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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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마땅히 붙일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별로 없고 결말이 죽음이나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p 9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독자는 혼란스럽다. 이것이 계획된 도입인지, 그저 소설의 시작일 뿐인지.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의 직업은 작가이다.  저자인 동시에 소설 속 인물인 것을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소설의 첫 문장은 ‘서머싯 몸’의 솔직한 표현이며, 소설을 설명하는 게 맞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은 1919년을 시작으로 1929년 미국 경제 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미국 젊은이들의 삶을 쓰고 있다. 1차 세계 대전에 조종사로 전쟁에 참가하고 돌아온 래리, 래리의 약혼자 이사벨, 사업가의 아들 그레이, 이사벨의 친구 소피와 그들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에서 죽음을 목도한 래리는 자신의 삶의 전환점을 맞는다. 평범하게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는 삶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애쓴다.  파리에서 2년 정도 공부를 하겠다는 래리이사벨래리를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나 파리에서 다시 만난 래리이사벨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약혼자가 아닌 친구로 남기로 한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도 또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래리, 그런 질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물어 온 것들이잖아. 만일 해답이 있다면 벌써 밝혀졌을 거야.”p 117

 이사벨은 파티를 즐기며 여유롭게 살아온 삶 대신 래리가 선택한 삶을 따라 갈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그레이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현실적인 삶을 포기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방황하는 청춘들 곁엔 조언자가 있기 마련, 소설에서는 몸과 이사벨의 외삼촌이자 화자의 오랜 지인으로 등장하는 엘리엇이 있다. 엘리엇은 미국인이지만 유럽의 파리나 영국인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엘리엇은 파티를 열어 귀속과 부유 층을 초대해  그들과의 유대 관계를 지속한다. 물론 그는 대단한 경제력을 지녔다. 엘리엇은 조카인 이사벨래리보다는 그레이를 선택한 것을 지지한다. 그에게 래리는 그저 철 없는 이기적인 청년 일뿐이다. 이사벨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 몸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들고 싶어한다. 그럴 때마다 몸은 날카롭게 아사벨의 속마음을 확인시키며 당황케 한다. 

 래리는 여행을 시작한다. 책을 통사 것들이 아닌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얻기를 원한다. 탄광에서 일을 하고, 여행을 하고 인도에서 오랜 시간 머문다. 그는 삶의 본질적 의미, 선과 악에 대한 답을 찾아다닌다.  세계의 경제 공황으로 인해 그레이의 사업은 부도를 맞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엘리엇은 파리로 그들 가족들 불러들인다.  

 다시 파리에서 만난 래리이사벨래리를 보며 이사벨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래리구도자의 모습이다.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 하며 자주 어울린다.그러다 우연하게 어린 시절 친구인 소피를 만나게 되고 마약과 술에 찌든 소피와 래리의 결혼 소식을 접한다. 이사벨은 자신과의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래리가 보잘 것 없고 엉망이 된 소피를 선택함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이사벨은 용의주도하게 계획을 짜 소피가 래리를 떠나게 만든다.엘리엇의 유산으로 다시 재계한 이사벨의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방탕한 삶을 끝내지 못한 소피는 죽음에 이른다. 젊은 구도자 래리는 여전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화자인 몸은 그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대신 한 발 정도 떨어진 곳에서 관찰한다. 소설은 1920년대 파리나 영국 사회의 화려한 예술과 문화를 보여준다.  가면 무도회와 멋스러운 별장, 고가의 의류와 보석으로 지창한 이사벨과 엘리엇, 왁자지걸 시끄러운 식당과 허름한 숙소의  소피와 래리의 대조된 삶은 시대을 반영한다. 소설엔 분명 놀라운 사건이 없다. 이사벨이나 래리의 삶이 특별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선택일뿐이다. 이사벨의 선택과 래리의 선택이 다를 뿐이다. 500쪽이 넘는 책은 예상외로 재미있게 읽힌다. 이것이 작가의 힘일까?  

