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엔 오늘 첫눈이 내렸지만 이곳엔 어제 첫눈이 내렸다. 첫눈이라는 것 외에는 큰 감흥이 없다. 다만 여느 해와 다르게 첫눈이 내리는 광경을 다른 이들과 함께 보았다는 점이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첫눈을 보았다. 확인할 수 없는 크기의 첫눈이 아니라 제법 눈송이가 큰 눈이었다. 우리는 저마다 첫눈이 온다고 말했다. 교회에 도착하기 전까지 첫눈에 대해 추위와 김장에 대해 말하였다. 말을 하는 이는 노부부였고 나머지는 추임새를 거들기도 했고 웃음으로 답하기도 했다. 언제 김장을 해야 하는지, 배추 값은 어떤지, 추워서 큰일이라는 둥 소소한 일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다시 겨울을 맞고 첫눈을 보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교회에 들어서면서 나누는 인사는 역시 첫눈이 온다는 것이었다.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도 첫눈은 계속 내렸다.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눈발이 참 고왔다. 쌓일 정도는 아니라 곧 그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가을은 없다.

 

 겨울이 온 것이다. 첫눈이 내렸고 따뜻한 내의를 입을까 고민하는 날들이 되었다. 장갑은 꺼냈고 덧신을 챙겼다. 더위보다는 추위를 덜 타는 편이지만 추운 겨울은 싫다. 더운 여름은 쓸쓸하지 않지만 추운 겨울은 왜 쓸쓸한 것일까. 사람과 사람의 온도가 더해져야 겨울을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주 지진 소식은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포항에 지인이 살고 있기에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안전지역이라는 건 없다는 생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사는 게 뭔지. 마음이 계속 어지럽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할 수 있는 동력과 함께 그곳이야말로 사람의 온도가 필요하겠다 싶다. 얇지 않은 겨울이 지속되길. 적당히 두툼한 옷과 적당히 두툼한 마음, 적당히 두툼한 하루가 쌓이기를.

 

 내게도 적당히 두툼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 책에서 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두툼함을 기대한다. 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이 참여한 페미니즘 소설 『현남 오빠에게』와 최근에 배수아의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을 읽은 탓일까. 신간 소설집 『뱀과 물』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수아는 여전히 도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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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1-20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긴 오늘 비처럼 날리는 눈이 내렸어요. 처음에는 비가 오는 줄 알았어요.
자목련님이 계신 곳에서는 어제 눈이 내렸네요. 어제는 추수감사절이었다고 하는데, 좋은 시간 보내셨는지요.
저도 얼마전에 배수아 신작 소식 들었어요.
자목련님, 따뜻한 밤 되세요.^^

자목련 2017-11-22 12:37   좋아요 2 | URL
오늘은, 아침에 비가 조금 내렸어요. 완연한 겨울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서니데이 님, 감기 조심하시고 따듯한 오후 보내세요^^
 
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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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가족, 친구가 아닌 명확한 타인 말이다. 관음증이나 호기심이 아닌 타인의 삶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닌 것이다.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감정을 나누는 사이라면 삶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는 것일까. 누군가의 삶을 질투하고 동경하며 그 영역에 침투하고자 하는 건 잘못된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 몸부림, 그것은 무엇이라 불러야만 할까. 나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다. 내게도 잠재되었을 그것. 2016년 공쿠르상 수상작인 레일라 슬리마니의 장편소설『달콤한 노래』를 읽으면서 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 루이즈에게 나는 그것을 분명히 보았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안개 같은 그것.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고통은 없었다고 의사가 분명하게 말했다.” (9쪽) 이토록 잔인한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누가 무엇 때문에 아이를 죽였단 말인가.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보모였던 루이즈가 아기를 죽였고 자신도 죽으려 했음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루이즈는 누구인가? 자신 있게 루이즈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존재하는가? 

