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지독했던 여름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숨 막힐 듯 뜨거웠던 열기는 언제 식었단 말인가. 아침저녁으로 팔뚝을 쓸어내린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내게로 천천히 스며든다. 밤은 깊어 가고 그 까만 빛은 더욱 영롱해지니 이런 밤에 당신의 내면을 듣는다. 당신의 글을 읽는다. 이상하게 가을엔 소설보다 산문에 더 끌린다. 시집도 물론 좋다. 이 가을에 센티해지는 건 나만 그런 것일까. 단정하게 그리고 단호한 느낌이 가득했던 『슬픈 인간』이 제격이다.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의 시대, 내가 알지 못하는 글에 대한 간절함,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은 생에 대한 우울감과 상처와 회복을 반복하는 생의 아이러니. 26명의 작가가 쓴 41편의 산문을 수록한 『슬픈 인간』을 읽으면서 산문이란 이렇게 아름답고 강렬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이끄는 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게 만드는 마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러니까 좋은 산문, 좋은 수필은 어떨 것일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군더더기 없이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글은 아닐까. 평범한 일상 가운데 느닷없이 찾아오는 명징하면서도 이상한 기류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것 말이다. 일기처럼 보이지만 일기는 아닌 글, 한 발 떨어져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힘.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온몸의 감각을 열어놓고 그 소리를 간직하고 싶은 간절함이 생긴다. 그 피아노 소리는 어떤 형상과 빛을 냈던 것일까.

 

 그때 누군가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친다기보다 만지는 소리였다. 무심결에 발걸음을 멈추고 스산함에 잠긴 주위를 둘러봤다. 마침 달빛이 가늘고 긴 피아노 건반을 넌지시 비추고 있었다. 명아주 수풀 속 그 피아노를.ㅡ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는 어디도 없었다. 딱 한 음이었다. 하지만 피아노가 분명했다. 나는 조금 으스스 해져서 다시 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그때 내 뒤에 잇던 피아노가 분명히 또 희미한 소리를 냈다. 난 물론 뒤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걸어갔다, 습기를 머금은 세찬 바람이 내 등을 떠미는 걸 느끼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피아노」중에서, 38쪽)

 

 잘 알려져서 그들의 문학을 전부 다 읽은 것처럼 착각하는 나쓰메 소세키, 미야자와 겐지, 다자이 오사무를 제외하면 내게는 이름조차 낯선 작가들의 글이었다. 그것은 어떤 산문을 읽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신선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나쓰메 소세키의 경우 『긴 봄날의 소품』에서 만난 산문과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담백한 유머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듯 세상에 작가는 너무 많고 내가 읽어야 할 글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26명의 작가의 산문은 각각 많게는 세 편, 적게는 한 편을 읽을 수 있는데 작가의 이력을 함께 소개하고 있어 산문의 배경이나 시대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전쟁의 상흔이나 생활고, 우울증에 대한 것들이 그러하다. 글을 통해 그 시대를 상상하고 작가의 불안을 읽는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인지 짐작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글이라는 매개체가 있어 조금이나마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산문은 그 안에 담긴 고통을 상쇄시킬 정도로 아름다웠고 작가의 심리를 고스란히 묘사한 글은 걱정을 불러왔다.

 

 나는 길을 걸으며 내 발소리가 고요하고 차분하다고 느낀다. 전찻길을 가로질러 폭 일 미터의 골목길로 들어서면, 양쪽 높은 건물 위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선명하게 아름답다. 정말 이렇게 예쁘고 파란 하늘이 거리에 존재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거의 굶어 죽을 지경으로 불판 폐허를 비틀비틀 걸아 다녔을 때, 그때도 저 높은 하늘에서 살짝 새나온 이상하리만치 맑고 깨끗한 빛이 있었다.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어떤 힘이 내게 그 사실을 격렬하게 상기시켰다. 나는 나의 발소리를 나의 숨소리마냥 하나둘 세고 있다. (하라 다미키 「불의 아이」중에서, 318쪽)

 

 분명 보통의 일상인데 감탄을 자아내는 산문이 많았다. 그것은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일까. 아니면 쓰고 또 쓰면 가능한 것일까. 똑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다자이 오사무 「온천溫泉」과 같은 짧은 글은 온천이 아니더라도 욕조에서의 기분을 써 보거나 마사무네 하쿠초의「꽃보다 경단」처럼 꽃 피는 풍경이나 추억을 묘사해도 좋을 듯하다. 26명의 작가의 글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기쁨, 그 안에는 치열한 아름다움과 함께 슬픈 인간의 초상이 가득하다.