 대부분의 고전이 그러하듯 <면도날>도 출판에 이어 1946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면도날은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떠올렸다. 전쟁과 세계 공황, 그 안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 같은 시대가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묘사될 수 있구나 싶었다. 살아가면서 선택해야 할 많은 것들,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일 것이다. 면도날,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 날카로움은 날카롭게 사고하고 선택하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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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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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승 시인은 슬픔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인이다. 그에게 슬픔은 기쁨과 동시에 사랑이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나는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을 읽으면서 정호승 시인이 환갑의 나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왠지 시인은  내가 시를 처음 만났던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시도 그랬다.  아니, 어떤 글이든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나면 느낌이 달라진다. <슬픔이 기쁨에게>란 시가 내게 다른 말을 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를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아가겠다 <슬픔이 기쁨에게, 전문 p 16~17>

 20대엔 그저 슬프기만 했던 시인데, 지금 내게 이 시는 함께 사는 세상이니, 주위를 둘러보라고 조용하지만 강한 어조의 외침으로 들린다. 소외된 이웃들을 외면하는 우리에게 훈계하는 시인의 목소리. 그리하여 슬픔과 절망을 이겨낸 진정한 기쁨을, 더불어 사는 기쁨을 맛보라고 말한다. 특히 이 구절은(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언제나 나만을 위해 눈물 흘리던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사람들은 때대로/ 수평선이 될 때가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릴 때가 있다// 밤이 지나지 않고 새벽이 올 때/ 어머니를 땅에 묻고 산을 내려올 때// 스스로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들이/ 모든 증오일 때//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린다 <삶, 전문p 66>

 삶은 그랬다. 어떤 날은 잔뜩 흐렸고, 어떤 날은 화창한 것. 산다는 것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일,  천당만 있기를 바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 없는 욕심인 것을.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려도 그곳엔 또 다른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알아버렸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엇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운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전문 p 102>

 점점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습관처럼 입에서 쏟아지는 불평, 불만들. 감사를 잊고 산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절망에 가득찬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이가 있는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가. 정호승 시인의 시는 먼지 가득한 유리창 같은 우리네 마음을 씻겨주는 빗줄기와 같다. 너무 더러워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 시인의 강한 빗줄기가 우리의 창을 두드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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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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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얼마나 큰 위력을 가지고 있을까. 권력과 부가 언론을 장악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진실을 은폐하고도 천연덕스럽게 세상을  향해 웃는 이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분노하는 이는 분노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온라인 연재로 뜨거웠던 소설, 단 한번도 클릭하지 않았기에 <도가니>가 더 기대되었다. 
 
 소설은 몇 년전 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모든 이의 기억에서 사라진 사건이 다시 세상을 뜨겁게 달군다.  무진이라는 안개로 대표되는 소도시의 청각장애학교 자애학원에 기간제 교사로 오게 된 강인호와 무진 인권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서유진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나간다. 일반적인 상식을 갖고 수화를 배워 학교에 도착한 강인호는 안개보다 더 짙은 냉소를 느낀다. 소리가 없는 학교, 아이들은 무표정하다. 

 강인호는 사업에 실패하고, 청탁으로 얻은 자리지만, 교사로써의 책임을 다하려 한다. 그러나 곧 학교라는 이름뿐인, 추악한 재단의 실체를 만난다. 교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연두의 진술을 시작으로 행정실장, 생활지도사들이 어리고 약한 학생들을 유린한 사실을 알게 된다. 대학 선배인 서유진이 경찰에 수사를 요청하지만, 소도시의 경찰서는 이미 자애학원의 그늘에 있었다. 그랬다, 무진의 안개처럼 자애학원이 쳐 놓은 거미줄에 기관이 얽히고 설켜 있었다. 

 강인호와 서유진은 언론의 힘을 이용하려 한다. 통역사를 동원해 연두를 비롯한 아이들의 진술을 녹취하고 세상에 공개한다. 그들도 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 아이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준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세상은 들썩였고, 진실이 정의가 실현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자애학원의 힘은 변호사와 판사에게도 영향력을 미쳤다. 가난하여, 학교를 믿었기에 아이들을 맡겨 놓고 생계를 이어갔던 아이들의 부모에게도 손을 뻗쳤다.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돈을 풀어 합의하게 종용하고 만다. 

