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소설집
김경욱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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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욱의 소설을 읽으면서 왜 김영하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김경욱과 김영하의 소설이 주는 느낌이 흡사하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란 소설집을 읽으면서 작년 여름 만난 김영하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가 생각났을 뿐이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만난 김경욱의 소설들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그는 우울하다 못해 화가 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표제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부터 그렇다. 손녀에게 성폭행을 가한 같은 반 친구들에게 아무런 제재 조치가 없다는 사실에 분개한 화자는 직접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기로 결심한다. 학교에서 주소록을 훔치고 그들이 사는 동네의 지도를 훔치며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를 한다. 그들은 재개발구역지역에 사는 자신과 달리 최고급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준비한 소주병에 불을 붙여 가해 부모자의 차량에 던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세상은 너무도 조용했다. 어디에서도 그가 행한 심판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신은 이미 그들을 용서한 것일까. 신에게는 아픔을 당한 손자가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일까.  

 이런 극과극의 인물 설정은 <런닝맨> 속 거대한 고층 아파트에 사는 조기유학 실패생 은재와 취업 준비 4년 차인 과외선생이나 <혁명 기념일>의 명품 쇼핑을 위해 파리 여행을 택한 여행자와 생계를 위한 여행인 가이드도 마찬가지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은재가 사는 곳과 과외 교사인 내가 사는 곳이 양지와 음지처럼 나눠져 있었고, 파리 역시 그러했다. 누군가에게 하나의 도시는 꿈과 이상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곳인 동시에 누군가에는 삶을 지탱하기 위핸 공간인 것이다. 작가 김경욱이 택한 주인공은 드러나는 화려한 모습인 양지가 아닌 일부러 찾아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음지의 삶을 사는 이들이다. 하여,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위로가 사랑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과거만 기억하는 할아버지와 자청하여 야간 경비일을 하는 아버지, 밤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까지 밤과 낮을 거꾸로 살고 있는 가족(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 자서전 대필 작가로 살아가며 진짜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 작가 지망생(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한 삶)에게도 말이다. 현실을 부정하듯 깊은 잠에 빠져든 할아버지나 자서전을 의뢰한 ‘허리케인 조’라 불린 전직 복서인 노인에게 삶은 어떤 의미였을까. 화려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부여잡고 싶은 마음만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었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내 생일이었다. 몇번째 생일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나는 아주 오래 살아야 할 것이다. 꼭 해야 할 일이 있거나 간절히 기다리는 게 있는 사람은 쉽사리 눈을 감지 못하는 법이다. 할아버지가 오래 살지 아버지가 더 오래 살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두 노인이 앞으로로 많은 날을 버틸 거라는 데는 내기를 걸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죽고도 숱한 세월을 더 살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자판기를 훔씬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 졸음을 쫓으려 애쓰는 모습을 훔쳐보며, 혹 목숨을 걸고 편의점 앞에서 서 있을지도 모르는 여자를 근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p. 226 (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  

 소설의 전반에 깔려있는 짙은 우울을 김경욱은 굳이 걷어내려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아니, 그 우울을 만든 이 도시가 걷어내야한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 도시에 사는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소설도 있다. 연애 소설로 입지를 굳혔지만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인기 작가를 인터뷰하는 <연애의 여왕>,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물과 그의 과거와 단점을 찾아내고자 애쓰는 화자의 노력이 안쓰러운 <99%>, 동반 죽음을 조사하는 형사와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통해 현대인의 무미전조한 삶을 보여주는< 하인리히의 심장>은 흥미롭다. 세 편 모두 감춰진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 유쾌하거나 놀라운 결말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김경욱이 그려낸 인물들이 살아가는 삶은 마치 곡예사와 같다. 허공을 뻗은 줄처럼 떨어질 듯 위태로운 일상을 한 발 한 발 내딛고 나아간다. 그들이 잡고 갈 버팀목은 어디에 있을까. 아니,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들만이 절대적인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 내민 손을 발견할 수 있고 잡아줄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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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1-10-24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아니 ,그리고 아니 .. .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경욱은 뻔뻔하기까지 하죠.
 

자목련 2011-10-25 16:3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자신감 넘치는 뻔뻔함이라고 해도 좋을..

