면 만나고 싶다.

 서로에게 녹아들어 하나의 덩어리로 일체화된 두 몽뚱이는 마치 하나의 짐승 같은 모습이다. 홀로 버티기 버거운 존재들이 서로의 경계를 강하게 침투해보지만 그 몸짓은 오히려 불안하고, 채워질 길 없는 사랑의 갈망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p. 99    

 


 

 

 

 

 

 

 

 

 

 

 

 

 

 

 

 

 

 

 

  

 정민 교수가 풀어 읽은 민세 안재홍 선생의 『백두산 등척기』을 읽으면서 백두산을 만나는 시간은 조금 울컥했다. 간결한 문장으로 묘사한 1930년대 풍경은 쓸쓸했고 아름다웠다. 쉽게 읽히지는 않았지만, 여러 번 읽어도 좋을 책이다. 

 여행은 한가한 일이 아니다. 높은 산에 오르고, 한바다에떠서 천지의 드넓은 기운을 마시면서 웅장하고 아득한 기상을 기르는 것은 그대로 세상에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도시와 시골, 산과 들에서 백성의 만물이 살아 숨 쉬는 실제 상황을 폭넓게 보고, 고금에 변해온 자취를 살피는 것은 사회인에게 가장 으뜸가는 책무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여행이 필요하고, 여행기도 가치가 있다. p. 5 - 서문 중에서  

 
이야기꽃이 쓴 동화『신데렐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신데렐라가 아닌 토론을 위한 책이라 하겠다. 고학년 자녀를 두었다면 아이와 함께 읽고 의견을 교환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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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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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일이 정말 힘들었을텐데 엄마는 단 한번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엄마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너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이라고 한 번이라도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가 내게로 왔을 때, 엄마의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다. 나와 같은 나이였겠지만 엄마는 네 아이의 엄마였고 나이보다 휠신 더 들어 보였을 게 분명하다.  

 한 해를 마무리할 시기가 되니 산다는 게, 생이란 무엇일까, 자꾸 생각한다. 핑계를 대자면 올리브 때문이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중심으로 미국 메인주의 작은 마을 크로스비에서 일어나는 소소하고 특별한 일상을 담은 소설말이다. 엄마가 올리브처럼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키가 크고 푸석푸석한 퍼머컬을 가진 마른 올리브의 이미지에서 잠깐 엄마를 떠올린다.  그러나 엄마는 올리브처럼 당당하지 못했고, 그녀처럼 사랑에 흔들릴 겨를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분주한 일상을 살았다.  

 해안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13편의 연작 이야기는  다양한 생의 단면을 보여준다. 마을 사람들 누구나 주인공이 된다. 그 중심에 수학 교사이며 다정다감 대신 강한 자존심과 까칠한 성격의 올리브 키터리지가 있다. 누군가 이미 겪었을 법한, 혹은 누군가에게 닥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연출되는 삶의 현장을 묘사한다. 마을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의 에피소드는 흥미롭다.   

 약국을 하는 남편 헨리가 직원 데이지의 푸른 눈에 끌리는 순간을 올리브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자식은 또 어떠한가. 부모 생각은 눈꼽 만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 아들과 결혼한 잘난 며느리가 너무 못마땅해 몰래 신발과 옷을 훔쳐나오는 올리브의 심경을 그 나이가 되면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이혼하고 남의 자식을 키우며 재혼해 뉴욕에 살고 있는 크리스토퍼를 만나 어린시절 자신 때문에 힘겨웠다는 아들의 고백을 드는 건 절망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작은 마을엔 놀랍고 끔찍한 삶도 있었다.어머니의 자살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케빈이 자살을 결심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은사 올리브는 그의 계획에 없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케빈은 자살을 실천에 옮겼을지 모른다. 올리브는 그렇게 여러 삶의 합집합이며 교집합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끌리고 더 빠져든다. 

 결혼식 전에 파혼한 딸의 남자친구에게 총을 쏘는 일이 엄마에게 최선이듯, 가족보다 남자친구를 선택하는 길이 딸에게도 최선일 것이다. 마약에 빠져든 젊은 청춘이 있었고, 일요일마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편안함을 느껴 이혼을 결심하는 노년의 삶, 오랫동안 숨겨진 여자로 살아온 여자가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모든 것이 깨져버리는 삶이었다.  

 뇌졸중으로 요양원 신세를 지다 죽음을 맞이한 남편 헨리, 자신의 가정에 충실하며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 아들 크리스토퍼, 노년의 올리브는 여전하게 고집쟁이다. 언젠가 죽을 꺼란 사실에 올리브는 담담하지만 서글퍼한다. 그런 올리브를 보면서 내 모습은 언제나 똑같은데 세상과 사람들은 변하는 기분마저 든다. 

