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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숨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7월
평점 :
누구나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을 기억에서 도려낸 것처럼 말끔하게 잊고 살아가려 애쓴다. 그것과 연관된 물건이나 사람과 단절된 채 살아간다.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까 두려운 마음을 숨기면서 멀리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일부라는 걸 부인하고 싶은 정도로 말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다 해도 다르지 않다. 박영의 장편소설 『불온한 숨』속 인물들은 그렇게 위태로운 삶을 지속한다.
죽은 딸과 닮았다는 이유로 선택된 제인과 병약한 아들이라서 아버지에게 선택받지 못한 텐의 하루하루는 생존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제인 대신 진짜 제인이 되기 위해 춤을 춰야 버림받지 않을 것 같았고 그림자처럼 살아야만 했다. 아픔을 드러내면 안 되었고 진짜 욕망을 키울 수도 없었다.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진짜 삶을 찾을 용기를 내기엔 제인을 붙잡는 게 많았다. 유모인 크리스티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춘기 딸 레나가 그랬고 무대에서 내려와야 할 서른여덟의 나이가 그랬다. 레나와의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었고 무용수로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런 제인에게 텐의 안무는 기회였다. 그의 충격적인 안무만이 제인을 무대에서 빛나게 할 방법이었다. 적어도 텐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함께 춤을 배운 사이라는 텐의 인사에 제인이 지운 과거가 고스란히 살아났다. 자신에게 접근한 텐의 의도가 무엇인지 제인은 알 수 없었다. 제인과 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 제인에게 춤은 무엇일까.
이제껏 나의 생은 그저 누군가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벌인 한낱 연극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나는 팔과 다리가 잘린 연체동물이 된 것처럼 어둠 속을 더듬어나가야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발자국도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139쪽)
이해할 수 있겠니? 어둠 속에서 추는 춤만이 진정한 춤이라는 걸 그런 춤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걸. 그런 춤을 춰야지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거라는걸.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 오직 너의 춤을 춰. 제인. (155쪽)
싱가포르란 섬을 배경으로 춤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인간의 욕망을 관능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곳곳에서 흐르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몽환적인 춤의 세계로 이끄는 박영의 문장은 신비로운 듯하면서도 날카롭다. 감춰진 비밀의 순간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 폐부를 찌르는 듯 격정의 호흡으로 몰아친다. 소설을 읽는 동안 저절로 내 눈앞에 무대가 펼쳐졌고 눈을 가리고 춤을 추는 제인, 그를 바라보는 텐이 나타났다. 세상의 모든 빛과 소리가 사라진 채 오직 춤만이 존재하고 제인을 지배하고 점령하는 듯했다. 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춤을 출수록 거울은 점점 나를 향해 좁혀왔다. 어느덧 나는 사방이 유리도 된 관 속에 갇혀 턴을 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런 내 안의 불안감과 공포를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시치미를 떼고 누구보다 강인한 모습으로 스텝을 밟았다. (32쪽)
눈덩이처럼 커졌을 제인의 이로움은 누가 알 수 있을까. 임선경이 아닌 제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그녀의 처절한 몸부림.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치지 못하고 고스란히 담아둔 고통이 눈 덩어리처럼 커져 자신을 올가 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살아온 그녀. 레나와 제인의 갈등, 지친 제인의 얼굴과 내면의 불안, 그 모든 것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승화시켜다고 하면 맞을까. 성공을 위해 가면 뒤로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제인이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위험한 삶을 사랑하는 크리스티나.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은 간절함과 절대로 벗어버릴 수 없는 단호함, 그 둘 사이를 오가는 욕망. 그녀들의 아슬아슬하고 불온한 몸짓이 곧 폭발할 것만 같아 불안하면서도 그곳이 시원하게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 모두 그런 잠재적 불온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혼자라는 생각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에게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전한다. 잠깐이라도 가면을 벗어버리고 그 바람에 취해도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