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의 오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최정수 옮김 / 부키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오해는 쉽게 발생하고 어렵게 풀린다. 모름지기 오해란 그렇다. 화해를 할 타이밍을 놓치거나 상대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라니까.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지기도 한다. 모름지기 오해란 그런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모스크바에서의 오해』는 제목 그대로 모스크바에서의 오해에 대한 이야기다. 잘 알려진 대로 보부아르와 샤르트르가 1962~1966년 모스크바를 방문면서 벌어진 자전적 소설이다. 그래서 실감나게 다가온다.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 둘 사이를 흐르는 긴장감,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소설은 앙드레와 니콜 부부가 딸이 있는 모스크바를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흥미로운 건 앙드레와 니콜은 재혼 부부로 각각 자녀가 있다. 그러니까 니콜에게 앙드레의 딸 마샤는 가깝고도 먼 존재다. 3년 만에 찾은 모스크바에서 앙드레는 예전과 다른 소련의 모습에 실망을 한다. 기대했던 게 아니었다. 그건 니콜도 마찬가지다. 늙은 자신과 다르게 젊은 마샤를 보며 부럽고도 허무한 감정을 느낀다. 거기다 앙드레와 마샤 부녀의 사이에서 살짝 소외된 기분까지 든다. 그러다 앙드레와 니콜 사이에 오해가 생긴다.

 

 그들은 계속 함께 살 것이고,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불만을 감출 것이다. 많은 부부가 그렇게 포기하고 타협하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고독 속에서, 나는 혼자다. 앙드레 곁에서 나는 혼자다. 그리고 그것을 납득한다. (104~105쪽)

 

 시작했기 때문에 계속되는 부부관계. 이것이 그들을 기다리는 미래였을까? 우정으로, 애정으로, 하지만 함께 살 진정한 이유는 없이. 그런 것일까?  (125쪽)

 

 앙드레는 변화된 소련에 실망을 했지만 다양한 곳을 방문하면서 즐기고 싶지만 니콜은 지루하고 피곤함을 감출 수 없다. 그런데다 앙드레가 니콜에게는 의견을 구하지도 않고 일정을 늘린 것이다. 니콜은 그런 부분이 서운하다고 말하지만 앙드레는 분명 니콜의 동의했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기억이 잘못되었다. 사소한 오해와 실수로 우리는 때로 큰 것들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현명한 앙드레와 니콜은 대화를 통해 그것을 풀어간다.

 

 60대 부부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깊게 사랑한 마음, 자존심을 버리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 말이다. 어떤 이는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많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사랑을 보여주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하지 많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앙드레와 니콜의 대화는 아름답다.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보여준다. 그들의 대화는 소박하다.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중요한 것에 대해 언급한다.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야. 그녀가 생각했다. 대화가 되지 않는 부부 사이에는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우리 관계가 망가졌을까 봐 조금 두려웠어.

  “나도 그랬어.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야.” 그가 말했다. “우린 반드시 이야기를 나눠야 했어.” (137쪽) 


 보부아르와 샤르트르가 특별한 그들만의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상대에 대한 인정과 함께 한 시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졸혼이 새로운 유행이 된 요즘, 오해를 푸는 노부부의 모습은 결혼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함께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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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에는, 그래도 좀 걸었다. 내 기준의 걷기로 제법 걸었다. 목 디스크로 언니가 입원한 6월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더위가 몰려오고 비가 오기 시작하니 점점 꾀가 났다. 징검다리처럼 걷다가 결국엔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신발을 신는 현관까지 나가지를 못했다. 나갔다 하더라도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도는 게 아니라 잠깐 바람만 쐬다가 들어오고 말았다. 그리고 가을이 되었다. 걷는 즐거움을 그리워하는 계절이 되었다. 적당한 바람과 적당한 햇빛이 나를 유혹하는 계절. 장석주의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을 읽으면서 천천히 걷고 싶어졌다. 아주 천천히 걷다가, 앉을 만한 곳이 있으면 그냥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싶어졌다.