June*님이 올리신 페이퍼를 읽곤하는데, 여기서 봬니 더 반가워요.^^*
 

 9월이 되면서, 나는 피곤에 둘러쌓였다. 특히 지난 주엔 유독 피곤했다. 많은 시간을 잠으로 채웠고 모든 일에 대해 관심도 의욕도 사라졌다. 그 와중에 친구의 수술 소식까지 접했다. 내 나이를 생각했다. 그마나 하루 걸러 여름 이불을 세탁하는 일만 할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내게 두 계절이 흐르는 시간이라서 그렇다고 친구는 말했다. 단 음식을 먹어보라고 했다. 이를테면 젤리나 다디단 과자같은 것 말이다. 많은 시간을 잠으로 채웠고 모든 일에 대해 관심이 사라졌다.  

 나를 짓누르는 무게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우선 일상의 변화를 떠올렸다. 그 즈음 어떤 약을 먹고 있었고, 그 약은 간 기능 저하라는 부작용이 있었다. 부쩍 피곤하고 무기력한 날들 뒤에 당뇨를 진단 받은 오빠가 생각났다. 해서, 병원을 찾았다. 피를 뽑았고, 오랜만에 지인도 만났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으면 먹던 약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병원에 다녀온 후로도 피곤하다는 말은 멈추지 않았다. 침대가 아닌 쇼파에서도 여전하게 나는 잠을 자고 있었다. 

 어제 오전에 검사 결과를 받았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소식을 전한 지인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심지어 영양 상태도 좋다고 했다. 먹고 있는 약도 계속 먹어도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나는 피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 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스트레스와 환절기라는 결론을 내 놓았고, 내 정신에 이상이 있나 보라고 웃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부에 있었던 것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 말이다. 끝내지 못한 어떤 일에 대해 편한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걸까. 오랜시간 9월에 고여 있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것일까. 여튼 나는 외부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그러니 내부적으로 건강해지면 되는 것이다.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부담을 덜어내려 하지 말고 해내야 하는 것이다. 

 지난 주, 침대에서 졸다 자면서 곁에 둔 책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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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장고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어쩌면 냉장고를 가장 많은 시간 바라보는 이는 나일 수 있는데 말이다. 하루 종일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반찬을 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고 중간 중간 물을 마시거나 과일이 들어 있는 날엔 과일을 꺼내고,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이나 얼려 둔 초코하임 같은 과자를 먹느라 열어보는 데도 나는 냉장고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확인하고 보니 단단하게 얼어있던 것들이 녹고 있었다. 끓여놓은 삼계탕, 종종 썰어서 락앤락 통에 담아둔 파는 흐물흐물해졌다. 우선 세기를 강으로 돌려 놓았다. 그러고 나니 언제 얼려놓은지 모르는 꽃게랑 떡들이 괜시리 안쓰럽게 여겨졌다. 살림 잘하는 주인을 만났다면, 이렇게 냉장고를 방치하지는 않았을 터.   

 어제는 오전 내내 곰국을 끓였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꼬리곰탕이다. 핏물을 빼고 한소끔 끓였다가 한 번 물을 버리고 강한 불에서 약한 불로 조절하며 끓였다. 집 안에 건강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곰탕을 끓이면서 이런 책들을 뒤적였다. 읽다 만 한차현의 소설을 다 읽었고,  조경란의 단편 <밤이 깊었네>, 정이현의 <어금니>, 박완서님의 <티타임의 모녀>란 단편을 읽었다. 조경란과 정이현의 소설은 재독이었다. 그러나 새로웠다.  


    

 

 

 

 

 

 

 

 

 세 작가들의 소설엔 모두 엄마가 등장한다. 알츠 하이머를 앓는 엄마, 젊고 세련된 엄마, 악착같은 삶을 살아온 엄마들을 차례로 읽었다.  박완서님의 <티타임의 모녀>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머니는 스쳐 지나가듯 부엌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가스불에다 삐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삐삐 소리가 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고 청소기를 끌고 나왔다. 보라색 바탕에 노란 꽃 무늬가 있는 어머니의 고무줄 바지는 뭉치면 한줌밖에 안 되게 하늘하늘한 천이다. 어머니는 아마 손지갑에다 그걸 숨겨가지고 왔을 것이다. 어머니의 손지갑은 그래서 보통 지갑보다는 크고 핸드백보다는 작다. 

 뭉치면 한줌밖에 안되는 고무줄바지가 엄마들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시집간 딸의 아파트에 다니러 온 엄마는 우아한 옷 매무새가 아닌 딸을 대신해 살림을 봐주기 위해 일하기 편한 옷을 챙겨온 것이다. 엄마들은 대체로 그런 걸까.   