 

 아름다운 물이다, 그래, 흡사 수정을 녹인 듯 아름답다, 나의 몸을 담그기에 어쩐지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탕으로 들어간다, 졸졸 물이 넘쳤다, 아까운 짓을 했구나, 탕 안에 찰랑찰랑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기분 좋다, 햇살이 불투명 유리 너머로 쏟아져 물 밑까지 비추었다. 물은 다시 잠잠해져 나의 몸을 감쌌다. 정말로 밝다, 밖에서 참새가 짹짹 울었다. 무심코 밝은 창문 쪽을 바라본다, 뜰에서 드리운 나뭇잎 그림자가 불투명 유리에 검은 그림을 그렸다. 바슬바슬 미미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뭇잎 한 장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괜스레 쓸쓸했다. 야릇하게 몸이 나른해졌다. 물에서 하얀 수증기가 느릿느릿 올라온다, 손으로 앞으로 쭉 뻗다 문득 손톱을 봤다, 많이 길었네, 잘라야겠어. 정말이지 고요하다, 나의 몸도 영혼도 수증기와 함께 천상으로 피어오를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자이 오사무 「온천溫泉」전문, 186쪽)

 

 가을밤, 점점 고요해지는 순간에 베릴 마크햄의 『이 밤과 서쪽으로』도 마주하면 좋을 책이다. 제목부터 근사하지 않은가. 서쪽으로 가면 무엇이 나올까. 읽기도 전에 나는 그 밤과 서쪽을 생각했었다. 지평선과 맞닿은 초원, 그 위를 달리는 야생동물. 한 여자의 내밀한 일상의 기록이자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베릴 마크햄은 1902년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삶의 뿌리를 아프리카에 내리기로 선택했다. 아프리카 케나에서 말을 조련하고 원주민들과 사귀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다. 아프리카에서 살아간다는 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여유롭고 아름답기만 했을까. 그러나 베릴 마크햄은 달랐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선택한 삶을 향해 나갔다.

 

 아프리카는 신비롭다. 야생의 땅이자 푹푹 찌는 열화 지옥이다. 사진가들에게는 천국이고, 사냥꾼들에게는 발할라요, 현실도피자들에겐 유토피아다. 아프리카는 당신이 바라보는 모습을 보여주며, 어떤 해석이라도 받아준다. 아프리카는 죽은 세계의 마지막 흔적이기도 하고 새롭게 빛나는 세계의 요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에게 아프리카는 그저 ‘고향’​이다. 아프리카에는 딱 하나, 지루하다는 형용사만 빼고 그 어떤 말이라도 붙일 수 있다. (27쪽)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페루로 가야 했을 때 베릴은 아프리카에 남았다. 그만큼 그녀에겐 아프리카가 전부였다. 그리고 운명의 그것, 비행기와 만났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하늘을 나는 기분은 상상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것을 해냈다. 1931년 비행사가 되었고 1936년에는 대서양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단독 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 아프리카 최초의 여자 비행사였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전진했다는 게 중요하다. 아프리카 어느 한 계곡에서 비행기가 추락할 수도 있었고 설령 누군가에게 발견되었더라도 구조대를 기다리며 희망을 가질 수 있던 시절은 아니었으니, 정말 멋지고 대단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은 형체가 없다. 낮게 걸린 별들이 빛나고 달이 은빛 날개를 휘감았을 때, 이 세상은 물이 모두 사라지고 다섯 번째 날의 밤이 여전히 제 존재가 신기하기만 해 당혹스러운 피조물들 위로 내렸을 때의 모습이 분명한 창공처럼 된다. 아무도 텅 빈 지평선에 자기 꾀의 덧없는 상징을 구체화하거나, 도로를 만들려고 땅을 파헤치거나, 집을 지으려고 나무를 쌓기 전의 텅 빈 세계인 것이다. 하지만 불모의 세계는 아니었다. 생명의 기원을 품고 기대에 부풀어 하늘 아래 누워 있는 세상이었다. (364쪽)

 

 밤이 깊을수록 잡념이 파고들 때가 있다. 9월의 중반이 지나고 남은 세 달을 헤아려 보기도 한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라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마음을 모으는 일, 내면을 하나로 집중하는 일, 그 하나가 책을 읽는 일은 아닐까. 차분하면서도 감정의 고조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문장, 담백하고 유려한 문장을 읽는 동안 당신의 내면으로 채워진 까만 밤은 부드러운 이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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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숨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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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을 기억에서 도려낸 것처럼 말끔하게 잊고 살아가려 애쓴다. 그것과 연관된 물건이나 사람과 단절된 채 살아간다.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까 두려운 마음을 숨기면서 멀리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일부라는 걸 부인하고 싶은 정도로 말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다 해도 다르지 않다. 박영의 장편소설 『불온한 숨』속 인물들은 그렇게 위태로운 삶을 지속한다. 

