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이다. 더위의 끝이 보이는 것일까? 삼계탕을 먹었냐는 안부를 들었다. 냉동실에 삼계탕이 있지만 치킨으로 대신하는 말복이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고 더위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여름에는 싱싱한 과일을 많이 먹는다. 참외, 토마토, 복숭아, 자두. 나는 자두를 제일 좋아한다. 한 번에 제법 큰 바구니 속 자두를 전부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다. 신맛은 신맛대로 단맛은 단맛대로 정말 자두가 좋다. 어린 시절 마당에 자두나무도 있었는데.

 

 그 자두나무 때문에 나는 이런 시집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자두나무 정류장』이라니. 자두나무 정류장에서 봄이면 자두꽃이 피는 걸 보고 여름엔 자두가 무럭무럭 커가는 것도 보고 빨갛게 익어가는 것도 보고, 얼마나 좋을까. 시도 참 예쁘다. 정이 있는 마을, 혼자가 아닌 함께 사는 마을, 그런 시골을 떠올린다. 달이 와서 내리는, 눈이 별이 와서 내리는 정류장이니 깊은 밤 혼자 길을 걸어도 무섭거나 외롭지 않겠다.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 왔는데

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마중

눈이 오면 눈마중

달이 오면 달마중

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 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달이 와서 ​찰바당찰바당 내린다

뭇별이 우르르 몰려와서 와르르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던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자두나무 정류장」, 전문

 

 

 이런 시도 좋다. 농부의 딸이었지만 계철마다 절기마다 해야 하는 농사일이 있다는 걸 어렸을 때는 몰랐다.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공부 말고도 또 있었다. 그러니 연이은 가뭄으로 제때 심지 못한 모종, 모내기로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예전과 다르게 농사기술이 발전했지만 비 오는 일은 여전히 하늘의 몫이다. 여름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날들이라서 입하, 란 말에 어린 생기가 그립게 다가온다. 입추도 지났지만 입하는 또 곧 도착할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점점 빠르고 시간만큼 정직한 이도 없는 듯하다.

 

 

새너디할매가 마늘밭 풀을 맨다

 

일자도 장소도 틀림없이

지난해와 똑같은 날, 똑같은 밭이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미숫가루 한 그릇 타드리고

쑥떡 한 덩어리 얻어먹는데,

해 지기 전에 비가 칠 것 같다는

한 소식 전해주신다

이런 날 모종이 잘된단다

그래요?

 

부랴부랴 읍내 종묘상 다녀와서

고추 모종을 한다

가지 모종을 한다

수박 모종을 한다

호박 모종을 한다

단호박 모종도 단단히 한다

어라, 진짜네?

 

해 지기 전에 비가 쳐서

강병에 매어놓은 염소 먼저 들어간다

 

굵은 비 아까워서

물외 모종 심는다

참외 모종 심는다

토마토 모종 심는다

빗방물도 방울방울

방울토마토와 같이 심는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저녁 무렵 입하 비가

마늘쫑 뽑는 소리처럼 온다 「입하(立夏)」​ , 전문

 

 

 농촌에서 산다는 건 계절의 소리를 피부로 듣는다는 것이다. 얼핏 농부의 삶, 시골의 모습이 가득한 시집처럼 여겨졌다. 평온이 지속되는 일상. 그러나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지고 볶는 게 사는 일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지지고 볶는 생에 이런 시도 함께 지지고 볶는다. 볶은 시는 내가 되고, 볶은 시는 사랑이 된다. 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일, 좋은 시집을 읽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다. 누군가의 바닥을 보는 일상, 그 바닥에 내 바닥을 포갤 수 있는 일상,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괜찮은 하루가 이어지겠지.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 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바닥」, 전문

 

 

 말복에 읽는 시라는 제목을 붙이니 더불어 이런 시집도 생각난다. 이현승의 『생활이라는 생각』, 이정록의 『의자』까지. 삼계탕 대신 시집을 먹는 색다른 말복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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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7-08-12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닥이라는 시가 참 마음에 드네요. 좋은 시 소개 감사합니다^^

자목련 2017-08-14 18:22   좋아요 1 | URL
네, 마음에 박히고 마음을 움직이는 시가 아닐까 싶어요. 좋은 시를 함께 읽은 공간, 참 좋습니다.
 

 

 뒤늦은 일기를 쓰는 기분이다. 몰아 쓴 일기라고 해야 맞겠다. 소설을 읽고,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을 흠모하는 이에게 소설을 쓰는 작가는 대단한 존재다. 그러니 그런 소설을 심사한다는 건 얼마나 두렵고 어려운 일일까. 운이 좋아서, 그런 기회를 가졌다. 민음사가 주관하고 알라딘이 후원하는 <오늘의 작가상> 독자 심사위원이 되었고 지난 8월의 어느 날 심사과정에 참여했다.