 

 걷기의 즐거움은 풍부한 감각적 경험을 낳는다는 데서 비롯한다. 나는 풍경을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며 걷는다. 걷기는 저 바깥에서 내 안으로 전달되는 소리와 냄새와 시각적 자국들을 바탕으로 한 사유와 상상력의 촉매제다. 걷기에 몰입하는 사람은 시공간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열어젖힌 채 세상의 풍경들을 제 안으로 받아들인다. 걷기는 이것들을 모아 스스로를 빚는 성분으로 삼는 것이다. 또한 걷기는 관능적 기쁨을 되살리고, 건강에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나를 오롯이 나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수단이다. (233쪽)

 

 장석주가 들려주는 그의 삶은 단순하고 평안한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자유로움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의 삶에 정착할 때까지 그 과정은 단순하고 평온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의 평정과 고요가 찾아오기까지 수많은 파도가 일렁이며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을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달래려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는 장석주의 그 어느 시절처럼, 출판사를 접고 시골로 내려와 살기로 한 결정한 그 시절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힘든 시기를 견뎌냈기에 이렇게 편안하고 빛나는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그가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건 특별하지 않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미 겪어온 그 계절의 변화를 마주할 때마다 놀랍고 감격스럽다. 그러니 봄이 되면 어김없이 모란과 작약의 황홀함에 빠져들고 여름의 건강한 초록에 반하는 것이다. 이건 내가 시골에 살아서 잘 안다. 장석주의 글에는 자연, 걷기, 글쓰기,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것이 그를 이루고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 글을 쓰는 일. 한눈을 팔지 않고 오롯하게 그것을 해내는 일. 누군가는 그게 직업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고 한 손에 책을 들고 숲을 걷는 장석주의 삶은 그에게 최고다. 문득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나이만큼 먹었을 때 나는 그처럼 살 수 있을까, 생각했다. 걷고, 읽고, 사랑하고, 쓰고 단순하게 사는 삶. 복잡하지 않고 여유가 있는 삶.

 

 장석주의 시골 생활과 서재는 이미 잘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는 건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아들은 유유자적 책을 읽고 어머니는 갖가지 채소를 심었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과 된장찌개를 먹는 단순한 일상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리움이 되었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일상의 적막함이라니. 농담처럼 결국엔 다 혼자라고 말하지만 정작 혼자가 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미 책에서 배웠다 하더라도, 안다고 생각해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 그것이 인생이다.

 

 단 일 회의 편도여행, 그것이 인생이다. 지도 없이 떠난 편도여행에서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을 헤매고, 구렁텅이에 빠져 벗어나려고 고단하게 허우적이며 안간힘을 쓰는 사람도 어딘가에는 있는 법이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절경을 만나 뜻밖에 횡재한 기분인 적도 있었다. 인생이라는 편도여행은 우연과 불운들, 기이한 행운과 엇갈림의 연속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편도여행은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음, 그 불가피성으로 이 여행은 슬픔과 아쉬움, 그리고 덧없음과 감미로움이라는 긴 여운을 남긴다. (119~120쪽)

 

 인생의 오후를 가장 빛나게 살고 있기에 아름다운 것일까. 문장을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을 얻는다. 이처럼 편안한 시인의 산문집을 읽다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책이 있는데 바로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이다. 아마 나 아닌 누군가도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일상과 사유, 그리고 자연을 노래한 점에서 정말 닮았다. 눈에 보이는 자연, 피부에 닿는 계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그대로의 기록이다.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글을 읽는 우리는 이미 잘 안다.

 

 노란 은행잎을 주워 담으며 알록달록 단풍을 즐기는 사이 ‘가을이 되었다’는 말은 곧 과거가 될 것이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자주 깨던 지난여름이 그러하듯. 우리는 그 계절을 그리워한다. 지겨워하고 그리워한다. 겨울이 시작되는 날, 이런 문장을 다시 읽으리라.