 죽은 딸과 닮았다는 이유로 선택된 제인과 병약한 아들이라서 아버지에게 선택받지 못한 텐의 하루하루는 생존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제인 대신 진짜 제인이 되기 위해 춤을 춰야 버림받지 않을 것 같았고 그림자처럼 살아야만 했다. 아픔을 드러내면 안 되었고 진짜 욕망을 키울 수도 없었다.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진짜 삶을 찾을 용기를 내기엔 제인을 붙잡는 게 많았다. 유모인 크리스티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춘기 딸 레나가 그랬고 무대에서 내려와야 할 서른여덟의 나이가 그랬다. 레나와의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었고 무용수로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런 제인에게 텐의 안무는 기회였다. 그의 충격적인 안무만이 제인을 무대에서 빛나게 할 방법이었다. 적어도 텐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함께 춤을 배운 사이라는 텐의 인사에 제인이 지운 과거가 고스란히 살아났다. 자신에게 접근한 텐의 의도가 무엇인지 제인은 알 수 없었다. 제인과 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 제인에게 춤은 무엇일까.

 

 이제껏 나의 생은 그저 누군가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벌인 한낱 연극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나는 팔과 다리가 잘린 연체동물이 된 것처럼 어둠 속을 더듬어나가야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발자국도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139쪽)

 

 이해할 수 있겠니? 어둠 속에서 추는 춤만이 진정한 춤이라는 걸 그런 춤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걸. 그런 춤을 춰야지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거라는걸.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 오직 너의 춤을 춰. 제인. (155쪽)

 

 싱가포르란 섬을 배경으로 춤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인간의 욕망을 관능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곳곳에서 흐르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몽환적인 춤의 세계로 이끄는 박영의 문장은 신비로운 듯하면서도 ​날카롭다. 감춰진 비밀의 순간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 폐부를 찌르는 듯 격정의 호흡으로 몰아친다. 소설을 읽는 동안 저절로 내 눈앞에 무대가 펼쳐졌고 눈을 가리고 춤을 추는 제인, 그를 바라보는 텐이 나타났다. 세상의 모든 빛과 소리가 사라진 채 오직 춤만이 존재하고 제인을 지배하고 점령하는 듯했다. 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춤을 출수록 거울은 점점 나를 향해 좁혀왔다. 어느덧 나는 사방이 유리도 된 관 속에 갇혀 턴을 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런 내 안의 불안감과 공포를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시치미를 떼고 누구보다 강인한 모습으로 스텝을 밟았다. (32쪽)

 

 눈덩이처럼 커졌을 제인의 이로움은 누가 알 수 있을까. 임선경이 아닌 제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그녀의 처절한 몸부림.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치지 못하고 고스란히 담아둔 고통이 눈 덩어리처럼 커져 자신을 올가 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살아온 그녀. 레나와 제인의 갈등, 지친 제인의 얼굴과 내면의 불안, 그 모든 것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승화시켜다고 하면 맞을까. 성공을 위해 가면 뒤로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제인이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위험한 삶을 사랑하는 크리스티나.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은 간절함과 절대로 벗어버릴 수 없는 단호함, 그 둘 사이를 오가는 욕망. 그녀들의 아슬아슬하고 불온한 몸짓이 곧 폭발할 것만 같아 불안하면서도 그곳이 시원하게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 모두 그런 잠재적 불온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혼자라는 생각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에게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전한다. 잠깐이라도 가면을 벗어버리고 그 바람에 취해도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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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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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김혜진의 책을 전부 읽었고 좋아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가장 좋았고 많은 이들에게 주저 없이 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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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09-11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바로 장바구니에 담겠어요^^

자목련 2018-09-12 06:46   좋아요 0 | URL
정말 좋아할 거라 믿어^^
 
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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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다고 여겼던 배수아의 소설과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 매혹적이지만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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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9-1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수아 작가 수상소식이 나와서 얼마전에 나온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벌써 작년 11월이라서 놀랐어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요.
저목련님, 즐거운 하루 기분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자목련 2018-09-12 06:46   좋아요 0 | URL
그쵸? 벌써 9월도 중반으로 달려가고 있으니까요. 오늘 하루 기쁘게 시작하세요^^
 