  그네들의 이야기는 낯선 땅 미국인의 삶이 아니라, 우리 동네 옆집, 건너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더 가깝고 정겹게 느껴진다. 누구나 집집마다 그들만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다만, 내게 닥친 문제가 제일 힘들고 제일 커 보일 뿐이다. 평범한 일상이 아름답다는 진리를 알게 되는 건 언제일까. 매일 같은 길을 걸어 출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는 일이 소중하다는 걸 우리는 그 당시엔 미처 알지 못한다. 뭐든지 지난 후에야 그 시간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된다. 현재에 충실하기 보단 언제나 먼 미래를 보기 때문이리라.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반복되는 현상처럼 우리네 삶도 그러하리라. 왈칵 밀물처럼 슬픔에 젖었다가 금세 기쁨과 마주할 것이다. 그리하여 삶이 계속되는 순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삶은 선물이라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수많은 순간이 그저 찰나가 아니라 선물임을 아는 것이라고. p. 227  책에서 만난 문장처럼 누가 뭐래도 삶은 선물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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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중된 책읽기를 고치고 싶은데, 쉽지 않다. 그 중에서도  소설만 읽으려니 말이다. 이번에는 산문이다. 2010년에 읽은 산문집을 살펴보니, 좋았던 책들이 많았다. 내 선택을 받은 5권은 이렇다. 우선 제일 먼저 떠오른 책은 최윤필의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멋진 제목이 또 있을까. 부제는 또 어떤가.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좋다라는 한 마디면 충분하다. 아, 좋다.  

 ‘흔희들 삶을 여행에 비유하지만, 삶에서 맞닥뜨리는 세상은 새로운 여행지와 달리 대개는 외롭고 황량하다. 그것은 우리가 지나쳐갈 나그네나 구경꾼이 아니라, 불편한 시선을 무릎쓰고 어떻게든 비집고 껴 앉아야 하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세상은 그들이 마음 편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넉넉한 세상, 지금보다는 휠씬 헐겁고 느슨한 세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p. 313

 박완서님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편안한 글이었다. 우리네 엄마, 할머니의 삶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할까. 전쟁을 겪은 세대의 슬픔을 읽는 그런 시간들이다. 연평도 사태를 보면서 전쟁을 떠올리는 순간, 자꾸 이 책이 생각난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 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이다. 그 두개 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 p. 25~26  

『나는 가짜다』는 작가들의 초상화와 글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짧은 글은 작가 각각의 개성이 묻어나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 처음 만난 작가, 궁금했던 작가들을 만나는 시간은 즐겁고 즐겁다. 거기다 그들이 직접 그린 그림까지 만나니, 괜찮은 기획이다. 

 ‘자화상이란 모름지기 이미 존재하는 육체적 외관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내면의 윤관 사시에 아슬아슬하게 맺히는,  하나의 긴장에 찬 이미지다. 모든 예술이 그럴 것이다. 외관과 내면 사이, 우연과 필연 사이, 자유와 부자유 사이, 필멸과 불멸 사이를 오락가락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p.163  권여선의 글  

  

 

 

 

 

 

 

 

 

  

 

 

 

 

 

 

 

 

 김동리의 세 번째 아내, 서영은의 진솔한 삶의 여정을 들을 수 있는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산티아고 길에 관한 책이 맞다. 그러나 여행기가 아니다.  종교가 같다면 더 좋을 책이다. 내려놓을수록 버릴수록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삶을 만난다.

  ‘인생의 중요한 결단이란 불시에 찾아들어 남모르게 치러지는 정신적 엑스터시와 같다. 그가 코앞에 있는 수건을 흔든다고 해서, 그 수건이 빨간색인가  하얀색인가 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는 없다. 입술을 꾸욱 다물고 시위를 당긴 방향,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이 중요한 것이다. ’ p 18 

 김도언과의 첫 만남은 박범신의 책에서 그리고  앞서 소개한 나는 가짜다에서 짧은 글로 만났다. 그리고 그의 소설집을 샀다. 소설집보다 먼저 만난 산문집이 바로, 불안의 황홀 이 책을 사랑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같은 날의 내 일기(블로그의 메모나 리뷰)를 찾기도 했다.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꺼내 읽어도 좋다.    