 법정에 아이들이 서고, 소리 없는 진실이 법정에 울려퍼진다.  더 이상 읽어나갈 수 없었다.  우리는, 연두의 엄마처럼, 아이를 법정에 세울 수 있을까, 서유진처럼 그들을 위해 세상과 싸울 수 있을까. 강인호처럼 그 아이들을 보듬어 줄 수 있을까. 그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고만 있었다. 예상했던 것 처럼 법 역시도 권력에 무너지고, 아이들은 소리 대신 온 몸으로 농성을 시작한다. 서유진은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지만, 강인호는 서울에서 온 아내와 딸과 함께 안개 속 무진을 벗어난다. 

 누구도 강인호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다. 그저 평범하게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고 싶었으리라. 무진에 오지 않았다면, 연두같은 아이들도 아픈 아이를 데리고 혼자의 몸으로 인권 운동을 하는 서유진과도 만나지 않았으리라.  인권이 유린되고, 무자비한 폭력이 행해지는 그곳에 있었다 해도 강인호처럼 그들의 편에 설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안개로 가득한 무진은 결국 우리가 사는 사회의 자화상이었다.  ‘선생님들은 늘 한쪽 눈으로는 우리를, 다른 쪽 눈으로는 다른 곳을 바라보시는 것 같았거든요. ’p 170  연두가 쓴 편지는 사회 모든 구성원의 모습이었다. 가려진 그곳에서 진실은 외면되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짓밟는다. 우리의 이기심은 가려진 그곳을 알고 싶어하지 않고,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음에 두려웠다. 아니, 이미 약자이기에 세상이 무서워졌다. 그러나 분명 가려진 안개를 걷는 이가 있음을 알기에 힘이 났다.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 p 257

 서유진의 말은 우리 모두의 외침이 되어야 한다는 공지영의 목소리였다.  작가 공지영은 작가 이상의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을 확신한다. 만약, 공지영이라는  작가가 아니었다면, 같은 내용을 담은 소설이라도 그 열기를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또 얼마나 울었을까, 얼마나 다짐했을까, 이런 소설을 써줘서 고맙다. 고통을 이겨내며 안개 가득한 세상의 선두가 되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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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강영숙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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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테마로 한 소설집에서 강영숙의 단편을 읽은 기억이 전부다. 그러니까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를 통해서 강영숙를 처음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우선, 강렬함과 은밀함을 암시하는 표지에 대해 언급해야 겠다. 무언가 비밀을 말하려 하는 한 이미지는 어떻게 소설에서 연결될까.   그러나 책에 수록된 9편의 단편은 사실, 모두 울적했다. 일부러 명랑한 척 위장한 소설도 있었지만, 은밀함보다는 울적함이 더 잘 어울리는 소설들이었다.
 
 소설은 도시라는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의 모음이라고 할까. 그러나 일반적인 범함이 없었다. 삶에 지쳤기 보다는 의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주변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였고, 어울리지 못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있어도 ,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타인과의 소통이 아닌 독백이나 방백 태였다.
 
 편지글로 이뤄진 <스쿠터 활용법>을 시작으로 소설은 무기력했고, 어지러웠으면, 난해하기도 했다. 모두가 나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지만, 들어주는 이 없는 혼자만의 이야기와 같았다. <안토니오 신부님>, <K에게>도 그렇다. 
 
 소설의 화자는 <K에게>를 제외하고 모두 여자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누군가과 이별했거나,  떠나보냈고 혼자의 삶을 지탱하려 노력한다. 그렇다 하여 이야기가 슬프거나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담담했고 조용해서 독자가 더 긴장하게 된다. 그녀들은 도시 한 복판에서 수영복을 입고 뛰어다니기도 했고, 유부남과 사귀어 집안이 발칵 뒤집혔을 때도, 외국인 남자 친구에게 돈을 떼였을 때도 안토니오 신부에게 전화 한 통만 걸면 해결될 꺼라 믿은 <안토니오 신부님>의 그녀처럼 철이 없기도 했으며, 60세의 생일에 영정 사진을 찍는 등, 엉뚱한 면을 가졌다.
 
