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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평점 :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산다고 생각했었다. 큰 변화 없이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살아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아고 그저 산다는 게 중요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쉴 새없이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나에게 시작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불현듯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세히 돌아보니 친구, 가족, 그리고 나를 아는 이들도 역시나 저마다 상처의 우물이 있다는 걸 알았다. 꺼내지 않아야 할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다.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후련하게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숨어버린다. 나만을 위한 기록이나 고백으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글은 그런 성질을 지녔다.
좋아하는 시인이라 말할 수 있는 박준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무척 기대했다. 내 것을 사면서 지인에게도 선물을 했고 그가 SNS 계정에 올려놓은 문장들로 먼저 만났다. 나는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책을 읽었다. 공들여 읽지는 않았다. 그저 천천히 조용하고 담담한 그의 문장을 가만가만 읽었다. 작정하면 빨리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그러나 그렇게 읽지는 않았다. 어느 문장은 꽤 오래 바라보았고 어느 문장은 그의 시집에서 만났다는 걸 기억하고 읽고 또 읽었다. 문학을 업으로 삼은 이, 시인의 산문은 영롱한 빛을 뿜거나 화려하게 반짝이지는 않았다. 보통의 노동으로 채워진 삶이 있었고 보통의 사랑과 이별이 있었다. 곳곳에 애틋함이 있었고 진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것은 떠난 누군가를 향한 것이기도 했고 지난 자신의 삶에 대한 것이기도 했고 사라져간 장소나 숨이거나 울음이기도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흐르다가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울음」, 70쪽)
어떤 글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의 연장선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어떤 글은 다음 시집에서 만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어디든 한번 가본 곳을 다시 찾게 된다는 그가 글을 쓰기 위해 작은 소읍에서 머문 시간들과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보지 못한 일출과 일몰을 혼자 보았다는 그 바다를 상상한다.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를 음식과 비유한 점은 인상적이었고 전국 곳곳을 여행하며 먹은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그곳에 가면 그 음식을 꼭 먹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어졌다. 트럭을 운전하며 일을 하신 아버지와 그 트럭을 타고 함께 보고 느꼈던 것들을 담은 글은 다정한 아버지를 상상하고 나의 아버지의 낡은 자전거를 떠올렸다. 누군가의 대화에서 한 문장 정도 기억하려고 애쓴다는 글을 읽었을 때는 떠나간 이들, 혹은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가 떠오르면서 우리는 무슨 대화를 나눴던가 기억을 더듬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말은 모두 사랑한다는 말이었다는 게 생각나 가슴이 아려왔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눈으로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나누는 말들, 때로 분노와 미움을 전달하는 말, 따뜻하고 예쁘고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는 시인처럼 나도 그래야겠다. 쉽지 않겠지만 이런 문장을 잊지 않는다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 19쪽)
최근에 이 책을 선물한 지인과 서로의 힘든 일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시간의 힘을 믿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 덜 울게 되고 조금 더 괜찮아진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그녀가 울음을 참고 있다는 걸 그녀는 내가 울음을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그것 역시 시간의 힘을 믿는다면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서로를 위로했다. 그런 위로가 되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이 산문집도 그런 존재다.
아무리 무겁고 날 선 마음이라해도 시간에게만큼은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여긴다. 오래 삶은 옷처럼 흐릿해지기도 하며. 나는 이 사살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른다. (「내 마음의 나이」, 186쪽)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은 힘이 되고 그러겠습니다. (「고아」, 157쪽)
때로 말은 숨어버린다. 해야 할 말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답답할 때 정작 말은 사라진다. 그럴 때 글은 말을 대신한다. 목소리가 아닌 숨결을 전달한다.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같이 울고 있는 당신이 있어 힘이 난다고. 운다고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조금은 괜찮아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