 

 겨울 아침의 서리 사이로 반갑기 그지없는 소문이 들려온다. 미美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그걸 직감하는 게 평생, 계절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고 기쁨이다. 우리가 그런 욕구를 느끼는 건 우리 외부의 것들 때문이 아니다. 질문들과 그 답을 얻으려는 노력은 우리 내부에서 나온다. (중략) 햇살은 언 풀잎들에 고루 닿고, 일방적인 광경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특별한 광경으로 불타오른다. 아직 똑바로 선 잡초들은 순간적으로 얼음과 빛의 셔츠를 입고 마법의 지팡이가 된다. 이 첫 빛은 작은 연못과 소나무 숲의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 이제 은빛은 그만, 분홍을 보라. 더할 나위 없는 은은한 연초록의 분출을 보라. 오직 이 시간만이, 늘 새롭고 신선한 새벽만이 연출할 수 있는 광경이다. (『완벽한 날들』,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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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7-10-19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지금도 나름 <완벽한 날들>로 살고 있는걸지도 몰라요.. 그저 조금 더 나아진 모습으로 나이들길 바라는게지요^^

자목련 2017-10-20 15:34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 그게 가장 완벽한 게 아닐까 싶어요.

2017-10-19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0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국 (리커버 특별판, 양장)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컬렉션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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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판은, 지나치기 힘들다. 요 며칠 첫눈이 내릴 것 같았던 날씨 때문에 더욱 끌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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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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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듣는 느낌일 것만 같은 소설. 얼른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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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정말 결실의 계절인가 보다. 아니, 열매의 계절인지도 모르겠다. 수북한 밤을 보며 든 생각이다. 무언가를 획득하는 일은 성취감이 크다. 작은 노동의 수고로 비어있던 자루가 차오르는 건 즐거운 기쁨일 것이다. 그 기쁨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나는 그저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밤의 상태는 살펴보지 않고 씻어서 냄비에 삶았다. 지난번 먹은 밤보다 맛이 없었다. 모든 밤이 맛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룻밤이 지나고 밤이 들어있던 자루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알맹이들이 가득하다. 그것은 벌레가 밥을 먹은 흔적이었다. 온전한 밤을 고르는 일이 시작되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벌레가 먹은 밤을 고르는 건 쉬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고른다고 고른 밤을 씻어 물기를 빼고 얼마 후 다시 작은 알맹이가 나타났다. 도대체 벌레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 단단한 껍질을 뚫고 밤을 먹는 것일까. 똑같이 생긴 밤을 바라보면서 겉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게 밤이구나 생각했다. 찐 밤을 갈라 보고서야 썩거나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얼마 안 되는 밤의 내면을 마주한다. 누군가의 내면을 아는 일도 그렇겠지. 겉으로는 그의 내부를 알 수 없고. 몇 번의 만남과 대화로 안다고 착각하기도 하니까. 그럼 밤 껍질은 위장일까. 아니 내부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막일지도 모른다. 쉽게 웃으면서도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할아버지 추도 예배를 드린 어제, 홀로 참석하신 작은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난봄 입원과 시술, 그리고 계속되는 약 복용으로 부은 얼굴로 등장하셨다. 괜찮으시냐고 물었더니 통증은 없고 약 때문에 붓는 얼굴 때문에 속상하시다고만 하셨다. 몸이 보내는 신호였지만 부은 얼굴이 작은아버지의 상태를 다 알려주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그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외부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내부를.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그의 소설에 대한 글을 많이 접한다. 내게도 두 권의 책이 있다. 읽지 않은 채 구매만 한 책. 조만간 읽으면 좋으련만. 장담은 어렵다.  그럼에도 소장하지 않은 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구매해야 하나, 혼자 생각한다. 충동구매로 이어지면 안 되는데. 관심이 가는 책은 첫 소설과 첫 시집. 장수진의 『사랑은 우르르 꿀꿀』, 박사랑의 『스크류바』.

 

 

 

 

 

 

 

 

 

 

 

 도망치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가을이다. 고개를 들어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을과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착각에 빠진다. 떠나는 가을을 붙잡을 수 없겠지만 가을과 행복한 이별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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