 

소설은 보모 루이즈와 그를 고용한 부부 미리암과 폴 부부의 관계에 대해 들려준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감정들과 부모로 산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가장 완벽한 보모 루이즈에 대해서 말이다. 첫 문장 때문일까. 소설엔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하다. 까탈스러운 딸 밀라와 갓난쟁이 아들 아당, 두 아이를 낳고 변호사로 복귀를 위해 계획을 세우던 미리암은 지인의 추천으로 보모 루이즈를 만났다. 그 뒤 미리암과 폴 부부는 타고난 모성으로 아이뿐 아니라 살림까지 걱정 없이 해결해주는 루이즈에게 많은 것을 의지한다. 두 아이는 점점 루이즈에게 빠져들고 그녀에게 길들여진다. 엄마나 아빠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고 자신을 사랑해주고 원하는 것들을 모두 들어주는 루이즈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원하든 원한지 않든 부모가 되었을 때 아이가 주는 기쁨과 함께 아이에게 얽매였다는 생각을 갖는다. 내가 아닌 아이가 우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리암과 폴이 루이즈 덕분에 직장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자유를 누리는 것을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 

 “미리암은 루이즈와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머리에 스쳐가는 어떤 생각, 잔인하지는 않지만 부끄러운 그런 생각을 엠마에게 절대 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서로가 서로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우리 자신만의 삶, 우리 자신에게 속한 삶, 다른 이들과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가 자유로울 때에만.” (53쪽) 

 “그가 원하는 건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게 전부였다. 자유롭고 싶은 것, 좀 더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이었다. 조금밖에 살아보지 못했는데 너무 늦게야 그걸 깨달은 것이었다. 아버지라는 옷은 그에게 너무 크고도 침침해 보였다.” (154쪽)

 

 소설에서는 세 인물의 내면 묘사가 탁월하다. 가정과 일, 엄마와 변호사 사이에서 갈등하고 루이즈를 두고 남편과 의견 차이를 두는 미리암, 뮤지션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며 욕망을 채우는 폴의 솔직함 심리가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둘에 비해 루이즈는 모호한 인물로 설정한다. 물론 그녀가 살아온 삶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남편은 죽었고 딸은 가출을 했으며 갚아야 할 빚이 있다. 미리암의 아파트 주변 사람들이나 놀이터에서 만나는 보모들과는 거리는 두며 가면을 쓴 것처럼 사람들을 대하며 속내를 감춘다. 마치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듯하다. 

 “고독 속에서 그녀는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진짜로 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 구체적으로 다가와, 진동이 느껴지고 손에 만져졌다.” (128쪽)

 철저하게 혼자였던 루이즈에게 미리암과 폴의 가족은 마지막 비상구처럼 여겨졌던 것일까. 그들 가족과 함께 휴가를 다녀온 후 루이즈는 자신과 그들의 삶을 동일하게 여긴다. 미리암과 폴의 세계로 점점 파고든다는 것을 느낀 미리암과 폴는 부담스럽다. 아이들은 예전처럼 손이 많이 가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파고드는 루이즈의 집착이 두렵다. 침해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 

 
“루이즈는 그들의 집 열쇠를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의 삶 속에 너무 깊이 박혀 있어서 이제 밖으로 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들이 그녀를 밀어내도 그녀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작별 인사를 해도 그녀는 문을 두드려대고 안으로 들어올 것이며, 상처받은 연인처럼 위험할 것이다.” (228쪽) 

 “루이즈는 늘 똑같은 그 둥근 칼라에 너무 긴 치마를 입고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야기를 착각하고 낯선 세상에 와 있는, 영원히 떠돌아야 할 운명을 선고받은 인물 같아 보인다.” (279쪽)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믿은 루이즈는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루이즈를 발견하지만 모르는 척 외면한다.  그녀의 눈에 비친 루이즈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니, 그 모습이 루이즈의 진짜였을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루이즈를 정확하게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미리암의 아파트 주민도 과거 그녀를 안다고 믿었던 이들도, 아이를 맡겼던 부모도. 

 누군가를 안다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두려운 생각이 밀려온다. 전부를 다 알 수는 없겠지만 내가 안다고 믿는 것만큼의 확신이 사라질 것 같다. 반대로 누군가는 나를 얼마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할까. 자신할 수 없는 문제다. 내가 당신을 안다는 것과 당신이 나를 안다는 것, 그 사이의 괴리감이 얼마나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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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1-16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쿠르상 수상작이라고 하면, 이 책도 프랑스작가의 책인 모양이네요.
자목련님, 요즘 날씨가 무척 차갑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7-11-20 18:50   좋아요 2 | URL
네, 대단히 파격적이라 무척 강한 인상을 주었어요. 다음에는 어떤 소설을 쓸까, 궁금해졌어요.
첫눈이 내렸으니 더욱 추워지겠지요. 감기 조심하고 포근한 저녁 보내세요^^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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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산다고 생각했었다. 큰 변화 없이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살아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아고 그저 산다는 게 중요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쉴 새없이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나에게 시작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불현듯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세히 돌아보니 친구, 가족, 그리고 나를 아는 이들도 역시나 저마다 상처의 우물이 있다는 걸 알았다. 꺼내지 않아야 할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다.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후련하게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숨어버린다. 나만을 위한 기록이나 고백으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글은 그런 성질을 지녔다.