 단편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와 <령>의 주인공 이름은 모두 령이다. 하여 두 소설은 마치 동일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그린 듯 착각한다. 아니, 어쩜 그럴지도 모른다.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속 령은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매립지 위에 고가의 아파트로 이사를 한다. 근처에 여전하게 넓은 매립지가 있고, 전차가 다니고,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령은 언제나 혼자다. 혼자 밥을 먹고, 산책하고, 직장에서도 혼자다. 퇴근 후 상가를 어슬렁 거리는 것도 사람들의 무리속에 가까이 있고 싶기 때문이다.
 
 <령>의 령은 낡은 빌라에 살고 있고, 생필품도 떨어지고 있으며, 전기도 가스도 공급이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 그녀 역시 혼자다. 앞집 할머니가 말 상대의 전부이고 심지어는 청소기와 대화를 나눈다.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는 화려하고 거대한 공간을 그렸고, <령>의 낙후되고 더럽다. 두 명의 령은 외롭고, 지루한 삶을 살고 있다.  어디에 살든, 누구든 외롭고 그 삶에 점점 동화되기도 한다.
 
‘구름이 가리고 남은 하늘보다 이 매립지가 훨씬 더 넓을거야. 그러니까 바다는 매립지 속으로 흐르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왜 보이지 않겠어.’p 56  이 검은 매립지에서 바다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나름대로의 어떤 몸부림을 하고 있을 테다. 
 
죽은 자들을 초대하는 독특한 소재의 <자이언트의 시대>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자살한 친구, 아들을 선호하던 할아버지, 결국 딸만 낳은 엄마는 모두 화자에게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죽은 자의 혼령이라지만 그들은 음울하지도 무섭지도 않다. 오히려 산자인 화자를 압도한다. 죽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암호를 대야하고, 거인이 된 화자에게만 보이는 그들이다.  지난 날을 힐책하기도 하고, 현재 그들의 세상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평범하지 않은 화자, 하여 그는 평범한 사람들 아닌 죽은 영혼들과의 대화만 가능했던 것일까. 

‘골반뼈가 시원이 걷고 나면 체중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몸이 가벼워지면서 골반뼈가 시원해져요. 그러나 그런 시원함 뒤에 몰려오는 피로는 다시 사람을 조금은 우울하게 만들죠. 아침에 일어날 때는 희망에 가득차 있다고 느끼다가도 퇴근할 무렵이 되면 극도로 우울해져요.’ p 11

<스쿠터 활용법>에 한 부분이다. 아침에 희망이, 저녁엔 우울함이 있다는 것이다.  강영숙의 소설을 대변하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밝은 듯 어두웠고, 가벼운 듯 무거웠다.우울함이 지나  아침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적잖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대답 대신 직접 읽어보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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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나무 식기장 - 제15회 한무숙문학상 수상작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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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통해 만나는 삶은 소설이므로 가능한 삶이 있는 반면, 이것이 과연 소설일까 하는 삶도 있다. 소설속에 녹아든 일상이 평범하여 마치 누군가의 인생 스토리를 듣는 듯 하다. 이현수의 소설 <장미나무 식기장>은 사실, 제목과 표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찬장'이라 불리며 마루 한 쪽에 놓여있던 내 어머니의 낡은 장식장이 떠올랐다. 이현수의 소설에는 여자의 다양한 삶이 있었다. 
 
 ‘어제 산 여자는 닭살 피부였다. 옷을 벗겨보니 생각보다 휠씬 오돌토돌햇다. 드물게도 운이 좋은 날이었다. ’p 9 단편 <녹>은 조금은 섬뜩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국립중앙박물관 포장 전문 학예사인 남자에게 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오로지 그에게는 유물만이 전부였고, 최우선이었다. 손이 갖는 고유의 감각을 기억하기 위해, 여자를 만났는지 모른다. 하여, 함께 살았던 여자가 떠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물이 좋으면 유물과 살라고 말이다. 