소설 보다 : 봄-여름 2018 소설 보다
김봉곤.조남주.김혜진.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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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감정은 시간이 지나서야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오히려 그 감정을 제대로 몰라서 다행은 아니었을까. 서툰 사랑이나 분노였더라면 말이다. 한 작가의 소설을 모은 단편집을 읽을 때 일정한 주제가 보인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작가가 쓰고 싶은 소설의 방향이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여러 작가의 소설을 모아 엮은 소설집은 매 소설마다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테마 소설집을 제외하고 말이다.

 

 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시도이자 기획이라 할 수 있는 『소설 보다: 봄-여름 2018』은 나쁘지 않았다. 네 편의 소설마다 각기 다른 평론가와 작가와의 인터뷰가 담겼다. 봄의 소설(김봉곤, 조남주)과 여름의 소설(김혜진, 정지돈)은 저마다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김봉곤의 소설은 처음인 것 같다. 소설은 처음이지만 그가 쓰는 글에 대해 어느 정도 들었기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정확히 알기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와 다시 만나면서 게이 이전의 일상을 들려주는 「시절과 기분」은 잔잔하면서도 감성의 결이 느껴졌다. 소설에서 소설가로 등단한 ‘나’와 결혼해서 아이 엄마가 된 혜인과의 만남은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처럼 보였지만 자신에 대해 고백 아닌 고백을 해야 하는 ‘나’에게는 조금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듯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추억을 꺼내다 보면 그저 별일 아닌 것처럼 돼버리기도 한다. 소설에서 혜인에게 자신의 책을 건네주는 ‘나’​는 작가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조남주의 「가출」은 어떤 면에서 가장 보편적인 소설이다. 메모를 남기고 가출한 아버지 덕분에 가족들은 자주 모였고 아버지를 걱정하다 점점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 때문에 먹지 못했던 청국장을 먹고 아버지를 이야기하면서 지난 시절을 돌아보고 꺼내볼 수 있으니까. 가출한 아버지에게 놀랄만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고 가족들은 그들의 일상을 이어간다. 가장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보고 내 아버지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되었다. 김혜진의 「다른 기억」은 학교 신문사의 주간 교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는 이야기다. 주간 교수가 파면당하면서 편집장이었던 이와 그의 친구인 화자인 ‘나’는 그 사태에 대해 다른 시선을 갖는다. 주간 교수가 남달리 아꼈던 편집장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믿었고 다른 이들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편집장은 신문사를 떠났고 모두가 졸업한 후에 주간 교수를 만나 자리 역시 그러했다. 편집장이었던 ‘너’는 여전히 극진하게 선생님이라 대하지만 ‘나’는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만 싶다. 김혜진의 소설 속 ‘너’와 ‘나’는 가장 가깝고 내밀한 사이였지만 그래서 더 쉽게 멀어질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현실의 너와 내가 될 수 있기에 불현듯 어느 시절의 너와 내가 겹쳐졌다.

 

 정지돈의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가장 난해하고 어려웠던 소설이다. 흔히 말하기를 지식 조합형 소설이라고 하는 종류의 소설이 아닌가 싶다. 1968년을 배경으로 한국에 온 앙코 씨와 이화여대 영문과에 다니는 정태순이 등장한다. 그 시대의 풍경과 오사카 만국 관람회를 통해 상상하던 미래를 현재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형식의 소설이다. 어떤 부분은 기사처럼 읽히기도 한다. 소설과 다르게 김신식과 나눈 인터뷰에서 ‘일상에 관심이 없다’는 정지돈의 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일상과 관심을 다르게 해석해야 하나 혼자 생각하기도 했다.

 

 네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어느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아버지와 내가 나눈 말들에 대해, 연락할 수 있지만 연락을 하지 않는 동기와 친구들에 대해, 아련하게 그리운 어떤 사람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도. 김봉곤의 이런 문장은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게 아닐까 싶다.

 

 슬픈 것과 사랑하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슬픈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생각했고, 아무래도 아무여도 좋은 일이라고도 잠시 생각했다. 상상만으로도 이미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지만, 가능 세계를 그려보는 일이 예전만큼 즐겁지 않았다. 내가 된 나를 통과한 사람들, 슬픔과 불안에서만 찾아왔던 재미와 미(美) 역시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절과 기분」,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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