 좋아하는 시인이라 말할 수 있는 박준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무척 기대했다. 내 것을 사면서 지인에게도 선물을 했고 그가 SNS 계정에 올려놓은 문장들로 먼저 만났다. 나는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책을 읽었다. 공들여 읽지는 않았다. 그저 천천히 조용하고 담담한 그의 문장을 가만가만 읽었다. 작정하면 빨리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그러나 그렇게 읽지는 않았다. 어느 문장은 꽤 오래 바라보았고 어느 문장은 그의 시집에서 만났다는 걸 기억하고 읽고 또 읽었다. 문학을 업으로 삼은 이, 시인의 산문은 영롱한 빛을 뿜거나 화려하게 반짝이지는 않았다. 보통의 노동으로 채워진 삶이 있었고 보통의 사랑과 이별이 있었다. 곳곳에 애틋함이 있었고 진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것은 떠난 누군가를 향한 것이기도 했고 지난 자신의 삶에 대한 것이기도 했고 사라져간 장소나 숨이거나 울음이기도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흐르다가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울음」, 70쪽)


 어떤 글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의 연장선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어떤 글은 다음 시집에서 만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어디든 한번 가본 곳을 다시 찾게 된다는 그가 글을 쓰기 위해 작은 소읍에서 머문 시간들과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보지 못한 일출과 일몰을 혼자 보았다는 그 바다를 상상한다.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를 음식과 비유한 점은 인상적이었고 전국 곳곳을 여행하며 먹은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그곳에 가면 그 음식을 꼭 먹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어졌다. 트럭을 운전하며 일을 하신 아버지와 그 트럭을 타고 함께 보고 느꼈던 것들을 담은 글은 다정한 아버지를 상상하고 나의 아버지의 낡은 자전거를 떠올렸다. 누군가의 대화에서 한 문장 정도 기억하려고 애쓴다는 글을 읽었을 때는 떠나간 이들, 혹은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가 떠오르면서 우리는 무슨 대화를 나눴던가 기억을 더듬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말은 모두 사랑한다는 말이었다는 게 생각나 가슴이 아려왔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눈으로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나누는 말들, 때로 분노와 미움을 전달하는 말, 따뜻하고 예쁘고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는 시인처럼 나도 그래야겠다. 쉽지 않겠지만 이런 문장을 잊지 않는다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 19쪽)

 

 최근에 이 책을 선물한 지인과 서로의 힘든 일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시간의 힘을 믿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 덜 울게 되고 조금 더 괜찮아진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그녀가 울음을 참고 있다는 걸 그녀는 내가 울음을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그것 역시 시간의 힘을 믿는다면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서로를 위로했다. 그런 위로가 되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이 산문집도 그런 존재다.

 

 아무리 무겁고 날 선 마음이라해도 시간에게만큼은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여긴다. 오래 삶은 옷처럼 흐릿해지기도 하며. 나는 이 사살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른다. (「내 마음의 나이」, 186쪽)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은 힘이 되고 그러겠습니다. (「고아」, 157쪽)

 

 때로 말은 숨어버린다. 해야 할 말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답답할 때 정작 말은 사라진다. 그럴 때 글은 말을 대신한다. 목소리가 아닌 숨결을 전달한다.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같이 울고 있는 당신이 있어 힘이 난다고. 운다고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조금은 괜찮아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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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는 입을 다무네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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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없는 것들을 가진 이에게 매력을 느낀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날씬한 사람,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 ……. 끝이 없다. 그건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가 부단한 노력 끝에 얻은 것일 줄 모르고 천성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어쩔 수 없다. 상대를 전부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겐 없으니까. 조금씩 알아가면서 전부를 향해 가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어쩌면 사랑의 시작이 그러할까, 사랑이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믿는 것일지도. 어떤 수정도 없이 작가의 말도 없는 정미경의 소설 『가수는 입을 다무네』를 읽으면서 정미경의 소설을 더 이상 읽지 못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놀라운 문장을, 섬세한 묘사를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글의 감정을 간직한 그녀의 소설을 말이다.