 이 단편은 불교박물관에 학예관으로 일하는 은영이 역사학도인 후배 정호의 청혼을 거절하는  <남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되는 것들의 목록>와 함께 읽으면 좋다. 대대로 내려오는 문화재 남유당을 지키는 안주인 역할을 은영은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행여 집이 어떻게 될까 싶어 전전긍긍하며 남들에게 부러움과 대단한 삶인양 보여도 정작 내가 아니면 아닌 것이다. <녹>여자도 은영도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표제작인 <장미나무 식기장>과 <추풍령>은 과거의 추억에서 이어진 현재를 이야기한다.  <추풍령>은 대대로 여자만이 남겨져, 그리하여 자동적으로 호주가 되어야 했던 여자가 풀어내는 이야기. 내력인지 모두 과부가 된 여자들은 집 안 살림과 먹거리에 정성을 다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어머니만은 여기 저기 친척집을 전전하며 밖으로 나돈다. 

 주인공은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한번씩 집에 돌아와서 끓여준 감자탕은 집 안 여자들뿐아니라, 동네 모든 여자들과 함께 먹었다. ‘감자탕을 먹는 동안은 호주라는 무거운 짐도 내려놓을 수가 있었고, 슬픔과 분노, 원인을 알 수 없는 노여움, 삿된 기운일 수도 있는, 몸 안에 떠도는 대책 없는 열기 들을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잠재울 수가 있었다. ’p 61 어머니의 한과 슬픔이 녹아들어 끊인  감자탕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힘이었다.

<장미나무 식기장>의 주인공은 어느날 주워 온 장미나무 식기장을 보고 어린 시절 책상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만든 살통을 겸한 책상은 부피만 컸을 뿐, 실용적인 구석이라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가 죽고 가장이 된 어머니는 수완좋게, 억척스럽게 살림을 늘렸고, 애물단지 같은  책상을 어디든 끌어안고 다녔다.

 ‘책상은 어머니에겐 그냥 책상이 아니었다. 나와 언니들이 무심히 책상을 볼 때도 어머니는 그 책상을 다른 눈으로 봤던 것이다. (……)생전의 아버지는 그 물건이 어떤 용도로 쓰일 때 기뻤을까. 그것이 책상이라면 단 한순간일도 온전한 책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것이 쌀통이라면 단 한순간이라도 온전한 쌀통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상의 모든 아버지 같은, 요령부득한 그 물건.’p 101 

 결국 자신의 손으로 태워버렸지만 어머니에게 그 책상은 아버지를 대신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것이다. 여자 혼자 딸 셋을 키우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때는 몰랐을 터, 삶은 그런 것이리라.

 <남의 정원에 함부로 발 들이지 마라>는 우연하게 늙은 여자의 정원에 들어간 젊은 여자의 일상이다. 후처의 삶을 선택한 젊은 여자, 본처였지만 귀가 넷인 아이를 낳고 엄마와 아내의 자리를 저버린 늙은 여자. 일반적인 삶이라 볼 수 없다. 계모라는 자리를 벗어던질 수 없었고, 버린 아이를 키워온 후처에게 늘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 있어 더 속도를 내고, 신나게 읽었다. 그러나 결코 신나지 않은 소설이었다. 그들에겐 남들은 쉬이 사는 것 처럼 보였을 삶이 얼마나 기막힌가 생각하니 자못 슬퍼졌다.  

 한 때, 소녀였던 그녀들은 이제 엄마가 되거나 중년의 여인이 되어 지나온 삶을 반추하리라.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이를 먹이고 입히며,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 어머니가 소중하게 여겼던 살림살이, 마흔이 넘어 혼자인 큰 언니, 이제 결혼을 준비하는 친구를 소설 속에서 만난 것이다.

소설은 막힘없이 읽혔다. 해서 너무 잘 익는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느낌, 그것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슬그머니 했다.  살아 온 날들을 기록한다면, 어떤 단편과 가장 근접할까, 남겨진 삶은 잘 살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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