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정호승 시인은 슬픔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인이다. 그에게 슬픔은 기쁨과 동시에 사랑이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나는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을 읽으면서 정호승 시인이 환갑의 나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왠지 시인은  내가 시를 처음 만났던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시도 그랬다.  아니, 어떤 글이든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나면 느낌이 달라진다. <슬픔이 기쁨에게>란 시가 내게 다른 말을 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를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아가겠다 <슬픔이 기쁨에게, 전문 p 16~17>

 20대엔 그저 슬프기만 했던 시인데, 지금 내게 이 시는 함께 사는 세상이니, 주위를 둘러보라고 조용하지만 강한 어조의 외침으로 들린다. 소외된 이웃들을 외면하는 우리에게 훈계하는 시인의 목소리. 그리하여 슬픔과 절망을 이겨낸 진정한 기쁨을, 더불어 사는 기쁨을 맛보라고 말한다. 특히 이 구절은(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언제나 나만을 위해 눈물 흘리던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사람들은 때대로/ 수평선이 될 때가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릴 때가 있다// 밤이 지나지 않고 새벽이 올 때/ 어머니를 땅에 묻고 산을 내려올 때// 스스로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들이/ 모든 증오일 때//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린다 <삶, 전문p 66>

 삶은 그랬다. 어떤 날은 잔뜩 흐렸고, 어떤 날은 화창한 것. 산다는 것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일,  천당만 있기를 바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 없는 욕심인 것을.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려도 그곳엔 또 다른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알아버렸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엇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운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전문 p 102>

 점점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습관처럼 입에서 쏟아지는 불평, 불만들. 감사를 잊고 산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절망에 가득찬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이가 있는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가. 정호승 시인의 시는 먼지 가득한 유리창 같은 우리네 마음을 씻겨주는 빗줄기와 같다. 너무 더러워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 시인의 강한 빗줄기가 우리의 창을 두드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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