 11월은 소금 같다
 눈동자에 떨어지는 소금처럼,
 긴 황홀이다
 나뭇가지마다 흉터가 열리는,
 11월은
 비늘을 벗은 물고기처럼
 등이 따갑다 - 2005년 10월 30일 일요일 일기 전문   

 김도언이 소금같다고 말한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연평도 주민은 피난민이 되었고, 연말은 불안하게 다가온다. 모두에게 행복한 12월이 되면 좋겠다. 연평도 주민에게 의식주가 해결되면 좋겠고, 흥청망청 송년회가 아닌 조금은 경건하고 나눔이 있는 시간들이면 좋겠다. 12월은 설탕처럼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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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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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규’를 만나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박민규의 실체를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할까. 내가 생각하는 박민규를 말이다. 18편의 단편으로 박민규를 전부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를 만나는 시간 동안 오로지 그만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주는 선물로 쓰여진 단편을 읽는 순간은 그 누군가가 ‘나’라는 착각에 빠져도 좋을 시간이다. 소설을 선물로 받는 느낌은 과연 어떨까. 여하튼 그런 생각으로 소설을 쓰는 그가 참 괜찮은 작가구나 생각한다. 인간 박민규를 알지 못하니, 소설가 박민규는 그가 쓴 소설로만 평가를 받는다. 수상 이력으로, 인터뷰나 방송에서의 모습을 통해 만난 소설가 박민규가 아니라 그의 소설을 말할 시간이다.  

 가장 궁금했던 단편부터 읽기 시작했다. 바로, 연극으로 공연된 어머니를 위해 쓰여진 소설 <낮잠>이다. 요양원에서 첫사랑과 재회하는 노인의 마음을 다룬 잔잔한 내용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예기치 않은 병에 걸리는 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안간힘을 쓰며 살고자 하는 이도 인간이다. 요실금에 걸리고 치매에 걸린 노인들의 일상은 때로 고요하고 때로 요란하다. 기억을 잃은 첫사랑을 보호하고자 혼인신고를 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자식이 얼마나 될까. 문득, 산다는 게 무엇일까. 무엇을 향해 살고 있나. 복잡한 마음이 파도를 친다.  

 쓸쓸하고 고단한 삶을 그린 소설은 또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소설 <누런 강 배 한 척>에서 노년의 삶을 만난다. 치매의 아내가 등장하니 <낮잠>과 연결고리가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 다 내어준 늙은 부부는 함께 삶을 마감하려 한다. 평생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좋아하는 옷과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좋은 곳에서 머문다. 그 끝은 행복할까.  

『더블』엔 세 부류의 소설들이 있다. <낮잠>과 <누런 강 배 한 척>, 암에 걸리 40대 남성이 고향에 돌아와 주변을 정리하는 <근처>와 같이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막아주는 목도리나 장갑처럼 온기를 전해주는 단편들과 SF나 판타지 성향이 짙은 <깊>,<끝까지 이럴래?>,<굿모닝 존 웨인>, <크로만, 운>,<슬> 같은 단편이다.  

 후자의 소설들은 먼 미래의 지구나 인류의 모습에 대한 박민규의 놀라운 상상을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암을 비롯한 수많은 질병에서 해방되고 심지어 냉동까지 가능하다. 지구는 통일된 하나의 언어가 공통어가 된다. 언젠가 현실로 닥쳐올 지구 멸망의 불안한 사회상,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인간은 얼마나 존재할 수 있을까. 은 심해와 우주에서의 생존은 상상이 아니라 곧 현실로 다가올 게 분명하다. 내가 살 수 없는 미래에 누군가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아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일상과 상상의 중간쯤이라 해도 좋을 소설들도 있다. 박민규 특유의 재치와 감동까지 선사하는 단편들은 재미 그 이상의 표현이 적절하겠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떠다니는 비행물체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대처하는 인간의 심리를 다룬 <아스피린>, 소박한 꿈이 있기에 힘든 하루 하루를 이겨내는 이벤트 회사 직원이 광고용 비행선을 쫓아가는 <굿바이, 제플린>,  한 때 잘나가던 세일즈맨이 한순간 몰락하여 생계를 위해 화성까지 날아가 자동차를 파는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는 정말 기발하고 웃긴 설정이지만 절대 즐겁게 웃을 수 없는 건 그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란 노랫말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박민규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가진 작가가 아닐까 한다. 그의 소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다. 풀면 풀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긴 실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이상문학상 수상하고 <문학적 자서전>에서 만난 작가로서 숙연한 그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 그 한 부분을 옮기는 것으로 그와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련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글을 쓴다. 앉고, 보조용 테이블을 끼우고, 노트북을 얹으면 준비는 끝이 난다. 그리고 쓴다. 이유는 한 가지다. 이 의자가 지닌 거부하기 힘든 위력, 때문이다. 

 이 의자에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간이라는 장애를, 인간은 언제나 장애로 가득찬 존재임을 - 휠체어는 말없이, 자신의 전부를 통해 나에게 전달해준다.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늘 고개를 끄덕이는 기분이 되어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삶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이 한 줄의 문자이 얼마나 하물며 쓰여지는 것인지를 

 나의 재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이 의자는 늘, 실질적으로 나에게 충고하고 일러준다. 눈과 귀보다도
… 머리보다도 빨리, 몸은 기억하고 습득한다. 나는 머리보다 몸을 믿는 인간이고, 아무튼 이 습관을 통해 많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절약하고 잇다. 마음가짐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관건은 시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 <자서전은 얼어 죽을> 중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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