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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는 입을 다무네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내게 없는 것들을 가진 이에게 매력을 느낀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날씬한 사람,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 ……. 끝이 없다. 그건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가 부단한 노력 끝에 얻은 것일 줄 모르고 천성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어쩔 수 없다. 상대를 전부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겐 없으니까. 조금씩 알아가면서 전부를 향해 가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어쩌면 사랑의 시작이 그러할까, 사랑이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믿는 것일지도. 어떤 수정도 없이 작가의 말도 없는 정미경의 소설 『가수는 입을 다무네』를 읽으면서 정미경의 소설을 더 이상 읽지 못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놀라운 문장을, 섬세한 묘사를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글의 감정을 간직한 그녀의 소설을 말이다.
마지막이라서 그랬을까. 내게는 이 소설이 이전에 만났던 정미경의 소설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천재 뮤지션으로 최고의 가수였던 율과 그의 현재를 다큐로 촬영하는 이경, 그리고 율의 아내 여혜의 이야기가 교차로 이어진다. 예술가 율의 삶과 그의 아내, 그리고 타인의 시선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고통을 천천히 그리고 담담하게 그려낸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아직 모르지? 어딘가가 곪아 터지는데, 감각이 사그라져 버리는 때가 오거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자신의 고통에마저 무감해지는. 그 깨달음이란 얼마나 쓸쓸한 낙하의 느낌인지. (81쪽, 여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그를 전부 다 아는 건 아니다.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면 그것이 사랑이라 해도 견디기 힘든 날들이 온다. 과거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율을 보면서 여혜는 점차 지쳐간다. 그런 그들에게 젊고 생기 넘치는 이경의 등장은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자신에게 닫았던 어떤 감정을 이경에서 열어 보이는 율, 변화하는 율을 보면서 묘한 슬픔을 느끼는 여혜. 단순히 학교 과제로 학점과 장학금을 위해 시작한 다큐를 찍으면서 이경은 카메라 안과 밖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정미경은 어떤 틈도 허락하지 않은 듯 촘촘하게 세 사람의 거리를 완벽하게 조율한다.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하면서 생계와 학업을 지탱하는 대학생 이경과 전설적인 록밴드의 보컬 율은 다른 듯 보이지만 지독하게 닮았다. 모든 걸 내주는 남자친구 현수에게 마음을 내줄 수 있는 여유가 없는 이경과 자신의 음악적 성공보다 율의 재기를 위해 그를 돕는 젊은 뮤지션 호영에게 차갑게 대하는 모습이 말이다. 좌절하면서도 삶을 살아내는 것, 간절하게 무언가 바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견디는 그들의 삶이 애처롭다.
이경은 무슨 일이든 멀리 내다보지 않으려 했다. 닥쳐오는 대부분의 일들은 멀리 보면 볼수록 거의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 낸다는 태도로 삶을 대했다. 부닥치다 보면 뭐가 되든 만들어지겠지. 삶이란 내던져진 미로에서 살아 나가는 일이고 무작정 걸어야 출구를 찾을 수 있다. 세상일이란 원래 데이터나 기댓값으로 비웃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거지. 해보고 안 되면, 그때 옆길로 가면 된다. (111쪽)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던 율, 다시 세상으로 나오고 싶었던 그였다. 그러나 노래를 만들수록 세상에 다가갈수록 그의 고통은 커지고 그런 율을 카메라로 담는 이경은 그가 얼마나 외롭고 지독한 날들을 경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 없이 홀로 살아야 했고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돌아온 엄마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을, 전부를 내 걸고서야 간신히 지탱할 수 있던 삶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호영의 도움으로 무대에 올랐지만 실수를 한 율은 생을 포기하고 남겨진 영상을 보는 이경은 진짜 삶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뜨거운 열정과 재능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삶, 율처럼 예술가가 아니어도 삶을 그러했다.
이갱, 좋은 생은 나쁜 노래를 만들어. 나쁜 생은 좋은 노래를 만들고. 그 둘을 다 겪은 사람만이 위대한 노래를 만들 수 있지. (310쪽)
처음에는 불운한 예술가 율이 소설을 이끄는 듯 보였지만 결국엔 남겨진 자 이경이 주인공은 아닐까 생각한다. 율의 다큐를 찍으면서 이경은 진정한 삶은 실패를 견디는 것이며 그 과정 역시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듯 독자인 나 역시 그러하다. 어딘가에는 성공으로 이어진 삶도 존재하겠지만 보통의 삶은 실패와 고통의 반복이니까. 어떤 생을 살든 그 생을 견디고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