 점심부터 계속 곰탕을 먹고 있다. 어제 저녁과 아침엔 앓고 있는 냉장고를 옆에 두고 먹었다. 냉장고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은 오늘 서비스센터 수리 기사분이 다녀가고서 금세 사라졌다. 수리한 냉장고는 다시 얼음을 얼리고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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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9-08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장고가 젊음을 되찾은 건가요? ^^
냉장고를 떠올리면 엄마가 같이 떠오르고, 맛있는 요리 생각이 떠오르는 건, 고무줄바지 같은 엄마들의 상징 때문일까요. 저 책들이 모두 궁금해집니다!

자목련 2011-09-14 11:17   좋아요 0 | URL
명절, 잘 보내셨나요?
냉장고는 젊음을 찾은 건 아니지만, 잘 돌아가요.
단편의 내용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제겐 엄마가 먼저 보였네요.
덧글, 고맙습니다.^^*
 

 9월이 되었다. 바람은 달라졌고 내 입술은 덥다라는 말을 삼켜버렸다. 몸은 가을이라는 걸 느끼고 있으나 아직 가을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가을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계절이 가을이다. 맛있는 바람이 불고 생명을 잉태하기 적절한 계절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나는 가을을 좋아하지 않는다. 9월로 시작하여 10월, 11월, 그리고 겨울까지 때때로 우울하고 때때로 쓸데없이 감정을 소모한다. 가을을 앓기 시작한 뒤로 나는 가을이 두렵다. 매년 다른 색으로 다른 속도로 다가오며 곧 사라질 가을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애매모호한 사랑 고백같은 게 봄이라면,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주저하는 마음은 가을이라고 해야 할까.   

  

 

 

 

 

 

 

 

 

  

 여튼 9월과 가을은 왔고 책도 왔다. 좋아하는 동생의 선물로 창작과 비평이 여름호에 이어 가을호가 도착했다. 백가흠의 소설집 <힌트는 도련님>, 김선재의 첫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심보선의 두 번째 시집 <눈 앞에 없는 사람>, 90년대 학번을 추억에 빠지게 할 한차현의 <사랑, 그 녀석>, 섹스를 테마로 쓴 <남의 속도 모르면서>까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걸 확인시키려는 듯 말이다. 

 작년 9월엔 곤파스의 손길로 유리가 사라진 채로 보냈다. 유리가 사라진 베란다 창틀에 기대어 같은 모양새의 여러 집들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올 해 9월은 아늑하다. 9월을 맞이해 내가 한 일은 방의 구조를 변경한 것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9월이 되서 한 일은 아니다.

 내 방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방이다. 침대 옆에 있던 컴퓨터 책상을 침대 아래쪽으로 옮겼고 작은 책장의 위치도 바꿨다. 아직은 이 위치가 낯설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다. 책들을 정리해야 한다. 소유해야 할 책들과 그렇지 않은 책들, 읽어야 할 책들과 그렇지 않은 책들, 당장 읽어야 할 책들과 조금 미뤄 읽어도 될 책들,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 리뷰를 써야 할 책들.

 9월엔 추석도 있다.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송편을 먹게 될 것이고, 마음이 분주할 것이다. 도로를 메우는 차들을 보면서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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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9-08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들을 정리하실 생각이시군요. 책장 위치를 바꾸시기도 하셨구요.
가구들의 위치를 바꾸고 나서 한동안 느껴지는 낯설음이 전 왠지 좋더라구요. 그러다 또 어느날 다시 원래대로 복귀를 해놓게 되면 다시 약간의 낯설음이 느껴지기도 하구요. 원래대로 돌아왔는데도 느껴지는 그 낯설음 또한 재미난 감정이더라구요.

자목련 2011-09-14 11:18   좋아요 0 | URL
방 안에 간이 책장과 책상의 위치를 바꾸었어요.
제대로 된 책장이 없기도 하고, 공간에 비해 책이 많아서 정리해야 하는데,
여전하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답니다.
바람이 좋은 오전입니다. 평온한 하루 이어가세요.^^
 
2011 제1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장욱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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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쟁상대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며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작가들의 경우, 같은 해 신춘문예로 등단했거나 연령대가 비슷하면 자연스레 선의의 경쟁 상대가 되는 것이다. 소재나 주제가 비슷하거나 소설의 방향이 같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문학과지성사의 ‘제1회 웹진문지문학상’과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을 통해 만난 젊은 작가들은 어찌보면 훌륭한 경쟁상대이거나 같은 출발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수상작가인 이장욱을 비롯해  『제1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김성중, 정용준, 김유진의 소설은 연이어 읽게 된 셈이다. 묘하게도 모두 나중에 만난 소설이 더 좋았다. 특히 정용준의 <가나>, 김선재의 <독서의 취향>, 최은미의 <눈을 감고 기다리렴>이 좋았다. 