 

 

 

 

 8편의 후보작들을 읽었다. 나름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과 심사를 위한 읽기는 뭔가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나마 후보작으로 발표되기 전 이미 읽은 소설이고 일부는 리뷰를 작성했다는 게 다행이었다. 꼼꼼하게 세세하게 읽으려 하니 신기하게도 다른 것들이 보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처음엔 그냥 넘어갔던 문장이 새로운 의미로 나를 맹렬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 인물의 입장이라면 나는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잠깐씩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와 문학의 접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나와 겹쳐질 수 있는지, 문학의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나를 제외한 4명의 심사위원은 모두 전문가이기에 심사 일이 다가올수록 불안은 형태를 지녀 나를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다. 떨림과 긴장으로 시작(아마도 나만 그랬을 것이다) 된 심사가 진행되면서 나는 그 순간이 참 좋구나, 즐겁구나, 체감하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오늘의 작가상>이 갖는 의미를 기억하는 것. 정말 뜻깊은 시간이었다. 아무 무늬 없는 무더위로만 채워질 올여름, 선명한 무늬로 새겨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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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1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1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긴 봄날의 소품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어떤 도전이 될 것이다. 자꾸만 미루는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소설도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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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 산책 - 2016 제16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정용준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잊고 있었던 책, 괜히 미안해지는...
여름의 끝에서 마주하는 가을의 소리처럼, 그렇게 다가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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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의 나날이다. 감자를 쪄서 먹고, 감자를 볶아 먹고, 감자로 찌개를 해 먹고, 노란 카레를 해 먹는다. 찐 감자를 주스와 함께 먹고, 찐 감자를 커피와 함께 먹고, 찐 감자를 시원한 물과 함께 먹는다. 밭에서 직접 감자를 깨고 싶다, 흙을 만지고 싶다. 어린 시절에는 정말 하기 싫었던 일이 그리워지다니. 늙고 있다. ㅎ

 

 더위는 도둑처럼 일상을 훔친다. 밤마다 잠을 설친다.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한다. 작년에도 이랬던가, 아닌 것 같은데. 곧 사라질 더위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밀어낼 수밖에 없는 나날이다.

 

 이런 날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를 곁에 두고 뒤적인다. 좋아하는 시인을 생각하고, 아끼는 시를 찾는다. 시집으로 책장을 채우고 싶었던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겨우겨우 책장 한편에 놓인 시집이 전부다. 이름도 낯선 시인과 그의 시를 읽은 일은 묘한 떨림을 몰고 온다.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나는 그의 시집을 소장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시인의 이런 시 말이다. 최하림, 어디서 들었던 이름일까. 아니면 들었다고 착각하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다른 시인의 같은 제목의 시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저녁, 눈빨 뿌리는 소리가 들려

유리창으로 갔더니 비봉산 소나무들이

어둡게 손을 흔들고 강물 소리도 숨을 죽인다

나도 숨을 죽이고 본다 검은 새들이

강심에서 올라와 북쪽으로 날아가고

한두 마리는 처져 두리번거리다가

빈집을 찾아 들어간다 마을에는

빈집들이 늘어서 있다 올해도 벌써

몇 번째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떠났다

집들이 지붕이 기울고 담장이 무너져 내렸다

검은 새들은 지붕으로 곳간으로 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검은 새들은 빈집에서

꿈을 꾸었다 검은 새들은 어떤

시간을 보았다 새들은 시간 속으로

시간의 새가 되어 들어갔다

새들은 은빛 가지 위에 앉고

가지 위로 날아 하늘을 무한 공간으로

만들며 해빙기 같은 변화의 소리로 울었다

아아 해빙기 같은 소리 들으며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있다

검은 새들이 은빛 가지 위에서 날고

눈이 내리고 달도 별도 멀어져간다

밤이 숨 쉬는 소리만이 눈발처럼 크게

울린다 「빈집」, 전문

 

 

 눈발을 뿌리는 소리를 상상해본다. 나는 그 소리를 짐작할 수 없다. 그 밤을 상상할 뿐이다. 기념 시선이 좋은 건 언제나 내가 모르는 시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잊고 있었던 시를 소리 내어 읽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은 65명의 시인들의 시를 두 편 씩 수록한 시집이다. 나는 이 시집을 넘기면서 정현종의 시와 나희덕의 시와 문태준의 시를 그렇게 읽었다. 정현종의 시는 언제나 나를 평온하게 만든다. 어떤 잘못을 해도 그 시안에서는 질책이 아닌 위로를 얻을 수 있는 따뜻한 품처럼. 문태준의 「가재미」를  <낭독의 발견>에서 처음 만났을 때 가슴을 타고 올라오던 무언가를 기억한다. 낭독의 발견 같은 프로그램이 다시 생겼으면 좋겠다. 요즘은 서점이나 북카페에서 많이 이뤄지고 있는 행사지만 나는 아쉽다.

 

 시를 읽는 건 잠시 다른 세계로의 이동은 아닐까. 여기 있는 나를 접어두고 첫눈처럼 순수한 시간, 단풍처럼 화려한 시간, 새벽처럼 고요하고 정갈한 시간으로의 초대 말이다. 우리는 시를 통해 사랑을 마주하기도 하고, 혁명의 순간을 접하기도 하고, 세상을 읽기도 한다. 도통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시를 만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를 잃고 싶지 않다. 시를 잊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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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7-28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읽을 때는 주로 카페나 침대에서 읽는터라 감자를 먹으며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가끔 김밥이라던가 하는 작품을 읽을 때면 김밥을 먹으며 다시 읽어볼까 싶을때가 있긴하지만요^^;; 무덥다기 보다 습한 여름, 눈발을 뿌리는 소리를 상상하신다는 글귀에서 갑자기 ‘청량감‘이 느껴지는게 시가 아닌 이런 리뷰도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자목련 2017-07-31 18:21   좋아요 0 | URL
더운 여름이라서 겨울의 이미지를 마주하는 시에 눈이 갖는지도 모르겠어요. 리제 님의 댓글이 제게는 큰 도움을 주네요. 남은 여름 시원하게 보내세요^^

잠자냥 2017-07-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안 읽은지 꽤 오래 되었는데, 자목련 님의 이 글을 읽으니 문득 시가 읽고 싶어지는군요. 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17-07-31 18:22   좋아요 0 | URL
시를 향한 열망이 사그라들고는 있지만 그래도 시집을 붙잡고 있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