 

 마지막이라서 그랬을까. 내게는 이 소설이 이전에 만났던 정미경의 소설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천재 뮤지션으로 최고의 가수였던 율과 그의 현재를 다큐로 촬영하는 이경, 그리고 율의 아내 여혜의 이야기가 교차로 이어진다. 예술가 율의 삶과 그의 아내, 그리고 타인의 시선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고통을 천천히 그리고 담담하게 그려낸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아직 모르지? 어딘가가 곪아 터지는데, 감각이 사그라져 버리는 때가 오거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자신의 고통에마저 무감해지는. 그 깨달음이란 얼마나 쓸쓸한 낙하의 느낌인지. (81쪽, 여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그를 전부 다 아는 건 아니다.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면 그것이 사랑이라 해도 견디기 힘든 날들이 온다. 과거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율을 보면서 여혜는 점차 지쳐간다. 그런 그들에게 젊고 생기 넘치는 이경의 등장은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자신에게 닫았던 어떤 감정을 이경에서 열어 보이는 율, 변화하는 율을 보면서 묘한 슬픔을 느끼는 여혜. 단순히 학교 과제로 학점과 장학금을 위해 시작한 다큐를 찍으면서 이경은 카메라 안과 밖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정미경은 어떤 틈도 허락하지 않은 듯 촘촘하게 세 사람의 거리를 완벽하게 조율한다.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하면서 생계와 학업을 지탱하는 대학생 이경과 전설적인 록밴드의 보컬 율은 다른 듯 보이지만 지독하게 닮았다. 모든 걸 내주는 남자친구 현수에게 마음을 내줄 수 있는 여유가 없는 이경과 자신의 음악적 성공보다 율의 재기를 위해 그를 돕는 젊은 뮤지션 호영에게 차갑게 대하는 모습이 말이다. 좌절하면서도 삶을 살아내는 것, 간절하게 무언가 바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견디는 그들의 삶이 애처롭다.

 

 이경은 무슨 일이든 멀리 내다보지 않으려 했다. 닥쳐오는 대부분의 일들은 멀리 보면 볼수록 거의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 낸다는 태도로 삶을 대했다. 부닥치다 보면 뭐가 되든 만들어지겠지. 삶이란 내던져진 미로에서 살아 나가는 일이고 무작정 걸어야 출구를 찾을 수 있다. 세상일이란 원래 데이터나 기댓값으로 비웃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거지. 해보고 안 되면, 그때 옆길로 가면 된다. (111쪽)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던 율, 다시 세상으로 나오고 싶었던 그였다. 그러나 노래를 만들수록 세상에 다가갈수록 그의 고통은 커지고 그런 율을 카메라로 담는 이경은 그가 얼마나 외롭고 지독한 날들을 경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 없이 홀로 살아야 했고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돌아온 엄마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을, 전부를 내 걸고서야 간신히 지탱할 수 있던 삶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호영의 도움으로 무대에 올랐지만 실수를 한 율은 생을 포기하고 남겨진 영상을 보는 이경은 진짜 삶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뜨거운 열정과 재능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삶, 율처럼 예술가가 아니어도 삶을 그러했다.

 

 이갱, 좋은 생은 나쁜 노래를 만들어. 나쁜 생은 좋은 노래를 만들고. 그 둘을 다 겪은 사람만이 위대한 노래를 만들 수 있지. (310쪽)

 

 처음에는 불운한 예술가 율이 소설을 이끄는 듯 보였지만 결국엔 남겨진 자 이경이 주인공은 아닐까 생각한다. 율의 다큐를 찍으면서 이경은 진정한 삶은 실패를 견디는 것이며 그 과정 역시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듯 독자인 나 역시 그러하다. 어딘가에는 성공으로 이어진 삶도 존재하겠지만 보통의 삶은 실패와 고통의 반복이니까. 어떤 생을 살든 그 생을 견디고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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