 <가나>는 죽음을 소재로 한다. 가족과 고향을 떠나 돈을 벌기 위해 원양어선을 타고 낯선 바다에 빠져 죽은 남자의 이야기다. 죽은 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죽음과 시체를 걷어올린 산 자의 시선으로 나눠진다. 그러니까 화자인 나는 죽은 시체인 것이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시신을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은 어떨까. 삶과 죽음으로 나뉜 소설에서 마주한 건 사랑이었다. 고향에 두고 온 벙어리의 아내와 갓 태어나 아직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아들에 대한 사랑이다. 만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나 소리가 되어 가족에게 닿고 싶은 간절함이 애닯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소설이다.

  ‘하비바, 나는 당신이 좋아했던 노래가 되었다. 나는 지금 당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바람보다 가벼워졌다. 나는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는다. 국경을 넘어 마을로 향한다. 가나가 만지고 있을 초원의 풀 위로, 새 떼가 뒤덮는 하늘 위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당신의 머리 위로, 그리고 당신의 말라버린 성대 속으로,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좋겠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p. 79    

 <독서의 취향>의 화자는 말더듬이로 책을 파는 외판원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가 사랑하는 안나는 환상의 인물이며 주말을 함께 보내는 결혼한 안네는 실존의 인물이다. 안나는 환상이었고 안네는 현실이었다. 아니, 둘 다 나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말더듬이 세일즈맨이 소통을 위해 쏟아내는 노력이야 말로 삶을 살아내는 모습은 아닐까. 해서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자신만의 안나를 꿈꾸는 건지도 모른다.    

  ‘세상이 기울었으니 액자가 기우는 건 당연한 거야. 나의 말에 안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시 써? 파는 일이나 잘하시지. 나가 알기에 시는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안네에게 그건 별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현실을 현실적으로 파악하는 힘이 있었다. 시는 시인이 쓰고 나는 책이나 팔고 나와 살지 않는 안나는 나를 사랑했고 나와 사는 안네는 나를 지상에 단단히 묶었다. 다들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이토록 한결같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p. 363 

 존재 자체가 트라우마가 될 수 있을까. <눈을 감고 기다리렴> 속 화자는 쌍둥이로 존재했으나 결국 혼자 살아남아 모두에게 상처로 인식된다. 그러니 생에 대한 애착보다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을 것이며 양수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자살을 감행하기 위해 모인 변두리 여관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수상작인 이장욱의 <곡란>은 존재와 부재사이를 오가는 위태로운 삶과 마주한다. 기존의 소설인 프랑켄슈타인을 독특한 인터뷰로 구성한 최제훈의 <괴물을 위한 변명>,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더 잔혹하게 세상과 맞서는 약자의 이야기 이유의 <커트>는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가위가 가진 섬뜩함을 잘 묘사한다. 우연하게 살인을 저지른 연쇄 살인범을 통해 인간의 이중적 모습을 보여주는 정소현의 <실수하는 인간>은 탄탄한 구성이 돋보였다.

  86 아시안 게임과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이홍의 <나의 메인스타디움>과  한 번쯤 마주할 법한 사이비 종교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의 사연 속에서  우리의 일상과 겹쳐지는 모습을 발견하는 김성중의 <게발 선인장>은 무척 재미있었으며 주어 온 항아리에서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들을 떠올리며 그것들에 대한 서글픔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황정은의 <甕器傳>과 한 집에 사는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의 통해 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확인하는 김유진의 <희미한 빛>은 더 깊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문학을 좋아하는 내게 이처럼 다채로운 소설을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다. 거기다 좋은 소설이니 더욱 그렇다. 의도하지 않아도 두 작품집에서 만난 작가들과 소설들을 비교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고백하자면, 문지에서 선택한 소설에 마음이 기운다. 개인적으로 문지의 소설들이 더 단단하고 깊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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