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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마땅히 붙일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별로 없고 결말이 죽음이나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p 9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독자는 혼란스럽다. 이것이 계획된 도입인지, 그저 소설의 시작일 뿐인지.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의 직업은 작가이다. 저자인 동시에 소설 속 인물인 것을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소설의 첫 문장은 ‘서머싯 몸’의 솔직한 표현이며, 소설을 설명하는 게 맞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은 1919년을 시작으로 1929년 미국 경제 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미국 젊은이들의 삶을 쓰고 있다. 1차 세계 대전에 조종사로 전쟁에 참가하고 돌아온 래리, 래리의 약혼자 이사벨, 사업가의 아들 그레이, 이사벨의 친구 소피와 그들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에서 죽음을 목도한 래리는 자신의 삶의 전환점을 맞는다. 평범하게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는 삶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애쓴다. 파리에서 2년 정도 공부를 하겠다는 래리. 이사벨은 래리를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나 파리에서 다시 만난 래리와 이사벨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약혼자가 아닌 친구로 남기로 한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도 또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래리, 그런 질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물어 온 것들이잖아. 만일 해답이 있다면 벌써 밝혀졌을 거야.”p 117
이사벨은 파티를 즐기며 여유롭게 살아온 삶 대신 래리가 선택한 삶을 따라 갈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그레이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현실적인 삶을 포기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방황하는 청춘들 곁엔 조언자가 있기 마련, 소설에서는 몸과 이사벨의 외삼촌이자 화자의 오랜 지인으로 등장하는 엘리엇이 있다. 엘리엇은 미국인이지만 유럽의 파리나 영국인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엘리엇은 파티를 열어 귀속과 부유 층을 초대해 그들과의 유대 관계를 지속한다. 물론 그는 대단한 경제력을 지녔다. 엘리엇은 조카인 이사벨이 래리보다는 그레이를 선택한 것을 지지한다. 그에게 래리는 그저 철 없는 이기적인 청년 일뿐이다. 이사벨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 몸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들고 싶어한다. 그럴 때마다 몸은 날카롭게 아사벨의 속마음을 확인시키며 당황케 한다.
래리는 여행을 시작한다. 책을 통사 것들이 아닌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얻기를 원한다. 탄광에서 일을 하고, 여행을 하고 인도에서 오랜 시간 머문다. 그는 삶의 본질적 의미, 선과 악에 대한 답을 찾아다닌다. 세계의 경제 공황으로 인해 그레이의 사업은 부도를 맞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엘리엇은 파리로 그들 가족들 불러들인다.
다시 파리에서 만난 래리와 이사벨. 래리를 보며 이사벨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래리는 구도자의 모습이다.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 하며 자주 어울린다.그러다 우연하게 어린 시절 친구인 소피를 만나게 되고 마약과 술에 찌든 소피와 래리의 결혼 소식을 접한다. 이사벨은 자신과의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래리가 보잘 것 없고 엉망이 된 소피를 선택함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이사벨은 용의주도하게 계획을 짜 소피가 래리를 떠나게 만든다.엘리엇의 유산으로 다시 재계한 이사벨의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방탕한 삶을 끝내지 못한 소피는 죽음에 이른다. 젊은 구도자 래리는 여전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화자인 몸은 그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대신 한 발 정도 떨어진 곳에서 관찰한다. 소설은 1920년대 파리나 영국 사회의 화려한 예술과 문화를 보여준다. 가면 무도회와 멋스러운 별장, 고가의 의류와 보석으로 지창한 이사벨과 엘리엇, 왁자지걸 시끄러운 식당과 허름한 숙소의 소피와 래리의 대조된 삶은 시대을 반영한다. 소설엔 분명 놀라운 사건이 없다. 이사벨이나 래리의 삶이 특별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선택일뿐이다. 이사벨의 선택과 래리의 선택이 다를 뿐이다. 500쪽이 넘는 책은 예상외로 재미있게 읽힌다. 이것이 작가의 힘일까?
대부분의 고전이 그러하듯 <면도날>도 출판에 이어 1946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면도날은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떠올렸다. 전쟁과 세계 공황, 그 안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 같은 시대가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묘사될 수 있구나 싶었다. 살아가면서 선택해야 할 많은 것들,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일 것이다. 면도날,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 날카로움은 날카롭게 사고하고 선택하라는 것인가.